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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사건 당시 경찰은 범행 발생 나흘 후인 1947년 7월 23일 평북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이필형)이 범인이라고 발표했고, 체포 후 한지근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애국투사'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배후는 밝히지 않았다. 1974년 2월 공소시효가 지나자 유순필, 김흥성, 김훈, 김영성이라는 사람들이 서울지검에 출두해 "자신들이 몽양 암살에 가담했다."고 자백한다. 이들은 "민족분열의 책임자는 여운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극우 테러단체인 혁신탐정사와 비밀결사 백의사로부터 입수한 권총 2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한지근은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와 친분이 있는 사이이고, 사건 발생후 권총과 실탄 10발을 한현우 집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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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 역시 배후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여운형의 암살 배경과 그 배후는 지금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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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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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부터 술과 담배를 배워서 주량이 근동에 소문이 날 정도였으나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면서 조선이 독립하기 전에는 술, 담배를 않겠다며 끊었다고 한다. 독립이후 친지들이 이젠 마시라며 권했지만 나라가 통일된 다음에 마시고 피우겠다며 사양하였다고 한다. 연설하면서 자신은 술, 담배는 냄새만 맡아도 골치아프다고 한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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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반찬을 가리지 않았으며 밥을 많이 먹었다. 며칠간 이만규의 집에서 묵은 일이 있었는데, 이만규 집에서는 그에게 '밥 많이 먹는 손님'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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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에 개방적이었고 청년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이러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체육활동이다. YMCA 야구단 활동에서부터 시작하여 복단대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취직하는 등 나이를 먹어서도 스포츠를 매우 좋아했고, 다방면의 운동경기에 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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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국에 압송되어 옥중생활을 하면서 소화불량과 치질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출옥 후에도 각종 체육 활동에 참여하여 건강을 유지했다. 이때 체육활동으로 다져진 체력과 민첩함으로 해방후 수차례 테러로 인한 위기에서 비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서상천을 비롯한 체육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고, 서상천과 이규현이 1934년에 출간한 현대철봉운동법이라는 책에서 상반신을 벗고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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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를 적극 장려하는 연설을 하였고 기고문을 내기도 했다. 각종 체육 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여 조선 체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덴마크식 체조를 국내에 처음으로 보급했고, 청년들과 투포환 던지는 경기를 했는데 1등을 했는가 하면, 수영을 잘해서 물놀이하다 물에 빠진 세 사람을 모두 구출한 적도 있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경기를 나갈까 망설인 손기정 선수의 출전을 적극 장려하였고, 각종 스포츠 경기의 심판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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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은 20대부터 수염을 길렀고, 금릉대학 재학 중에 카이젤 수염을 기른 것이 독특해보였는지 교수와 학생이 그를 머스타쉬라고 불렀다고 한다. 운동선수 활동으로 다른 대학에서 그에게 시합 관련해서 통지서를 보냈는데, 이름을 몰라 "미스터 머시타쉬"라고 학교로 편지가 오기도 했다고 한다. 옷을 잘 차려입는 멋쟁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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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은 강원룡에게 [[이승만]], [[김구]] 등 지도자들과 관련된 얘기를 해주었다. 해방 직후 조선체육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이승만이 귀국한 후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몽양은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이승만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수십년을 일하다 돌아왔으므로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를 가슴에 단 우리 청년들이 대회장에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할까 하는 생각에서 이승만을 개회식에 초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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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에 의하면 이승만은 윤치영과 함께 와서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식이 시작되어도 각도 청년들이 줄을 지어 씩씩하게 입장하자 몽양은 이박사가 얼마나 흐뭇해할까 하고 감격을 나누기 위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청년들을 보지도 않고 수행한 윤치영과 귓속말로 정치 이야기만 하더니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다"며 곧 퇴장해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 정치적 노선은 다르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를 초청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여운형은 인간적으로 섭섭했다면서 자기가 이박사에게 가장 실망을 느낀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했다. 윤치영은 해방 이전까지는 사적인 일로 여운형과 자주 만나는 사이였으나 해방 이후에 그는 여운형을 적대적으로 대하였다. 이 밖에도 송진우, 장덕수, 김성수 등과도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해방직후 건준 참여를 거절하고 한민당에 가담하면서 그와 적대적 관계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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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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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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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m.wikipedia.org/wiki/%EC%97%AC%EC%9A%B4%ED%98%95|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