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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분류:서재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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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include(틀:상위 문서, 문서명1=서재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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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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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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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서재필]]의 [[논란]] 및 의혹을 서술하는 문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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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 친일 논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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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1898년 1월 15일 가토 변리공사가 西 외무대신에게 보낸 서신에는 서재필이 독립신문의 소유권을 일본에 매각하려던 계획과 일본 공사측이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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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1898년 5월 23일 가토 변리공사의 서신 내용에 따르면 독립신문-일본 쌍방이 각각 여러 가지의 사정으로 인하여 독립신문의 양도는 성사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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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2005년 2월 인터넷신문 등에 칼럼과 기사를 기고하던 재야언론인 박선협은 청와대에 '신문의 날'을 혁파해야 한다는 민원을 제출했다. 독립신문이 친일 논조를 펼쳤고 창간을 주도한 서재필이 친일 행각을 벌였으므로 이 신문의 창간을 기념해 제정된 신문의 날은 다른 날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청와대]]는 이 문제를 문화관광부에 이관했으며, 문화관광부는 신문협회·편집인협회·기자협회에 검토 의견 제출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문화관광부의 김정화 사무관은 "신문의 날은 정부가 제정한 국경일이 아니라 민간단체가 제정해 기념하는 날이어서 언론계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박선협의 주장에 대해 언론단체들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편집인협회의 최문기 사무총장은 "이사회에 보고해 논의는 하겠지만 신문의 날이 큰 문제가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정진석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신문의 날은 서재필 개인이 아니라 독립신문 창간을 기념하는 날이며,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지로서 개화사상과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류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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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추진하는 등 과거사 규명에 앞장서온 민족문제연구소의 김민철 연구실장도 "서재필과 독립신문이 친일적 논조를 펼친 것은 러시아의 침략을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며 "독립신문의 의미가 과도하게 평가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신문의 날을 바꿀 정도로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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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 파산 원인과 경제공황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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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일설에는 그의 파산의 직접적인 원인이 [[독립운동]]에 대한 자금 투자가 아니라 1929년에 일어난 대공황의 영향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에 의하면 "그가 활동을 포기한 것은 1922년 2월인데 그의 필립 제이슨 상회는 1924년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점이다. 전재산을 날렸다는 사람이 몇년 후까지 사업체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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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 한국어 망각, 국적 논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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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그는 1895년 귀국했을 때나 1946년 귀국했을 때 자신은 한국어를 잊어버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어로 대화를 하였기에 그가 한국어를 완벽하게 잊었는가에 대해 의혹이 제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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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그는 미국인으로서 『독립신문』을 통해 미국의 이미지를 절대적으로 미화하였다.[103] 심지어 미국의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금광 채굴권 침탈을 환영하였다. ‘속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나라와 맺은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유리한 계약’ (《The Independent》1896. 4. 16)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미국의 필리핀 · 하와이 · 쿠바 점령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시하였다. 1898년 당시 그의 출국을 만류하는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보낸 답장에는 조선 정부를 ‘매정부’라 부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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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그가 조선인들을 ‘계몽’한 내용 가운데에는 완전히 미국식 풍습을 모범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면, ‘남의 집에 갈 때 파 · 마늘을 먹고 가는 것이 아니고, 남 앞으로 지나갈 때는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한다.,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을 먹지 않고 소고기와 브레드를 먹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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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서재필이 '서재필이라는 이름으로 산 것은 그의 생애 가운데 1/3도 안 되는 기간이었으며, 특히 1884년 정변 실패로 망명한 이후 그의 국내 체류기간 역시 4년도 안 된다'는 비판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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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1919년, 한인연합대회 의사록에서도 그의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었다. 회의 벽두에 애국가가 아닌 미국 국가를 부르게 하고,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의장 취임사에서도 ‘만일 대회 진행 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게 되면 사임하겠다’는 것을 못박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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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 == 미국 시민 자격 문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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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그가 미국인임을 자처한 것 외에도 미국 시민권자 자격으로 비교적 덜 탄압을 받은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상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진오는 '그는 안전지대였던 미국에서 미국 시민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경력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체포와 고문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고통스럽게 투쟁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자신의 오랜 투쟁 경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경우도 많았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매도하고 만다. 우리는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고 지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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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주진오는 '사실 서재필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상황 판단력과 현실 적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나다. 그 결과 미국으로 건너간 다른 초기 이주민들이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주변인으로 살아간 반면에 그만은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는 그는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이며 ‘세계인’의 선구였는지도 모른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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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 본 문서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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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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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E%AC%ED%95%84|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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