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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실업친목회(r1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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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설립4. 성격5. 역사6. 해산7. 구성원8. 평가

1. 개요[편집]

대정실업친목회(대정친목회)는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6년 11월에 결성된 친일 단체이다. 정식 명칭은 대정실업친목회로, 당시 천황 요시히토의 연호 다이쇼에서 유래했다.

2. 상세[편집]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직후 모든 결사와 언론의 자유를 엄격히 제한하던 무단통치 시기에 조선총독부의 승인을 받아 활동했던 사실상의 유일한 합법 단체였으며, 당대 조선의 친일 귀족과 대지주, 예속 자본가 및 전직 관료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3. 설립[편집]

설립 당초의 취지는 서로간의 의사 소통을 통해 정의를 두텁게 하고 정신 수양을 꾀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① 국가 경축일에 관한 건 경성 번영에 관한 건 ② 경제 및 근검저축, 식산흥업에 관한 건 ③ 법령을 주지시키고 납세의무·위생근행에 관한 건

④ 예의 질서에 관한 건 ⑤ 기타 사교상 필요한 사항 등을 연구 사항으로 삼고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중이 무단정치에 잘 순응하도록 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연구 과제로 하였던 것이다.#

4. 성격[편집]

대정친목회의 중요한 성격은 내선융화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선은 일본 본토와 조선을 의미합니다. 즉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당시에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융화’는 평등한 민족 간 교류라기보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조선인을 식민지 체제에 편입시키는 논리로 작용했다. 연구에 따르면 창립 당시부터 대정친목회는 내선융화를 목표로 했으며, 조선총독부 정책에 협력하는 방향을 취했다.

5. 역사[편집]

대정친목회는 1916년 11월 서울에서 창립되었다. 당시 조선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진행되고 있었고, 조선인의 정치·사회적 결사가 강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당초 표방한 목적은 회원 간 친목을 강화하고 서로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며 정신을 수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연구 대상으로 삼은 내용에는 경성의 번영, 경제와 근검저축, 식산흥업, 법령 준수, 납세, 위생, 예의와 질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조선인들이 당시의 식민통치 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평가된다.

3·1운동을 통해 조선인의 독립 의지가 전국적으로 드러났지만, 대정친목회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내선융화 논리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활동했다.

이 때문에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단순한 친목·경제단체라기보다는 일제가 조선 사회의 유력자들을 이용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한 친일 사회단체라는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6. 해산[편집]

대정친목회는 1920년대 이후에도 단순한 친목단체로 남지 않았다. 내선융화를 내세우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고, 1930년대에는 일본의 만주 침략을 옹호하는 등 더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쳤다. 또한 조선인의 일본식 성명 사용을 강요한 창씨개명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운동이나 민족주의와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고 일제의 전쟁·동화 정책에 협력하는 친일 세력의 조직으로 성격이 강화되었다.

대정실업친목회는 1920년대 중반까지 일제의 식민 통치를 지지하는 로비 및 협력 기구로 기능하였다.

1924년 3월 25일에는 일제 총독 정치를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한민족의 독립 의식을 말살하려는 목적으로 결성된 관제 협력 단체인 각파유지연맹의 발기인으로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 일제의 지배 체제가 공고해지고 여타 전시 총동원 단체들이 난립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타 친일 단체들과 함께 흡수 및 해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 구성원[편집]

대정실업친목회의 주요 구성원은 1921년 조직 개편 이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회원은 약 250명으로 늘어났고, 조선귀족·대지주·예속자본가 등 당시 친일 성향의 상층 인사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주요 구성원으로는 민영기, 조진태, 한상룡, 이완용, 민영휘, 이윤용, 예종석, 안상호 등이 있다.

8. 평가[편집]

대정실업친목회(정식 명칭은 대정친목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단순한 경제인 친목단체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조선의 유력층을 기반으로 식민통치와 내선융화를 지지·선전한 대표적인 친일단체로 평가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대정실업친목회를 명확하게 ‘친일 단체’로 규정한다. 특히 1916년 창립 당시부터 조선인들이 일제의 무단통치에 순응하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했고, 1921년 조직 개편 이후에는 조선귀족·대지주·예속자본가 중심의 친일단체로 성격이 더욱 뚜렷해졌다.

대정친목회는 흔히 ‘실업’이라는 명칭 때문에 경제인들의 친목단체로 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장신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 구성원은 경제인뿐만 아니라 관료, 조선귀족, 종교인,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의료인 등 경성의 유력층을 광범위하게 포함했다. 따라서 경제단체라기보다는 당시 경성의 유력자들이 결집한 사회·정치적 성격의 친일단체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대정친목회가 가장 중요하게 내세운 것이 내선융화였다. 표면적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자는 의미였지만,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조선인을 일본 제국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논리로 작용했다. 장신의 연구에서도 대정친목회가 조선의 ‘잘못된 풍속’을 고치고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것을 내선융화의 실현 방법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한다.

특히 1930년대 이후의 활동은 대정친목회의 친일성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연구에 따르면 대정친목회는 자신들을 일본 국민의 일원으로 인식하면서 일본의 만주 침략을 옹호했고, 조선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대표적인 민족말살정책인 창씨개명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이 때문에 당시에도 대정친목회는 ‘친일의 중심기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종합 평가로는 대정실업친목회는 이름만 보면 경제·실업계 인사들의 친목단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유력층을 결집해 내선융화를 주장하고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대표적인 친일 사회단체로 평가된다. 특히 만주 침략 옹호와 창씨개명 지지 등 후기 활동까지 고려하면, 단순한 ‘친일 성향 단체’보다는 식민지배와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친일 협력 세력으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