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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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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는 에도 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이자 [[일본]]의 정치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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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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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명은 리스케로, 후에는 슌스케로 불렸다. ‘슌보’나 ‘소로카쿠슈진’이라고 불렸으므로, ‘슌보 공’이라고 쓴 것도 많다. [[조선]]에서 외국인으로 받은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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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 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제5대·제7대·제10대 일본 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또한 초대·제3대·제8대·제10대 추밀원 의장,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귀족원 의장, 관선 효고현 지사 등을 지냈다. 입헌정우회를 결성해 원로로 활동했다. 대훈위 종1위를 받고, 작위는 백작으로 시작하여 후작, 공작으로 승작 되었다.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으로 유학하였다. 전공은 화학으로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수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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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왕양이 운동을 전개하다가 개화파로 전향하였고, 개국론·부국강병론을 전개했다. 1887년부터 1889년 2월까지 약 3년간에 걸쳐 제국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1886년부터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일본 내에서 각 학교에서 여학생을 받아들이고, 여자 대학을 창설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제국 헌법 제정 과정에 참여하여 개혁 정책을 전개했다. 일본 제국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역임했으며, 1909년에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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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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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10월 16일 조슈번 스오국 구마게군(지금의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야마구치의 스오구니촌에서 농민 출신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토의 아버지의 이름은 하야시 주조였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때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였다. 아버지가 조슈번의 주겐계급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로 바꾸었고, 그 역시 양조부의 성을 따서 이토로 성을 바꾸었다. 후에 이토 다케베가 최하급 무사 신분인 아시가루가 되면서 이토도 무사 신분을 얻게 되었다. 무사인 이토 다케베의 양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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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세 때 동네 서당에서 글을 익혔고, 14세에 번의 무사들이 하는 일 중 잡역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문자와 한학, 독서하는 것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이가 나타난다. 15세 되던 해에 임무를 띠고 파견된 번사들의 조수로 잔심부름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가 모시던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 히로부미의 재능을 알아보고 요시다 쇼인을 찾아가 볼 것을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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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구루하라 료조는 요시다 쇼인에게 이토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어서 보냈다. 1857년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받고, 요시다가 운영하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되었다. 이후 10대 후반까지 번의 하급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요시다 쇼인의 학당에서 수학하였고, 한편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교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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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이 미미하였던 탓에 쇼카손주쿠 생활 초기에 문벌가문 자제들로부터 무시와 박대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승 요시다는 신분에 구애됨 없이 그의 재능을 높이 샀고, 그는 요시다의 사상에 감복하여 더욱 학업에 정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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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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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한국을 강제 합병할 방침을 정하고 이토와 상의했는데, 강제 합병 계획이 없다고 1907년 밝힌 이후 평소 강제 합병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토는 이 자리에서 강제 합병에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 강제 합병 방침이 결정된 이후 이토는 1909년 6월 14일에 통감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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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오전, 러시아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 복무하고 있던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 향년 69세. 장례는 1909년 11월 4일에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근왕지사로서는 그는 동료들 보다 오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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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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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는 바로 하얼빈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10월 26일 오전 11시 경 사망했다. 죽음이 확인된 뒤, 그의 시신은 열차편으로 오전 11시 40분 하얼빈역을 출발하여 오후 6시 장춘 역에서 쉬다가 다시 장춘을 떠나 1909년 10월 27일 밤 다롄에 도착, 만철 병원으로 옮겨졌다. 만철병원의 영안실에서는 방부제인 포르말린 액이 투입되고, 총탄에 뚫린 세 군데에는 반창고를 붙였다. 이어 시신은 일본 제국 천황이 보낸 회나무관에 들어갔다. 일본 제국 군함 아키쓰시마로 운구되었다. 시신은 동해를 출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와 모지 사이의 관문해협으로 들어섰다. 이어 11월 1일 오전 11시 도쿄 근처 항구 요코스카 부두에 입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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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이 도착하기 전, 요코스카 항에는 인파가 몰려 운구가 지체됐다. 11월 1일 오후 1시경 시신은 인파를 비집고 6량으로 편성된 포차에 실려, 2일 오후 1시경 신바시 역에 닿았다. 신바시 역 광장은 약 2천명의 출영자로 붐볐다. 시신은 2일 오후 2시 40분경 아카사카 구 영남판 추밀원 의장 관저에 도착했다. 이 관저는 이토의 국장 기간 중 국장 사무소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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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국방력과 국력의 향상에 기여했으며, 일본 근대 헌법의 제정과 일본 양원제의 확립에 기여했다. 1963년 11월 1일에 발행된 세 번째 1000엔 지폐의 도안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1984년 11월 1일에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로 바뀔 때까지 유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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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8일 대한제국 순종은 그에게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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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장 거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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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밀원 회의와 내각 회의는 이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했다. 시신이 도쿄로 운구되는 동안 장례식 준비는 완료됐고, 호송 의장병 책임자로는 일본 제국 육군 대장이, 국장의 건축 설계자로는 일본 근대건축의 원로인 내장두 가타야마가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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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권 강화와 일본 내부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일본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권 안정화를 위하여 일본 국민들을 그의 장례식으로 단결시키기위하여 국장을 강제로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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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일인 1909년 11월 4일, 관은 오전 9시에 관저를 출발했고 노제는 히비야 공원에서 치렀다. 오전 10시 반 히비야 공원에서 유럽식으로 열린 이 국장의 참배객들은 대부분 서양복을 입었으며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인 외교관들과 내외빈의 조사가 낭독됐다. 50년 친구라는 후작 이노우에 가오루는 '낙담이 아주 격했다'는 내용의 조사를 낭독했다. 메이지 천황은 '왕정 복고, 유신 공헌, 헌법 초창, 조선 지도 등 공헌'의 결과로 이토를 충정군으로 추봉하고,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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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이 끝나자 이토의 시신은 마차에 옮겨졌다. 영구는 장지인 도쿄도 임원군 대정정자 곡수분영 곡수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역은 묘역 1천5백 평을 도쿄시 예산으로 사들였다. 장남인 농상무 서기관 이토 분키치가 앞장섰고, 시신은 오후 2시 30분 묘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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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이 끝나고 유족과 일부 대관들은, 묘역에서 가까우며 천황이 1906년 이토에게 준 저택인 오모리의 은사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현재 시나가와 구에 속하고 광우구락부가 되어 있다(일본광학공업의 소유). 그 집 앞길은 ‘이토 도로'라고 불린다. <태양> 임시증간호 <이등박문공(伊藤博文公)>은 장례 후 6일뒤인 1909년 11월 10일에 발행됐는데 이 책에 이토의 무덤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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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반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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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순종은 11월 4일, 궁내부대신 민병석과 조선민족 대표 조중응을 이 국장에 보내고,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해서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으로 10만원을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황실의 이와 같은 반응은 이미 국권이 대부분 넘어간 상황인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일제의 계산된 공작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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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경성부 종로에 이토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남산 근처에는 대형 신사인 박문사가 건립하며 조선 각지에 이토의 동상을 세웠으나, 이 동상들은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한 후에는 모두 파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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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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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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