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유관순(비교)

r1 vs r4
1
[[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
[[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분류:대한민국의 인물]]
22
||<-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47a0><tablewidth=500><tablebgcolor=#fff,#1f2023><colbgcolor=#0047a0><colcolor=#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33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1 유관순}}}[br]柳寬順|Ryu Gwan-sun'''}}} ||
44
||<-2><nopad> [[파일:유관순 사진.jpg|width=100%]] ||
......
1010
|| '''본관''' ||고흥 류씨 ||
1111
|| '''학력''' ||이화학당 고등부 {{{-2 (1학년 재학중 순국)}}}[br]이화여자고등학교 {{{-2 (명예졸업)}}} ||
1212
|| '''가족''' ||아버지 : 유중권[br]어머니 : 이소제[br]오빠 : 유우석[br]동생 : 유관석 ||
13
|| '''경력''' ||3.1 운동 ||
13
|| '''경력''' ||[[3.1 운동]] ||
1414
|| '''직업''' ||독립운동가 ||
1515
|| '''종교''' ||개신교 ||
1616
[목차]
......
1818
== 개요 ==
1919
유관순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2020
== 상세 ==
21
본관은 고흥이며 일제강점기에 3.1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운동을 하다 일본 형사들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이뤄진 모진 고문으로 인해 순국했다.
21
본관은 고흥이며 [[일제강점기]]에 [[3.1 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운동을 하다 일본 형사들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이뤄진 모진 고문으로 인해 순국했다.
2222
2323
1916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감리교회 선교사인 사애리시 부인(사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장학생으로 편입하고, 1919년에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했다.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사형이 확정되었다. 일제의 교도소에서 1920년 9월 28일에 순국했다.
2424
......
4545
유관순은 천안경찰서 일본헌병대에 투옥되었다가 곧 공주경찰서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공주지방법원에서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1심재판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유관순은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후 상고를 포기하였다. 유관순은 경성복심법원 재판 당시 일제의 한국점령을 규탄·항의하면서, 조선총독부 법률은 부당한 법이며 그에 따라 일본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4646
=== 징역형 선고와 옥사 ===
4747
유관순의 1심 선고형에 대해서는 해방 직후 감리교 목사, 소설가로 활동한 전영택 목사 등이 징역 7년설을 거론했으나, 2000년대 중반에 '병천·동면 지역 형사사건부'가 발견되어 공주지방 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음이 확인되었다. 1920년 4월 28일에 영친왕이 일본 왕족 이방자와 결혼하면서, 특사로 형이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에도 옥안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고문을 당했으며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출소를 1일 남기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방광이 파열하여 옥사하였다.
48
===유관순 부모의 사인 ===
48
=== 유관순 부모의 사인 ===
4949
이 자료에는 아우내 만세 운동 당일의 시위자도 기재되어 있는데, 유관순 열사의 부친인 유중권 열사의 기록이 가장 먼저 나온다. 일시는 기미년(己未年·1919년) 3월 1일, 장소는 천안군 병천면 병천리이다. 이는 1987년에 작성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한다.
5050
5151
또, 이 자료에는 유중권의 바로 옆에 성명이 "李氏"라고 표기된 여성이 등장한다. 류중권 열사와 같다는 기호(〃)로 표기돼 있어 유관순의 어머니인 이소제씨로 추정되고 있는데, 유중권과 이씨를 포함해 20명이 같은 장소·날짜·상황에서 순국했다는 자료의 내용은 1987년에 작성된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 등 열 아홉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는 기록과 같다.
......
6363
* 유관순의 유해가 망실된 관계로 1989년 10월 12일에 그녀의 고향인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탑원리 매봉산 중턱에 가묘인 초혼묘를 세웠다.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에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열사기념관을 개관하여 유관순 열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2003년에 문을 열었다.
6464
6565
* 2019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66
67
* 충청남도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그 얼을 오늘에 되살려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사고로 국가와 지역사회발전에 이바지한 여성(여학생) 또는 단체를 전국에서 선발한다. 유관순 횃불상은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에게 수상한다.
68
== 논란 ==
69
=== 형량에 대한 중언부언 ===
70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은 유관순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 절차는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심 제도로 운영되었으며, 유관순의 판결문은 징역 3년을 선고한 경성복심법원의 판결문만 남아 있어 1심 형량은 설왕설래했었다. 유관순과 1년 가까이 함께 복역한 어윤희는 '유관순이 6년형을 받았다'고 말한 반면, 조병옥의 동생 조병호는 '부친(조인원)이 유관순과 함께 7년형을 받았다'고 회고(실제로는 그의 숙부 유중무와 같은 5년형)하는 등 관련자들의 증언도 일치하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에 병천·동면계 형사사건부가 발견되어 그 내용이 공개됨으로써 유관순의 1심 선고형은 '징역 5년'임이 확인되었다.
71
=== 정치적, 종교적 목적의 악용 논란 ===
72
유관순 사후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 또는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덮기 위한 일부 기독교인들에 의해 과도하게 띄워졌다는 견해도 있다. 반기독교운동가이자 종교권력감시시민연대 대표인 김상구는 유관순이 사후 박인덕, 전영택, 일부 기독교인들의 선전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의 유관순 기록과 당시 언론 보도 등을 근거로 유관순 열사는 박인덕 등 친일 경력자들이 해방 후 자신의 전력을 덮고 개신교 선교 전략에 이용하는 도구로 만들어낸 영웅이라고 주장하면서, 2011년에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해피스토리, 2011)라는 책을 통해 유관순을 악용한 일부 개신교 세력에 대해 폭로하고 유관순은 개신교계의 친일 전력을 덮어주는 동시에 선교 전략에 활용되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이용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73
=== 이화학당 출신 인사의 은폐 의혹 ===
74
광복 직후인 1940년대 후반에 열사의 시신이 토막 참살되었다는 소문이 퍼뜨려졌으나, 2011년에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의 운동가들'에 따르면 열사의 시신을 인수해 직접 장례를 치른 당시 이화학당 학당장 서리 월터는 "나는 그녀의 온전한 몸에다 수의를 입혔다"고 밝혔다. 열사의 사인은 구타 등 고문 후유증이었다.
75
=== 유관순 우상화 배경 관련 의혹 ===
76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에 열을 올렸다. 박인덕과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은 유관순을 백년 전쟁 때 잉글랜드에 몰려 수세에 처해 있던 프랑스를 구한 신화적인 여성영웅인 잔 다르크에 비유하였다. 유관순을 잔 다르크에 비유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 존재로 각인시켰다. 3·1운동으로 사망한 사람은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대략 7천500명이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유독 유관순만 특별하게 기억할 이유는 없었다는 비판도 있다.
6677
== 본 문서 정보 ==
6778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68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