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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분류:경복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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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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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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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자선당(資善堂)은 [[조선|조선 시대]] 세자와 세자빈이 거처하던 [[경복궁]] 안의 건물이다. 조선 문종이 세자 때에 거처한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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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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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경복궁이 창건되었을 때는 동궁이 궁궐 밖에 있었다. 그래서 세자가 왕실 어른을 찾아 문안하거나 경서 공부를 할 때 일일이 궁을 오가야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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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태조의 세자 이방석은 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되고, 이어 세자가 된 영안군은 거의 곧바로 정종으로 즉위했다. 정종의 세자였던 정안군은 개경의 동궁을 이용했고, 역시 얼마 지나지않아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창덕궁에 주로 머물렀고, 세자였던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은 어디서 거주했는 지 불분명하나 분명 경복궁 일대에서 머물지는 않았다. 그리고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이 경복궁을 주로 이용하면서 재위 9년 뒤인 1427년에서야 비로소 경복궁 안에 제대로 동궁을 지었다. 이 때 자선당도 건립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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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동궁으로 지었으나 초창기엔 임금이 이 곳에서 정사를 보기도 하였다. 문종은 세자 시절을 대부분 이 곳에서 보냈으며 문종의 아내 현덕왕후가 세자빈 시절 이 곳에서 단종을 낳고 얼마 뒤 운명하였다. 문종 즉위 후엔 단종이 머물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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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 1462년(세조 8)에는 확실한 이유는 모르나, 동궁을 옮겼고 이 때 자선당도 이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옛 동궁 자리에는 예문관의 책 일부를 옮겨 보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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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1543년(중종 38) 1월에 화재로 불탔다. 이후 동궁 재건을 위해 자재들도 마련하였으나 1550년(명종 5) 경에 기와를 인수궁 건립과 종묘 보수 등에 사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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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그래도 1553년(명종 8)에 소실된 경복궁의 내전을 다음 해에 다시 지을 때, 동궁도 넓혀 중건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그 사이에 복구한 듯하다. 이 때 상량문을 당시 대제학이던 퇴계 이황이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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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경복궁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불 타 없어지고 270년 간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가 1866년(고종 3)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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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 자선당 유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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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자선당 유구는 원래 자선당 복원 때 활용하려 했지만, 손상이 너무 심해 경복궁 건청궁과 녹산 사이에 놓아 보존하고 있다. 한동안 비공개였으나 2012년 11월부터 개방하여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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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 본 문서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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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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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 [[https://ko.wikipedia.org/wiki/%EA%B2%BD%EB%B3%B5%EA%B6%81_%EC%9E%90%EC%84%A0%EB%8B%B9|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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