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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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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iki style="word-break: keep-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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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wiki style="margin: 0px -10px; word-break: keep-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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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fffff '''사망일'''}}}'''}}} ||1987년 11월 19일(향년 77세){{{-2 ([dday(1987-11-19)]일, [age(1987-11-19)]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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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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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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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지''' ||[[에버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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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본관''' ||경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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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학력''' ||지수공립보통학교 졸업[br]중동중학교 졸업[br]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 중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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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경력''' ||前 [[삼성]] 제1대 총수[br]前 삼성물산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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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경력''' ||前 [[삼성]] 제1대 총수[br]前 [[삼성물산]]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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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가족''' ||아버지 : 이찬우[br]어머니 : 권재림[br]배우자 : 박두을[br]장녀 : 이인희[br]차녀 : 이숙희[br]3녀 : 이순희[br]4녀 : 이덕희[br]5녀 : 이명희[br]6녀 : 이혜자[br]장남 : 이맹희[br]차남 : 이창희[br]3남 : [[이건희]][br]4남 : 이태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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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종교|{{{#ffffff '''종교'''}}}]]'''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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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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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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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은 [[삼성|삼성그룹]]과 CJ그룹, 한솔그룹, 중앙일보를 창업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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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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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에 삼성상회를 세웠으며 이후 무역업에도 종사하였다. 1951년에는 삼성물산을, 1953년에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했고, 수출을 통해 제조업을 확장하여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 등 삼성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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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에 삼성상회를 세웠으며 이후 무역업에도 종사하였다. 1951년에는 삼성물산을, 1953년에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했고, 수출을 통해 제조업을 확장하여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 등 삼성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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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5월에 TBC를, 다음해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방송과 언론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 일가에게 넘겼다. 그 뒤 기업 활동에 전념하여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전자제품의 수출에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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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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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2월 12일에 경상남도 의령에서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로 16대조 계번(桂蕃)이 입향조로써 경남 의령에 정착하여 거주지로 삼으면서 의령, 진주에 거주한 사족(士族)이다.이병철은 경주이씨 종친회 총재를 오랜 기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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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2월 12일에 경상남도 의령에서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로 16대조 계번이 입향조로써 경남 의령에 정착하여 거주지로 삼으면서 의령, 진주에 거주한 사족이다.이병철은 경주이씨 종친회 총재를 오랜 기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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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할아버지 이홍석 훈장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文山亭)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論語) 등을 배웠다고 주장한다. 이병철의 할아버지 이홍석(호는 문산, 1838~1897)은 성호학파로 성리학과 실사구시 학풍을 추구한 사대부였으며 서예와 시문에 능했다. 아버지 이찬우(1874~1957)는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에 관여한 인물로 이승만과 인연을 얻기도 했다. 이병철은 형과 함께 이곳 문산당에 가서 가문의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재능은 생각보다 없었던 모양으로 호암자전에 의하면 진도는 늦었지만 꾸준하고 성실히 공부했다고 한다. 의외로 스스로 가장 많은 감동을 받고 필요로 한 책은 논어라 주장하였다. 1919년 3월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에 있는 지수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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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할아버지 이홍석 훈장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 등을 배웠다고 주장한다. 이병철의 할아버지 이홍석(호는 문산, 1838~1897)은 성호학파로 성리학과 실사구시 학풍을 추구한 사대부였으며 서예와 시문에 능했다. 아버지 이찬우(1874~1957)는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에 관여한 인물로 이승만과 인연을 얻기도 했다. 이병철은 형과 함께 이곳 문산당에 가서 가문의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재능은 생각보다 없었던 모양으로 호암자전에 의하면 진도는 늦었지만 꾸준하고 성실히 공부했다고 한다. 의외로 스스로 가장 많은 감동을 받고 필요로 한 책은 논어라 주장하였다. 1919년 3월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에 있는 지수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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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1살에 지수공립보통학교 4학년 당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의 수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경성 지역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곧 학교 생활에 적응, 중동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습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이후 1926년에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하였다.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는 1929년에 결혼하였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1926년에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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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1살에 지수공립보통학교 4학년 당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의 수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경성 지역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곧 학교 생활에 적응, 중동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습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이후 1926년에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하였다.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는 1929년에 결혼하였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1926년에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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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을 마치고 상경하여 다시 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열중하다 4학년 1학기 무렵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병철은 부모한테서 자신의 일본 유학에 대해 반대받았으나 옆 동네에 살던 효성그룹의 창업주인 조홍제를 찾아가 사정했다. 일본 유학 경비 500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면서 조홍제가 흔쾌히 수락, 조홍제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일본에 유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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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회고에 의하면 그는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회한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웠으며,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그는 며칠 후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별말 없이 아들에게 선선히 사업자금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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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938년 3월 29세에 30,000원(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한달월급 약15원꼴(166년 일해야되는 돈)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과 수출 등도 하면서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여 함께 운영하던 중 광복 후 1947년 경성으로 상경하여 다음 해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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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938년 3월 29세에 30,000원(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한달월급 약15원꼴(166년 일해야되는 돈)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과 수출 등도 하면서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여 함께 운영하던 중 광복 후 1947년 경성으로 상경하여 다음 해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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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초 일본공업시찰단원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어 출국, 일본 내 제조업, 수공업 등 일본의 공업계와 전후 공업시설 복구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귀국했으나 그해 6월 25일 서울에서 한국 전쟁을 맞았다. 전쟁 직후 피난을 떠났다가 1951년 무렵 부산에서 다시 삼성물산을 세워 다시 무역업에 본격 뛰어들면서 1953년에는 제조업에도 투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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