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논란 및 사건 사고(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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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15 | 한미 양국의 조사가 마무리된 뒤 2001년 1월 11일 공동발표가 이루어졌다. 양국 정부는 미군이 1950년 7월 마지막 주 노근리 주변에서 피란민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피란민에게 사격하라는 명령이 실제로 내려졌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 조사에서도 사건 발생 자체는 인정했지만, 당시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객관적인 결정적 증거가 부족해 모든 의문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고 정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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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17 | 미국 정부는 노근리 사건을 단순히 부인하기보다는 미군의 행위로 인해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2001년 1월 발표문에서 사건과 관련해 유감을 표명하고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사업 지원 등의 조치를 제시했다. 다만 피해자 측에서는 미국 정부의 사과와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도 나왔다. 특히 피해자들이 요구한 것은 단순한 추모시설 지원을 넘어 사건에 대한 보다 명확한 책임 인정과 공식적인 사과였다. |
| 18 | == 주한미군 감축·철수 논란 == | |
| 19 | 1970년 3월 20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한국에서 미군 1개 사단 철수를 결정한 국가안보 결정메모 48호에 서명하였다. 동년 3월 27일 포터 주한 미국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현재 6만 명의 주한미군 중 약 2만 명을 감축할 계획을 미국 정부가 검토 중임을 공식적으로 통보하였다. 그는 한국군 장비의 강화와 현대화를 위한 장기적 계획 수립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미국 정부가 이 계획을 미 의회에 제출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대한군원 삭감 대신 미국 정부가 미화 5천만불에 해당하는 원화를 경제원조의 형식으로 제공할 용의가 있음도 밝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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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이보다 앞선 3월 23일 미 국무성은 미국 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닉슨 대통령이 주한미군 감축 결정을 내렸음을 통보하고, 곧 박정희 대통령과 철군의 시기와 조건에 관해 토의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이 전문에 의하면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가 박정희의 제안에 의해 이루어지는 상황이 연출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 전문은 또한 20,000명 이외에 추가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일은 현재 계획되어 있지 않으나, 주월 한국군의 상당수가 베트남으로부터 귀국하거나, 한국군 보충전력의 개선이 잘 진행된다면 재고될 수도 있다고 적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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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 1970년 4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은 닉슨에게 친서를 보내 북한이 남침의 ‘결정적 시기’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주한미군 감군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험을 높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1975년까지가 한국의 안보에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밝히며, 동 시기 주한미군의 감축에 반대 의사를 피력하고 있다. 닉슨은 1970년 5월 26일자 답신에서 1969년 8월 한·미 정상회담을 상기시키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굳건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닉슨은 주한미군 전체가 아닌 약 1/3의 철수이며, 억지력은 계속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한 미 의회의 승인을 전제로 1971∼75년 기간 동안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훨씬 더 많은 군사원조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한국이 방위 부담을 더 하면 경제원조의 증가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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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6월 15일자 서신을 통해 방위부담이 한국의 자원과 능력을 넘어서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주한미군 감군은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이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는 억지력의 약화를 방지하기 위해 한국군 강화가 선행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박대통령은 방위산업 육성, 한국군 증원, 주한미군 중 해군과 공군 강화 필요성, 미국의 대한방위 의지를 강화시키는 외교적 보장 등에 관한 한미 협의가 필요함을 지적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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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 한·미간의 이견이 지속되자 1970년 8월 철군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애그뉴 미 부통령이 서울을 방문하여 박대통령과 장시간 회담을 갖게 된다. 부통령의 한국 방문 브리핑 문건에는 박정희가 주한미군 감군 시기와 71년 봄 선거 기간이 일치한다는 점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또한 미국이 방위조약의 모든 의무를 지키되, 한국이 요구하고 있는 유사시 자동개입은 허락할 수 없음을 못 박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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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박-애그뉴 회담에서 박대통령은 철군 이전 미국이 한국의 안보보장을 위해 외교적·군사적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즉 한국군 현대화 지원액 증액, 북한의 공격시 미국의 자동개입, 공동성명의 채택 등을 요구하였다. 애그뉴 부통령은「한·미 방위조약」에 입각한 한국 방위와 추가 군사원조를 약속하였다. 1971년 2월 6일 양국은 결국 미 7사단의 철수, 2사단의 후방 배치에 합의하였다.[[https://www.archives.go.kr/next/new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2770&pageFlag=&sitePage=&utm_source=chatgpt.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