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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분류:단종(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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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include(틀:상위 문서, 문서명1=단종(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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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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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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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조선 국왕|조선의 제6대 국왕]] [[단종(조선)|단종]]의 생애를 다룬 문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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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 생애 초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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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1441년 8월 9일(음력 7월 23일) 단종은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과 왕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몸이 약한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지 하루 만에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후가 죽자 어린 세손을 가련히 여긴 세종은 소헌왕후와 의논하여 자신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고, [[세종(조선)|세종]]의 후궁으로 조모뻘인 혜빈 양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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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1448년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병중이었던 세종은 자신이 그리 길게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병약한 아들 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늘 어린 손자 단종을 몹시 걱정했다. 문종마저 요절하고 나면 야심으로 가득찬 둘째 아들 수양대군을 비롯해 혈기왕성한 여러 대군 사이에서 어린 손자가 아무 탈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전에 황보인·김종서·성삼문·박팽년·[[신숙주]] 등에게 왕세손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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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 즉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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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1448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450년 조부 세종대왕이 죽고 아버지 문종이 왕으로 즉위하자 바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부왕 문종이 즉위하기 전 할아버지 세종은 세자 문종의 병약함과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의 아들들의 존재를 염려하여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어린 손자를 부탁하는 말을 여러번 반복하였다. 성삼문 등은 세종의 뜻을 받들었지만, 신숙주 등은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었다. 1452년(문종 2년) 4월 아버지 문종은 수양대군을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야심을 철저히 숨기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는 등 자신의 뜻을 철저히 감추었다. 그가 관습도감 도제조가 되자 사간원에서 종친에게 실직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했으나, 문종이 듣지 않았다. 세종이 우려했던 대로 문종은 즉위한 지 겨우 2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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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단종은 문종의 뒤를 이어 1452년 6월 1일 (음력 5월 14일)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릴 때부터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을 만큼 영리하였으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므로 혼자서 나랏일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모든 결정은 의정부의 신하들이 도맡아 했고, 단종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특히 인사 문제는 고명대신들에 의한‘황표정사'라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어린 단종의 즉위 이래 정국이 불안해진 가운데 위축된 왕권과 달리 수양대군 등 종친의 세력은 나날이 팽창되어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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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 계유정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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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수양대군은 종친의 대표로서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자처하였고, 비밀리에 측근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족과 성리학자들의 지지를 획득했다. 이후 수양대군은 장악원 제조 등을 역임하며 권력 기반을 다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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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영풍군, 정종 등은 단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문종의 후궁인 숙빈 홍씨 등은 정보를 훈신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 경쟁은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453년 음력 10월, 계유정난을 불러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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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써, 문종의 고명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김종서·정분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켰으며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1454년(단종 3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 1등관에 서훈하였다.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고 말았다. 단종은 수양대군에 의하여 1457년 유배지인 영월에서 사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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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 [[단종 복위 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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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1454년에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의 나머지 측근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하는 일이 일어나자 계유정난을 계기로 일부 신료들은 단종이 양위해야 된다는 공론을 세웠고 이는 통과되었다. 1455년 7월 25일 (음력 윤 6월 11일),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한명회·권람 등에게 선위를 강요받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 (상왕이 거처하는 곳)으로 옮겨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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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동시에 그의 유모이기도 했던 혜빈 양씨는 금성대군 등과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가산이 적몰된 뒤 청풍으로 유배를 갔다가 1455년 12월 17일(음력 11월 9일) 신하들의 여러 상소끝에 교수형으로 사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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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1456년 음력 6월에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등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조가 즉위한 이듬해(1456년)에 성삼문·유성원·하위지 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무인들은 연회때 별운검을 설치한 뒤 세조 3부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가담자의 한명인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말하고, 정창손의 설득에 의해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하여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그 바람에 1457년 단종은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노산군,즉 폐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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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1457년 9월 금성대군은 배소인 순흥에서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운다. 금성대군,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하고 단종도 같이 죽음을 내렸다. 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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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 본 문서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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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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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 [[https://ko.wikipedia.org/wiki/%EB%8B%A8%EC%A2%85_(%EC%A1%B0%EC%84%A0)|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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