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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분류:대한민국의 유공자]] [[분류:위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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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2><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47a0><tablewidth=450><tablebgcolor=white,#191919>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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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독립유공자|{{{#white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br] {{{#white '''{{{+1 동창률}}}[br]董昌律[br]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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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2><nopad> [[동창률|[[파일:동창률 사진.jpg|width=1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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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2><width=20%><colbgcolor=#0047a0><colcolor=white> '''출생''' ||186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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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br](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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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2> '''사망''' ||1943년 4월 (향년 75세) / {{{-2 (사망 [age(1943-04-01)]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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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강원도]] 양구군 동면 팔랑리[br](現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 동면 팔랑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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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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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jpg|width=20px]] [[대한민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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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 '''본관''' ||광천 동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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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 '''가족''' ||배우자[br]딸 2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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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 || '''후손''' ||김알라 (외손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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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 '''직업''' ||[[독립운동가]], 군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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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 '''종교''' ||[[무종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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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 '''소속''' ||조선민족대동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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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 '''상훈''' ||대통령표창 {{{-2 (1983년)}}}[br]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2 (199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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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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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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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 생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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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1868년 10월 11일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천이다. 1895년 고향을 떠나 경성부 입정정으로 이주하였다. 유년 시절 김노수 집에 머물면서 농사일을 도왔으나, 성년이 되어 독립한 후 일진회에 가입하여 평의원과 경무위원장을 지내며 한동안 생계를 유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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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1910년 경술국치를 계기로 민족을 등졌던 과오를 반성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평소 양정 등과 교류하면서 일본의 무단통치를 비판하고 조국 독립의 당위성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등 스스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19년 3월 전협과 최익환을 중심으로 조선민족대동단이 결성되자, 이 단체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항일항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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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대동단은 1919년 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아 결성된 항일단체로 한국을 일본제국주의 통치에서 이탈하게 하여 독립국을 형성하고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확보하며,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조직의 구성원들은 관리·유학자·종교인·학생·상인·부녀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동단은 경기·충청·전라·경상·평안·함경 등의 국내와 중국 안투현 등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애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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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이들은 선전물을 작성하여 배포함으로써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등 대동단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선전 활동에도 주력하였다. 대동단에 가입하여 기관지인 『대동신보』의 배포를 위해 앞장섰으며, 1919년 8월에는 함북 단천에 파견되어 김병권을 가입시키는 등 조직 확대를 위해 힘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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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한편 대동단은 선전·홍보 활동뿐만 아니라, 1919년 만세운동을 계승하는 대규모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려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대동단의 활동이 수면 위로 드러남에 따라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져 조직원들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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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전협 등 지도부는 대동단의 본부를 상하이로 이전할 것을 결정하였다. 또한 조직의 위기를 극복할 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의친왕 이강의 상하이 망명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겼다. 의친왕을 설득하여 상하이로 망명시킨 뒤, 조직의 수장으로 내세워 국내외 여론을 고취시킴으로써 민족 독립의 역량을 결집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평소 의친왕과 친분이 두터운 정운복을 매개로 하여 의친왕에게 대동단의 의견을 타진하였고, 의친왕의 승낙을 얻어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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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평소 대동단의 조직원인 이재호를 도와 대동단의 대소사를 챙기던 중, 이재호의 추천으로 의친왕 망명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9년 11월 7일 이재호·전협 등과 모여 의친왕 망명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하였다. 거사일인 11월 9일 공평동에서 동지들이 의친왕과 접선할 때 망을 보면서 이들을 엄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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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의친왕은 탈출에 성공하여 상하이로 출발할 수 있었으나, 이 사실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11월 11일 중국 단둥역에서 의친왕 일행은 모두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곧이어 거사에 가담한 조직원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출판법,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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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6900780&cid=72555&categoryId=72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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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 == 주요 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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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 1919년 3월경 :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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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 1919년 10~11월 : 의친왕 이강공 상하이 망명 계획에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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