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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분류:정약용]] [[분류:대한민국의 인물별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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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include(틀:상위 문서, 문서명1=정약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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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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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정약용]]의 생애를 서술하는 문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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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 어린시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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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1762년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 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94)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이 태어난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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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정선, 영월, 충주, 여주를 거쳐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현재는 생가터와 실학박물관 등 정약용 유적지가 잘 조성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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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부친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윤소온(해남 윤씨, 조부 윤두서, 부친 윤덕렬)씨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며, 정약용은 4남 2녀 중 네번째 아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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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정약용이 태어난 해에는 영조의 노여움을 산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일이 벌어졌다.(5월) 부친 정재원은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였고 그해 6월에 태어난 정약용의 아호를 귀농이라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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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벼슬을 탐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말고 농촌에 귀의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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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정약용의 선조들은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모두 홍문록에 올랐는데 고조부, 증조부, 조부의 3대에 이르러서는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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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아버지 정재원은 1762년 3월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에는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출세에는 큰 욕심이 없었기에 사돈인 채제공이 대과 응시를 여러차례 권유하였으나 마다하였다. 뒤늦게 음관으로 벼슬길에 나간것은 생활고 때문이었으며호조좌랑, 울산부사, 진주목사(정3품)까지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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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 가문의 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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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본관은 압해였다. 지금은 전라남도 신안군에 속하는 섬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나주목에 속해있었기에 나주 정씨로도 불렸다.조상들은 고려 말에 황해도 배천에 살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서울로 이주했다. 11대 조부 정자급이 승문원 교리를 지낸 이래 8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정수강, 병조 판서를 지낸 정옥형,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정응두, 대사헌을 지낸 정윤복,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정호선, 홍문관 교리를 지낸 정언벽, 병조 참의를 지낸 정시윤이다. 8대 조상이 연이어 모두 홍문관 명부에 이름을 올렸는데, 홍문관은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삼사로 불린 중요부서로 학문이 높은 학자관료만 들어갈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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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조선의 역대 문과 급제자들의 명부인 '국조문과방목'을 보면 홍문관에서 근무한 자들은 따로 표시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시대 청요직의 상징으로서 정승·판서 등 고위 관리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곳을 거쳐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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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그래서 정약용은 평소 팔대옥당이라 하며 학문명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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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여 남인이 몰락하자 5대조 정시윤은 당쟁을 피해 경기도 광주 마현으로 옮겨 살았다. 고조부 정도태, 증조부 정항신은 벼슬을 하지 못했다.고조 정도태, 증조 정항신은 진사시에 입격했고, 조부 정지해는 통덕랑에 오르기는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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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 언문습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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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정약용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부친 정재원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여헝 정약전은 성호 이익의 학맥을 잇는 녹암 권철신으로부터 사사했으나 정약용은 부친의 가르침 이외에 독학하였다. 이가환, 이승훈과 교류하게 되면서 이익의 학문을 접했으나 유작을 통해서 사숙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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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네살에 천자문을 배웠고 일곱 살 때 '바다'라는 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다.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이라는 책을 냈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삼미라는 별명은 어릴 적에 걸렸던 천연두가 나으면서 생긴 흉터 때문에 눈썹이 세 개 생겼다는 뜻이다. 아홉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맏형수 경주 정씨와 계모 김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열살 때 경서와 사서를 모방해서 작문한 글이 자신의 키만큼 쌓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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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사가 명의였던 이헌길의 진료로 인하여 살았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을 구한다. 또한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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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 == 성호학파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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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1776년 결혼하여 처가에 왕래하기 위해 서울을 자주 드나들면서 이때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같은 해 아버지가 다시 벼슬을 하여 호조 좌랑이 되었으므로 서울에 집을 세내어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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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1776년 4월 10일(음력 2월 22일)에 승지 혼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인물이었다. 