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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만저우 지방 지린성 하얼빈 역[br](現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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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적''' ||<bgcolor=#f5f5f5,#2d2f34>[[파일:일본 국기.jpg|width=20px]]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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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력''' ||<bgcolor=#f5f5f5,#2d2f34>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2 (졸업)}}}[br]예일 대학교 {{{-2 (명예 법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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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족''' ||<bgcolor=#f5f5f5,#2d2f34>아버지 : 이토 주조[br]어머니 : 이토 고토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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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당''' ||<bgcolor=#f5f5f5,#2d2f34>입헌정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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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gcolor=#0230ae> {{{#c3c965 '''일본 제국의 제1대 내각총리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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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기''' ||<bgcolor=#f5f5f5,#2d2f34>1885년 12월 22일~1888년 4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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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구루하라 료조는 요시다 쇼인에게 이토를 소개하는 소개장을 써주어서 보냈다. 1857년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받고, 요시다가 운영하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되었다. 이후 10대 후반까지 번의 하급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요시다 쇼인의 학당에서 수학하였고, 한편으로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교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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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이 미미하였던 탓에 쇼카손주쿠 생활 초기에 문벌가문 자제들로부터 무시와 박대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승 요시다는 신분에 구애됨 없이 그의 재능을 높이 샀고, 그는 요시다의 사상에 감복하여 더욱 학업에 정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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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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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로 개명하고, 조슈 번의 유력자로 영어 등에 통달한 것을 인정받아 정계 입문, 외국 사무국 판사, 관선 효고현 지사, 초대 공부성 장관 등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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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부터 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양 각국을 시찰했다. 귀국 후 정한론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함께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논쟁에서 오쿠보와 기도, 이와쿠라 등의 사이를 오가며 만남을 주선하고 계책을 제시해 내치파의 승리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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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이 내치파의 승리로 끝난 직후, 이토는 내각 참의 겸 공부성경이 되었다. 정한 논쟁 이후에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1874년에 오키나와 원주민 피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대만 침략을 결정했는데 청국과의 전쟁을 우려하며 반대했던 기도는 이에 반발해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오쿠보로서도 조슈파의 리더인 기도의 협조를 원했기 때문에 이토는 1875년 1월 오사카에서 오쿠보와 기도의 만남을 주선했다(오사카 회의). 이러한 정치적 활동들을 통해 이토는 오쿠보를 비롯한 여러 선배 정치가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면서 정치적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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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 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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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당시 정부 내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권력에 공백이 나타난다. 이토는 오쿠보의 뒤를 이어 내무상으로 승진했으며 곧 권력 장악을 꿈꾸게 된다. 이때 역시 야심있고 재능있는 정치가인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달변가이기도 했던 이토는 잇따른 정치적 수완과 달변을 발휘하여 1881년까지 오쿠마와 그의 지지자들을 정부에서 축출했으며, 천황과 정부 고관들을 설득하여 헌법을 제정할 것을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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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쿠마의 딸과 부정한 행위가 발각되어 그의 권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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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제국 총리 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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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른바 유신삼걸로 불리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모두 사망하면서 이토는 정권의 중심이 되었다. 1878년 5월에는 오쿠보의 후임으로 참의 겸 내무경이 되었다. 한편 1879년 말 정부에서 입헌제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참의 전원이 그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했는데 1881년 참의 겸 대장경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영국식 내각책임제에 가까운 급진적인 안을 제출했고 이로 인해 같은 해 10월 그 자신과 관련 관료들이 물러나게 되었다. 이를 이른바 메이지 14년 정변이라고 하는데 이토는 이후 헌법 제정을 위해 이듬 해인 1882년 유럽에 건너가서 1883년 8월 귀국할 때까지 독일 제국을 모델로 헌법을 연구했다. 귀국 후에는 참의 겸 궁내경 겸 궁내성 제도취조국 장관으로서 헌법 초안을 기초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되어 1885년에 톈진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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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에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 제도가 창설되면서,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헌법 및 황실전범의 초안을 완성했으며, 1888년 5월 8일에는 헌법 초안을 심의할 추밀원이 신설되자 스스로 총리를 사임하고 초대 의장이 되었다. 1889년 2월에 헌법이 발포 되자 헌법 제정 공로로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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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부터 3년간 그는 일본 제국 헌법 제정에 참여한다. 1887년 나쓰시마에서 이토는 이노우에 고와시, 가네코 겐타 등과 함께 헌법 초안의 검토를 시작한다. 이때 이토는 자신이 법령에 부족할 수 있다고 판단, 국내와 외국인 법학자들을 불러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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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의 논의 끝에 1889년 2월 11일 구로다 내각 하에서 일본 제국 헌법이 발포된다. 