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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가 만년에 병을 치료하려 오대산에 갔다 돌아올 때였다. 뱃길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도중 밤이 되어 양수리에서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이 때 옆에 있는 운길산에서 때 아닌 종소리가 들렸다. 신하를 보내 알아보게 하니 절터가 있고, 바위벽에 18나한상이 줄지어 앉아 있는데 그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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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접한 세조는 매우 감동했고, 마침내 발심하여 절터에 절을 복원케 하고 이름을 수종사라 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수종사는 1459년(세조 5) 왕명에 의해 중창되었다. 종각 밑에는 세조가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만큼이나 굵은 나이테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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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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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평가'''로는 글씨에 뛰어났다는 평이 있다. 왕권을 강화했고 국방을 튼튼히 했으며, 또 비록 그의 집권을 죽음으로써 막으려 했던 이른바 사육신 문제로 그들의 아지트였던 집현전은 폐지했으나, 법전이라든지 역사서 같은 공익적 편찬 사업을 주도하는 등, 학문을 발전시킨 공적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그밖에 호불의 군주였다는 평도 있다. 세조의 치세 동안 신권이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왕권은 조선 역사상 최고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인의예지신이 아닌 강압적인 철권 통치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새로운 인재들을 과감히 발탁하기 보다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측근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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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평가'''로는 계유정난을 명목으로 조카 단종을 축출하고 상왕이 된 자신의 조카의 작위를 노산군으로 격하시킨 뒤 다시 그를 죽여서 큰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에 의해 등용된 사림파에 의해 오랫동안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세조가 문종의 사망 이전부터 왕권을 탈취하려 했으며 그 결과 자신의 형인 문종을 독살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문종의 의관 전순의를 시켜 문종의 병을 고의로 악화시켜 빨리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왕이 사망할 경우 큰 벌을 받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의관 전순의는 작은 형벌에 그쳤다가 [[복권]]되었다. 수양이 왕이 된 후 일개 의관이 일등공신으로 책봉을 받은 점에서 매우 큰 의혹이 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정황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이 약하다보니 지나치게 공신에 의존하는 정치를 펼쳐 공신들의 무법천지가 이루어지게 된다. 남의 재산을 빼앗고 온갖 횡포를 일삼아도 처벌받는 공신은 없었고 세조가 죽을 때까지 공신 견제에 실패한다. 또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양정이나 남용신처럼 무조건 가차없이 죽여 버리기도 하였다. 홍윤성의 경우 자신의 숙부를 살해하였으므로 세조는 기회를 봐서 그를 처벌하려 하였으나, 공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홍윤성의 노비들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투옥시키는 것으로 무마시킨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한 공신들을 대부분 토사구팽하여 죽인 할아버지 조선 태종에 반해, 세조는 공신들을 내치지 않았으며 내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우대하여 결국 훈구파 세력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토지측량 기기 의상을 스스로 제작하기도 해 15세기 과학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도 있다. 국방과 관련해서 치적도 있지만 실책도 많다. 대표적으로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층을 사실상 없애버린 것, 지나치게 궁시 위주로 고과를 편성해서 백병전을 취약하게 만든 것,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이 3명으로 편성된 것을 보인 2명으로 줄어들게 해서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게 만들고 조호를 지급하는 기준을 호 기준에서 인정 기준으로 바꿔서 군인층 붕괴를 유발한 것, 총통위를 없애버린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세조의 실책은 조선군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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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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