이승훈도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영향을 받아 정약용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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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이들에게서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정약용이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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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1777년(15세) 화순 현감이 된 아버지를 따라가서 화순현 북쪽에 있는 동림사에 가서 형 정약전과 함께 서책 학습에 매진했다. 1780년(18세) 아버지가 경상도 예천군수로 부임하자 예천에 가서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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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1782년, 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정착 한 후 과거공부에 전념하였고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22세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매달 치르는 시험과 열흘마다 치르는 순시에 매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서 책과 종이와 붓을 상으로 하사받으며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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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 == 대과급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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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 1789년(정조 13년), 27세 되던해에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공서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1년에는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 30세가 되던해인 1792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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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 == 성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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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 사건이 벌어졌을 때 모함을 받아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 곡산 부사 등을 지냈다.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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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 == 곡산부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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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 곡산 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이라는 농업노동자의 조세저항 운동인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다. 법학자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용기를 격려하였다.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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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 == 천주학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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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 1776년 이가환, 이승훈과의 만남으로 성호 이익의 학문에 연을 맺었다. 자연스럽게 남인 소장파 학인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성호 이익 문하에서 학습하여 학문적 명성이 자자한 권철신과도 연을 맺게 된다. 또한 이들이 천주학과 서양학문을 많이 연구하는 터라 정약용도 자연스럽게 이를 접하게 되었다. 권철신이 주도하여 1777년과 1779년에 경기도 양주에 있는 주어사와 천진암을 오가며 여러날에 걸쳐 서학교리 강습회를 열었는데, 정약용은 이벽, 정약전, 권일신, 이가환, 이기양, 이승훈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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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 이 시기에 학문적 호기심에 서양학문과 함께 천주학을 접했다. 1784년 4월에 큰 형수의 제사에 참여했다가 귀경하면서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천지창조의 기원, 영혼과 육신, 생사의 이치에 관한 이벽의 설명은 놀랍고도 오묘하여 즉시 매료되었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책을 여러권 탐독하며 심취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천주교와의 인연은 곧 악연이 되어 훗날 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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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 == 신해박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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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윤지충이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 후 제사를 폐함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진산사건이 발생했다. 정약용의 집안도 큰 충격에 휩싸였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가쪽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조상제사거부는 유학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로써,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는 유교이념으로 떠받쳐져 있는 조선의 지배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이었다. 윤지충과 그의 행위에 동조한 외사촌 권상연은 참수당했다. 평택현감으로 있던 정약용의 매부 이승훈은 삭탈관직 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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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 그동안 정조는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펼쳤었다. 그러나 지난 1788년에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극형을 명한후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서양서적을 소각하여 불온한 서양사상의 전파를 차단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윤지충이 남인이었던 관계로 이 사건을 정쟁화하며 사건을 증폭시켰으며 남인들 조차 공서파와 신서파로 분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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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 한편 천주교가 사악한 종교로 낙인이 찍힌 이 사건을 계기로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다. 그러나 윤지충과 친척이었던 관계로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43] 집안내에서도 약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둘째 형 정약전도 이번 사건 발생직후 배교를 했으나 셋째형 정약종은 반회사건과 신해박해로 전국이 소란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천주교에 대한 열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약종은 교리에 따라 제사참여를 거부하며 갈등하다가 처자식을 데리고 한강 건너 양근의 분원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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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 == 을묘박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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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 1795년 6월, 포도청이 밀입국후 은밀히 활동하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를 체포하는데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관련자들이 체포되여 선교사의 도피처를 추궁받았으나 이들은 끝까지 함구하였고 모진 고문끝에 옥사하였다. 조용히 지나가는듯하던 사건은 2개월 뒤에 대사헌 권유가 세 사람이 일찍 죽는 바람에 선교사 주문모 체포의 기회를 놓쳤는데, 이는 포도대장의 경솔함과 사건의 진상을 덮으려한 의혹이 있어 보이니 치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부사과 박장설이 이승훈·이가환·정약용이 주문모 도주사건에 연류되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자 이들을 성토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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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 노론 벽파의 공세가 빗발치자 정조는 한발 물러서게 되었는데, 결국 1795년 7월 25일에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 보내고,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충청남도 홍주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다. 당시 충청지역에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성장하고 있던터라 정조는 이 지역으로 이들을 보내어 교세 확산을 막음으로 천주교에 심취했었던 과오를 속죄하고 지방좌천을 통해 노론 공격의 예봉도 차단하려 내린 초치였다. 정약용은 무려 7품계나 떨어지며 체면이 몹시 구겨졌다. 그러나 정약용이 금정에서 교세 저지를 위해 펼친 노력은 실효를 거두었고 충청지역 천주교계의 거물인 이존창을 체포하는 공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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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 == 유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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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하였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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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 == 본 문서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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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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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95%BD%EC%9A%A9|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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