헌법이 공포되자 이토는 가족 모임과 여러 공, 사적 모임을 소집하여 헌법에 대해 언급하고 입헌 정치의 중요성, 특히 일반 국민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해 6월 "헌법 정의 해제"를 간행한다. 그 뒤 1892년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법치주의적, 국수주의적 정당 결성을 주장하지만, 천황의 반대에 의해 좌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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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헌법 제정 이후 실시된 의회제에서는 1890년 귀족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의회제 시행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는 야당의 예산삭감 투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에 굴복해 마쓰카타 내각이 1892년 중의원을 해산하자 이토가 다시 총리로 선출되어 제 2차 이토 내각을 조직했다. 이후 총리로서 청일 전쟁을 지휘하고 1895년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그가 총리로 있는 동안 임명한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 공사에 의해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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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8월 28일에 총리를 사임하고 이듬 해 5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 사절로 영국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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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후 12월 야당의 공세에 중의원이 해산되자 1898년 1월 12일에 총리로 임명되면서 제 3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그러나 총선 후 제 1당이 된 자유당과 제 2당인 진보당이 손잡고 정부의 증세안을 부결시키자 6월 10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느낀 이토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직면하자 6월에 총리를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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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9월 15일에 입헌정우회를 창당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야마가타가 총리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해 10월 19일에 다시 이토가 총리가 되어 제 4차 이토 내각이 발족하게 되었으나 총리가 된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휴양을 하게 되고, 또한 이토의 대러시아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이토 내각을 흔들었기 때문에 1901년 5월 2일 내각의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자진 사퇴하면서 다시 단명 내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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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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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9월부터 구미 순방에 나섰다. 순방 중 10월에 예일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고 11월에는 프랑스를 방문했다. 미국의 예일대는 1901년 10월 23일 창립 2백주년을 맞았는데, 이 행사를 기념해 정우회 총재였던 이토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주었다. 학위 수여에는 예일대학 철학과 교수인 조지 트럼벌 래드 박사의 추천이 작용했는데, 그는 '이토 히로부미 후작과 함께 한국에서(In Korea With Marquis Ito)'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래드는 1906년 일본에 놀러오며 이토의 종용으로 한국을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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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은 비밀리에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이토는 개인적으로 러시아와의 만한교환 협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28일 러시아에서의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고 반면 다음 달 영국 방문에서는 환대 속에 영국 외상과 영일동맹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이토가 1902년 1월 23일 유럽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30일 영일 동맹이 성립되었다. 1903년 7월에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2월 4일에는 원로로서 어전회의에서 러일 전쟁 개시를 결정했다. 전쟁 개시 이후인 3월에는 서울을 방문해서 고종을 알현하고 일본에 대한 협조를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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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늑약 체결과 조선통감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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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강화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10월 27일 한국과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손에 넣는다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의 구상이 내각 회의에서 통과된 이후 이토는 한국 정부에 조약을 강요하는 일을 맡았다. 그 해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1905년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관광을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을사늑약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청년 원태우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원태우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통감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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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06년 3월 이토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1907년 5월 22일 을사늑약에 공을 세운 이른바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여 궁내대신으로 삼은 이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무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학부대신 이재곤 등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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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 이토는 한국의 시정 개선을 위해서 도로 개설을 역설하고 도로 건설에 착수한다. 1895년 5월에 제정된 여학교관제가 공포되지 못하여 관립여학교의 설립이 지연되고 있었는데, 1908년 고등여학교령을 공포하여 고등여학교의 설립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최초의 여학교 설립은 아니었으나 같은해 4월에 공립 한성고등여학교를 설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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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체결 이후, 그는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의 스승을 자처한다. 유교적 학식이 있었던 그는 이은의 보호자이자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그를 데리고 도일한다. 이토는 일본어와 군사 지식을 직접 가르쳤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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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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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1909년 봄,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한국을 강제 합병할 방침을 정하고 이토와 상의했는데, 강제 합병 계획이 없다고 1907년 밝힌 이후 평소 강제 합병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토는 이 자리에서 강제 합병에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 강제 합병 방침이 결정된 이후 이토는 1909년 6월 14일에 통감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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