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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논란 및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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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주한미군]] [목차] [clearfix] == 개요 == [[주한미군]] 관련 [[논란]] 및 [[사건]] [[사고]]를 서술하는 문서이다. == 노근리 사건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된 뒤 [[대한민국 국군|국군]]과 [[미군]]은 계속 남쪽으로 후퇴했다. 7월 하순에는 충북 영동 일대까지 전선이 밀려났고, 미군 제1기병사단 예하 부대 등이 북한군의 남하를 막고 있었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이 민간인으로 위장해 후방으로 침투할 가능성을 상당히 우려하고 있었다. 실제로 미 육군의 훗날 조사에서도 당시 미군 병사들이 피란민 가운데 북한군 침투자가 섞여 있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동시에 미군 부대 자체도 한국전쟁에 급히 투입된 병력이 많아 훈련과 지휘·통제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영동군 일대 주민들은 북한군의 진격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피해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 병사들이 피란민들을 특정 방향으로 이동하도록 안내하거나 통제했고, 피란민들은 미군이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노근리 부근에 도착한 뒤 상황이 급격하게 달라졌다. 국가기록원은 당시 미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피란민들이 미군에 의해 인솔되어 이동하던 중 노근리 지역에서 사격을 받아 살상됐다고 정리하고 있다. 사건의 가장 잘 알려진 장소가 바로 노근리 쌍굴다리이다. 7월 26일 무렵 미군은 피란민들을 노근리 철도 주변으로 이동시켰고, 이후 피란민들이 철도와 쌍굴다리 부근에 모여 있는 상황에서 미군의 사격이 시작됐다. 피란민 생존자들은 미군이 쌍굴다리 양쪽에서 기관총 등을 발사했으며, 굴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에게도 총격이 이어졌다고 증언했다. 한미 공동조사 결과 역시 7월 26~29일 일부 미군이 노근리 다리의 쌍굴 내부를 포함한 여러 장소에서 피란민들에게 사격해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총격은 하루 만에 끝난 것이 아니라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이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쌍굴다리 내부에 들어간 피란민들은 좁은 공간에 갇힌 상태였기 때문에 총격을 피하기 어려웠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린아이와 여성 등 비전투원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정확한 사망자 수는 현재까지도 확정하기 어렵다. 한국 정부 조사에서는 영동군에 공식 신고된 사상자가 248명으로 집계됐지만, 실제 피해자는 신고되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더 많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한미 양국의 조사가 마무리된 뒤 2001년 1월 11일 공동발표가 이루어졌다. 양국 정부는 미군이 1950년 7월 마지막 주 노근리 주변에서 피란민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피란민에게 사격하라는 명령이 실제로 내려졌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 조사에서도 사건 발생 자체는 인정했지만, 당시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객관적인 결정적 증거가 부족해 모든 의문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고 정리했다. 미국 정부는 노근리 사건을 단순히 부인하기보다는 미군의 행위로 인해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2001년 1월 발표문에서 사건과 관련해 유감을 표명하고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사업 지원 등의 조치를 제시했다. 다만 피해자 측에서는 미국 정부의 사과와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도 나왔다. 특히 피해자들이 요구한 것은 단순한 추모시설 지원을 넘어 사건에 대한 보다 명확한 책임 인정과 공식적인 사과였다. == 주한미군 감축·철수 논란 == 1970년 3월 20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한국에서 미군 1개 사단 철수를 결정한 국가안보 결정메모 48호에 서명하였다. 동년 3월 27일 포터 주한 미국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현재 6만 명의 주한미군 중 약 2만 명을 감축할 계획을 미국 정부가 검토 중임을 공식적으로 통보하였다. 그는 한국군 장비의 강화와 현대화를 위한 장기적 계획 수립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미국 정부가 이 계획을 미 의회에 제출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대한군원 삭감 대신 미국 정부가 미화 5천만불에 해당하는 원화를 경제원조의 형식으로 제공할 용의가 있음도 밝혔다. 