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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선시대]]에 왕세자의 자리는 대개 왕비가 낳은 적장자가 잇는 것이 원칙이였다. 왕세자는 차기 왕으로서 상당한 수준의 예우를 받았으며 제왕학 등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 조선의 경우 동궁 등에 별칭이 있었고, 대리청정을 제외하고는 정치와 인사에 간여할 수 없었다. 유럽의 경우에는 왕위에 대한 법정추정상속인의 의미를 가지는 귀족작위가 수여되는 전통이 있으며, 해당 영지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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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자격 조건을 국왕의 적장자로 한 원칙은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를 통해 규범화된 전례가 있으며 주자가례를 따른 것이기도 하다. 또한 유럽 다수의 국가에서 여성상속을 금한것은 프랑크 족의 살리카 법의 선례를 따라 성립된 원칙이며, 장자상속은 프랑크 왕국의 분할상속제가 권력투쟁을 심화시키자 이를 개선하고자 10세기 경부터 채택되기 시작했다. 왕세자 책봉은 권력공백 최소화, 권력투쟁 예방, 후계자 조기양성이라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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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왕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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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에 대한 경칭으로 저하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다른 말로는 동궁, 춘궁, 저군,정윤, 이극, 국본 등이 있다. [[중국]]에서 유래된 태자라는 호칭은 세자보다 높은 의미를 갖기 때문에 왕국이라도 왕세자 대신 왕태자를 사용해서 권위를 높이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위만조선시기부터 [[고려]] 초기까지 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고려 시대 원나라 간섭기 때부터 태자 대신 왕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1894년(고종 31년)부터 다시 왕태자라는 칭호를 복권시켰다. 처음에는 대조선국 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였다가, 후에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로 바뀐다. 후궁이 낳은 왕자는 군(君)이라 하고 왕비의 아들은 대군이라 구별하여 불렀다. 호칭 구별에만 그치지 않고 누리는 혜택도 큰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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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위계승 원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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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계승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왕비의 장남이 왕이 되는 적장자 왕위계승과 덕이 있는 사람이 왕이 된다는 원칙이다. 적장자 왕위계승은 왕자간의 권력투쟁을 예방하고, 권력공백을 줄이며 후계자를 미리 교육시켜 장래를 준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적장자보다 다른 왕자가 유능한 경우에는 쿠데타의 가능성 때문에 정국이 불안했다. 또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후궁들만 여러 아들이 있는 경우 이들 사이의 치열한 암투로 정치 불안이 가중되었다. 적장자 계승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27명의 왕 중 7명만이 적장자 출신이었다. 적장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즉위하지 못한 경우도 7명이나 된다. 반면 적장자가 아니면서 왕이 된 경우는 20명이나 된다. 후궁의 아들로 왕위에 오를 경우 대부분 격렬한 궁중 암투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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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세자의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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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가 낳은 적장자를 원자라 칭하는데, 원자의 세자책봉은 후계구도를 확정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백관들을 모아놓고 세자책봉례를 거행한 후 바로 종묘에 이 사실을 고하고 팔도에 알리며 사후에 형식적이었지만 중국의 허락을 받았다. 세자로 책봉되면 부모(왕과 왕비) 곁을 떠나 동쪽에 있는 동궁에서 기거하기 시작하며 나머지 왕자(대군)들은 궐밖으로 나가 사가에서 지냈다. 세자에게는 독립된 기관, 인원, 예산이 배정되어 왕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세자의 호위는 세자익위사가 맡았고 세자의 교육은 세자시강원에서 담당했다. 혼례는 대체로 10세 전후시기에 치렀다. 세자는 세자빈 이외에 공식적으로 소실을 둘 수 있었다. 세자는 정치와 인사에 간여할 수 없었으나 필요에 따라 대리청정하는 경우는 있었다. 세자가 불초 하거나 덕이 없는 처신을 할 경우에 폐위되기도 한다. 또한 즉위하기 전에 죽으면 그의 아들인 왕세손이 왕위계승권을 이어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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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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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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