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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분류:서울대학교]] | |
1 | [[분류:서울대학교]] [[분류:대한민국의 사건사고]] | |
2 | 2 | ||<-3><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gcolor=#ffffff,#191919><colbgcolor=#034f36><tablebordercolor=#034f36><colcolor=#f9d800> '''{{{+1 김세진(열사)}}}''' || |
3 | 3 | ||<-3><bgcolor=#034f36> {{{#!wiki style="margin: -6px -10px" |
4 | 4 | [[파일:김세진 사진.jpg|width=100%]]}}} || |
5 | 5 | ||<-2><width=24%> '''이름''' || '''{{{+1 김세진}}}[br]{{{-2 金世鎭 | Kim Sejin}}}''' || |
6 | 6 | ||<-2><|2><height=40> '''출생''' ||1965년 2월 20일 || |
7 | ||충청북도 충주시 || | |
7 | ||[[충청북도]] 충주시 || | |
8 | 8 | ||<-2><|1><height=40> '''사망''' ||1986년 5월 3일 || |
9 | ||<-2><|1><height=40> '''사인''' ||자살(화기에 의한 사망) || | |
9 | ||<-2><|1><height=40> '''사인''' ||[[자살]](화기에 의한 사망) || | |
10 | 10 | ||<-2><height=40> '''국적''' ||[[파일:태극기.jpg|width=20px]] [[대한민국]]|| |
11 | 11 | ||<-2><|1><height=40> '''학력''' ||청운국민학교 |
12 | 12 | 청운중학교 |
... | ... | |
17 | 17 | ||<-2><|1><height=40> '''직업''' ||학생운동가, 반미운동가, 반전운동가 || |
18 | 18 | [목차] |
19 | 19 | == 개요 == |
20 | 김세진 | |
20 | 김세진은 분신 자살한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반전평화운동가이며 서울대학교에서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였다. 전방입소 거부 투쟁의 선봉에 서서 활동하였으며, 86년 5월 군(軍) 전방입소 거부와 주한미군 철수, 미군 군사기지화에 반대하여 항의하다가 이재호와 함께 분신자살하였다. | |
21 | 21 | == 생애 == |
22 | 22 | === 학생 운동과 반전 운동 === |
23 | 23 | 김세진은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1983년에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미생물학과에 입학했다. 1986년에 자연대 학생회장이 되었으며, 그해 4월 28일에 동료 학생 운동가인 이재호와 신림동 네거리에서 “전방입소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핵기지화 결사 저지”를 외치며 분신했다. 그는 군대 전방입소 거부 운동과 반전 평화운동을 해 왔다. |
... | ... | |
26 | 26 | |
27 | 27 | 총학생회장 김지용의 수배로 김세진이 맡아온 대외연락 총괄업무는 이정승에게 넘겨졌다. 얘기를 끝낸 이들은 흑석동 시장통의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이별’의 소주잔을 기울였다. 구속을 각오하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
28 | 28 | |
29 | 1986년 4월28일 오전 9시께. 서울 신림사거리에서 보라매공원 쪽으로 100여m 떨어진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400여 명의 대학생들이 거리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팔짱을 낀 채 삽시간에 인도와 차도를 점거한 젊은이들은 “반전반핵 양키고홈”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반대”를 외쳤다. 시위대의 눈길은 길가 3층 건물 옥상에서 핸드 마이크를 들고 쩌렁쩌렁 구호를 선창하고 있는 두 젊은이에게 고정되었다.[2] 이때 김세진과 함께 연단에 선 이는 당시 서울대 ‘전방입소 훈련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 공동부위원장을 맡았던 이재호(23)였다. | |
29 | 1986년 4월28일 오전 9시께. 서울 신림사거리에서 보라매공원 쪽으로 100여m 떨어진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400여 명의 대학생들이 거리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팔짱을 낀 채 삽시간에 인도와 차도를 점거한 젊은이들은 “반전반핵 양키고홈”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반대”를 외쳤다. 시위대의 눈길은 길가 3층 건물 옥상에서 핸드 마이크를 들고 쩌렁쩌렁 구호를 선창하고 있는 두 젊은이에게 고정되었다.[2] 이때 김세진과 함께 연단에 선 이는 당시 서울대 ‘전방입소 훈련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 공동부위원장을 맡았던 이재호(23)였다. | |
30 | 30 | |
31 | 31 | 거리시위를 시작한 지 5분 후 달려온 전경과 백골단이 시위대를 에워싸고 끌어내기 시작했다. 일부 경찰병력은 시위를 주도하고 있던 두 학생을 붙잡기 위해 건물 옥상을 뛰어올랐다. 잠시 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학생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그중 한 학생이 비틀거리며 다시 나타나 팔뚝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불길에 휩싸인 그의 몸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
32 | 32 | === 사망 === |
33 | 33 | 이미 그는 분신 이틀 전인 1986년 4월26일 부모님께 보낸 편지. 그는 전방입소 반대시위로 구속될 각오를 하고, 구치소로 이송되면 다시 편지하겠다고 썼다. |
34 | 34 | |
35 | 심각한 화상을 입은 김세진은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5월 3일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22세였다. 1990년 8월 15일 | |
35 | 심각한 화상을 입은 김세진은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5월 3일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22세였다. 1990년 8월 15일 [[북한]]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 |
36 | 36 | |
37 | 37 | “시너를 사가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아, 저게 분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진이는 등 쪽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상황에서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쳤다. 이상하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
38 | 38 | == 사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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