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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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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서울대학교]] [[분류:대한민국의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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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gcolor=#ffffff,#191919><colbgcolor=#034f36><tablebordercolor=#034f36><colcolor=#f9d800> '''{{{+1 김세진(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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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세진 사진.jpg|width=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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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width=24%> '''이름''' || '''{{{+1 김세진}}}[br]{{{-2 金世鎭 | Kim Sej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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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height=40> '''출생''' ||1965년 2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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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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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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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height=40> '''사망''' ||1986년 5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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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height=40> '''사인''' ||자살(화기에 의한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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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height=40> '''사인''' ||[[자살]](화기에 의한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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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height=40> '''국적''' ||[[파일:태극기.jpg|width=20px]]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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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height=40> '''학력''' ||청운국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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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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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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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울대학교로고.png|width=20px]] [[서울대학교]] ||
14
[[서울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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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height=40> '''가족''' ||아버지 : 김재훈[* 1936년~2020년 12월 1일 향년 84세/고인은 2019년 10월 교통사고를 당한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사망하기 전까지 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활동해왔다. 고인은 이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등에서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서울지부 공동의장, 공해추방운동연합 공동의장 등을 역임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분과위원장을 맡아 2014년 경기도 이천에 민주화운동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
1616
||어머니 : 김순정 ||
1717
||<-2><|1><height=40> '''직업''' ||학생운동가, 반미운동가, 반전운동가 ||
1818
[목차]
1919
== 개요 ==
20
김세진(金世鎭, 1965년 2월 20일 ~ 1986년 5월 3일)은 분신 자살한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반전평화운동가이며 서울대학교에서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전방입소 거부 투쟁의 선봉에 서서 활동하였으며, 86년 5월 군(軍) 전방입소 거부와 주한미군 철수, 미군 군사기지화에 반대하여 항의하다가 이재호와 함께 분신자살하였다.
20
김세진은 분신 자살한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반전평화운동가이며 서울대학교에서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전방입소 거부 투쟁의 선봉에 서서 활동하였으며, 86년 5월 군(軍) 전방입소 거부와 주한미군 철수, 미군 군사기지화에 반대하여 항의하다가 이재호와 함께 분신자살하였다.
2121
== 생애 ==
2222
=== 학생 운동과 반전 운동 ===
2323
김세진은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1983년에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미생물학과에 입학했다. 1986년에 자연대 학생회장이 되었으며, 그해 4월 28일에 동료 학생 운동가인 이재호와 신림동 네거리에서 “전방입소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핵기지화 결사 저지”를 외치며 분신했다. 그는 군대 전방입소 거부 운동과 반전 평화운동을 해 왔다.
......
2626
2727
총학생회장 김지용의 수배로 김세진이 맡아온 대외연락 총괄업무는 이정승에게 넘겨졌다. 얘기를 끝낸 이들은 흑석동 시장통의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이별’의 소주잔을 기울였다. 구속을 각오하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2828
29
1986년 4월28일 오전 9시께. 서울 신림사거리에서 보라매공원 쪽으로 100여m 떨어진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400여 명의 대학생들이 거리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팔짱을 낀 채 삽시간에 인도와 차도를 점거한 젊은이들은 “반전반핵 양키고홈”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반대”를 외쳤다. 시위대의 눈길은 길가 3층 건물 옥상에서 핸드 마이크를 들고 쩌렁쩌렁 구호를 선창하고 있는 두 젊은이에게 고정되었다.[2] 이때 김세진과 함께 연단에 선 이는 당시 서울대 ‘전방입소 훈련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 공동부위원장을 맡았던 이재호(23)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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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28일 오전 9시께. 서울 신림사거리에서 보라매공원 쪽으로 100여m 떨어진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400여 명의 대학생들이 거리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팔짱을 낀 채 삽시간에 인도와 차도를 점거한 젊은이들은 “반전반핵 양키고홈”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반대”를 외쳤다. 시위대의 눈길은 길가 3층 건물 옥상에서 핸드 마이크를 들고 쩌렁쩌렁 구호를 선창하고 있는 두 젊은이에게 고정되었다.[2] 이때 김세진과 함께 연단에 선 이는 당시 서울대 ‘전방입소 훈련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 공동부위원장을 맡았던 이재호(23)였다.
3030
3131
거리시위를 시작한 지 5분 후 달려온 전경과 백골단이 시위대를 에워싸고 끌어내기 시작했다. 일부 경찰병력은 시위를 주도하고 있던 두 학생을 붙잡기 위해 건물 옥상을 뛰어올랐다. 잠시 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학생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그중 한 학생이 비틀거리며 다시 나타나 팔뚝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불길에 휩싸인 그의 몸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3232
=== 사망 ===
3333
이미 그는 분신 이틀 전인 1986년 4월26일 부모님께 보낸 편지. 그는 전방입소 반대시위로 구속될 각오를 하고, 구치소로 이송되면 다시 편지하겠다고 썼다.
3434
35
심각한 화상을 입은 김세진은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5월 3일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22세였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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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화상을 입은 김세진은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5월 3일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22세였다. 1990년 8월 15일 [[북한]]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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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너를 사가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아, 저게 분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진이는 등 쪽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상황에서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쳤다. 이상하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3838
== 사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