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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은 중화민국의 지원 하에 활동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1941년 11월 광복군은 중화민국 정부 측으로부터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으로 된 조건을 전달받았다. 준승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다. 이현희는 이 준승은 한국광복군은 명실상부한 한국의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의 일개 보조, 고용군이 된다는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으며, 임시정부 자체도 그 지위가 의심스러워지는 등의 미묘한 국면을 제공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측의 이 준승 명령에 분개하여 임시정부를 미국 워싱턴 D.C.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 [[이승만]]과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김구를 설득하면서 임정 천도안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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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준승은 1944년 8월에 폐기되었고, 이때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로 이양되었다. 그러나 광복군의 훈련과 유지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계획과 목표 설정까지도 장개석의 통제 아래 있었다. 1944년 중국 국민당 정권은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이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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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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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은 먼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 군사조직을 흡수하여 통합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1941년 1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되었으며,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흡수하였다.중국 각지에 징모 분처를 설치하고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이라는 임시훈련소를 운영했다. 기관지 '광복'을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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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10일 일제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에 파견되어 버마 전역에 투입되었으며, 그 뒤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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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당시 임시정부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 ‘광복군 현세’를 보면, 1945년 3월 현재 광복군의 수는 514명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중국인의 수는 65명으로 이를 뺀 광복군의 실제 인원은 449명이다.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국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더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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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대신 김구는 미국에 체류 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광복군과 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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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일제의 항복이 다가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력으로 국토를 수복하기로 하고, 1945년 8월 11일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을 편성했다. 8월 16일 미군 비행기를 통해 그 선발대가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회군하였다. 이틀 뒤 8월 18일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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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임정은 오광선을 국내지대장으로 파견해 서울에 한국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를, 대전에 한국광복군 경비대 훈련소를 개설했다. 그러나 일제 패망 후 한국에 진주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던 미군정은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려 광복군 국내지대를 해체시켰다. 귀국길이 막혀 버린 중국 주재 광복군도 1946년 5월 16일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의 혼란 속에서 사실상의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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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은 해방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확군’ 작업에 정진했지만,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1946년 4월30일 광복군 총사령부는 난징에서 해산하고 5월 말 이범석 장군의 통솔 아래 귀국했다. 귀국 대오에 참여한 병력은 500명쯤이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선전부장 엄항섭이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1월25일치 기자회견에서 “광복군의 총사가 1만”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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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중국 국민당 정권은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이양한다. 그러나 장개석의 한국광복군 통수권 환수를 놓고 중국 국민당 내에서도 반대하는 시각이 나타났다. 그들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청천과 이범석 휘하의 광복군이 저지른 난폭한 행동들은 특히 상하이에서, 중국인들 뿐만 아니라 중국 거주 조선인들에게도 증오감을 사고 있었다. 광복군은 친일 매국노를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친일파나 '친일 부역자'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정적(政敵)을 처단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그 당시 임시정부는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보수 진영에 완전히 경사되어 있었고, 공산주의와 소련의 위험에 대해서 소리 높여 비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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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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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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