이보다 앞선 3월 23일 미 국무성은 미국 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닉슨 대통령이 주한미군 감축 결정을 내렸음을 통보하고, 곧 박정희 대통령과 철군의 시기와 조건에 관해 토의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이 전문에 의하면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가 박정희의 제안에 의해 이루어지는 상황이 연출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 전문은 또한 20,000명 이외에 추가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일은 현재 계획되어 있지 않으나, 주월 한국군의 상당수가 베트남으로부터 귀국하거나, 한국군 보충전력의 개선이 잘 진행된다면 재고될 수도 있다고 적고 있다. 1970년 4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은 닉슨에게 친서를 보내 북한이 남침의 ‘결정적 시기’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주한미군 감군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험을 높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1975년까지가 한국의 안보에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밝히며, 동 시기 주한미군의 감축에 반대 의사를 피력하고 있다. 닉슨은 1970년 5월 26일자 답신에서 1969년 8월 한·미 정상회담을 상기시키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굳건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닉슨은 주한미군 전체가 아닌 약 1/3의 철수이며, 억지력은 계속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한 미 의회의 승인을 전제로 1971∼75년 기간 동안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훨씬 더 많은 군사원조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한국이 방위 부담을 더 하면 경제원조의 증가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6월 15일자 서신을 통해 방위부담이 한국의 자원과 능력을 넘어서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주한미군 감군은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이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는 억지력의 약화를 방지하기 위해 한국군 강화가 선행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박대통령은 방위산업 육성, 한국군 증원, 주한미군 중 해군과 공군 강화 필요성, 미국의 대한방위 의지를 강화시키는 외교적 보장 등에 관한 한미 협의가 필요함을 지적하였다. 한·미간의 이견이 지속되자 1970년 8월 철군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애그뉴 미 부통령이 서울을 방문하여 박대통령과 장시간 회담을 갖게 된다. 부통령의 한국 방문 브리핑 문건에는 박정희가 주한미군 감군 시기와 71년 봄 선거 기간이 일치한다는 점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또한 미국이 방위조약의 모든 의무를 지키되, 한국이 요구하고 있는 유사시 자동개입은 허락할 수 없음을 못 박고 있다. 박-애그뉴 회담에서 박대통령은 철군 이전 미국이 한국의 안보보장을 위해 외교적·군사적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즉 한국군 현대화 지원액 증액, 북한의 공격시 미국의 자동개입, 공동성명의 채택 등을 요구하였다. 애그뉴 부통령은「한·미 방위조약」에 입각한 한국 방위와 추가 군사원조를 약속하였다. 1971년 2월 6일 양국은 결국 미 7사단의 철수, 2사단의 후방 배치에 합의하였다.[[https://www.archives.go.kr/next/new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2770&pageFlag=&sitePage=&utm_source=chatgpt.com|#]] == 윤금이씨 살인 사건 == 윤금이씨 살인사건은 1992년 10월 28일 경기도 동두천의 미군 기지촌에서 주한미군 제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이 당시 26세였던 윤금이 씨를 살해한 사건이다. [[가해자]] 마클은 윤 씨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뒤 시신에 매우 잔혹한 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됐으며, 사건의 참혹성이 알려지면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93년 4월 서울형사지법은 마클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항소심에서는 피해자 가족에게 배상금이 지급된 점 등이 참작돼 징역 15년으로 감형됐고, 1994년 4월 대법원이 15년형을 확정했다. 이후 마클은 2006년 8월 가석방돼 미국으로 출국했는데, 이미 15년형 중 상당 기간을 복역한 상태였지만 가석방 결정 역시 국내에서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 지하철 미군 난동 사건 == 1995년 5월 19일 충무로 지하철 미군 난동 사건은 서울 지하철 3호선 전동차와 충무로역에서 술에 취한 주한미군 및 가족 13명이 소란을 피우고 여성 승객을 성희롱하는 일이 벌어진 뒤, 이를 항의하던 시민 조정국 씨를 미군들이 따라가 집단 폭행한 사건이다. 당시 조정국씨는 미군들의 행동에 항의했다가 충무로역에서 내려진 뒤 여러 미군에게 얼굴과 옆구리 등을 집중적으로 폭행당해 병원 치료를 받았다. 사건을 지켜본 시민들도 미군들의 행동에 항의했으며, 이후 이 사건은 단순한 폭행 사건을 넘어 주한미군의 한국 내 범죄와 한미 SOFA의 형사재판권 문제가 다시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특히 1992년 윤금이 씨 살해사건에 이어 1995년에도 미군 관련 범죄가 발생하자 시민사회에서는 SOFA가 한국의 사법권과 미군 범죄 피해자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한다며 전면 개정을 요구했다. 이후 미군 측은 이 사건에 유감을 표명했고, 가해자 가운데 프랭크 골리나 병장은 한국 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다른 관련자들도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은 결국 1995년 11월부터 시작된 한미 SOFA 개정 협상에 대한 국내 여론을 강화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