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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비교)

r1 vs 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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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민국의 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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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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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tablealign=right><tablewidth=420><tablebordercolor=#191970><tablebgcolor=#fff,#1c1d1f><colbgcolor=#191970><colcolor=#fff> '''{{{+1 을지문덕}}}[br]乙支文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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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gcolor=#fff,#1c1d1f><nopad> [[파일:을지문덕 사진.gif|width=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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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gcolor=#fff,#1c1d1f><nopad> [[파일:을지문덕 사진.jpg|width=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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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th=25%><|2> '''출생''' ||미상 ||
55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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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망''' ||미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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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술은 을지문덕도 놓쳤고 군량도 다 떨어졌으므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우중문이 지금 돌아가면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볼 수 있겠냐고 성을 내며 계속 나아갈 것을 고집했다. 우문술도 언성을 높였으나, 이전에 양제가 우중문이 계획성이 있으니 그의 의견을 경청하라고 하였기에 부득이 따랐다. 압록수를 건너 몰려오는 수나라군을 을지문덕이 막으려 했으나 하루에 7번 겨뤄 모두 지는 등 후퇴를 거듭하였다. 승리에 도취한 수나라군은 계속 진격하여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와서 진을 쳤다.
3333
== 사망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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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은 수나라에 비해 작았던 고구려가 양제의 엄청난 수의 군대를 거의 섬멸한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으며, 그가 있었기에 고구려도 존재했다고 극찬하였다. 국난의 영웅으로 인식되던 을지문덕은 병자호란 이후 자존심 회복과 사회의 응집 차원에서 더욱 주목받았다. 1645년 평양에, 1670년 평안도 안주에 사우가 건립되고 조선 숙종 때 각각 충무사(忠武祠), 청천사(淸川祠)로 사액했다. 다만 그 이전에도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는 ‘동서고금 허다한 싸움이 있지만, 적은 군사로 강대국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쳐서 그림자도 못 돌아가게 하고, 백만 병 적진에 출입하기를 을지문덕같이 한 자가 있는가? 어린 아이도 그 위엄을 듣고 울음을 그치며 초목도 그 이름을 알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 털 끝 하나, 침 하나만 본받아도 독립을 보전하고 역사에 빛날지니, 을지문덕은 우리 4,000년 동안에 제일의 위인이요 온 세계에서도 그 짝이 드물다.’고 열강에게 침탈받던 20세기 초의 상황과 결부하여 칭송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문인들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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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공에 대한 오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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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 대첩 하면 흔히 귀주 대첩과 함께 수공을 떠올린다. 그러나 삼국사기, 수서, 자치통감, 동사강목, 해동역사 등 한국과 중국의 사서에는 상류의 둑을 무너뜨려 수공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오직 근대 기록에만 등장하는데 이는 민간의 전설이었던 칠불전설이 변형되어 수록된 것이다. 실제 수공을 활용한 전투는 흥화진 전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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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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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의 위대함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을지문덕의 이름을 기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을지"란 이름이 붙은 것들은 전부 을지문덕에게서 유래했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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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로 : 서울 중구에 있는 도로이자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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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무공훈장 : 무공훈장 2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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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 프리덤 가디언 : 행정기관 등 범정부 상황대비 연습 및 한미 합동 지휘소 연습(시뮬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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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DH-972 을지문덕 :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제2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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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부대 : 대한민국 [[제12보병사단]]의 별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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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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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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