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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류:고령 신씨]] [[분류:조선의 정치인]] [[분류:조선의 학자]] [[분류:조선의 외교관]]
2||<-3><tablealign=right><tablewidth=420><tablebgcolor=#fff,#1c1d1f><tablebordercolor=#b82642><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0420, #b82642 20%, #b82642 80%, #960420)"
3'''{{{#f0ad73 조선 종묘배향공신}}} [[영의정|{{{#f0ad73 영의정}}}]][br]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문충공(文忠公)[br]{{{+1 신숙주}}}[br]申叔舟'''}}} ||
4||<-3><nopad> [[사진|[[파일:신숙주 사진.jpg|width=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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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width=22%> '''출생''' ||1417년 8월 11일 ||
6||전라도 나주목 금안리 오룡동[br](現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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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 '''[[사망|{{{#f0ad73 사망}}}]]''' ||1475년 8월 1일 (향년 5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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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
9||<-2> '''[[묘소|{{{#f0ad73 묘소}}}]]'''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 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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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본관''' ||[[고령 신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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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재임기간''' ||<bgcolor=#f5f5f5,#2d2f34>제28대 영의정부사 → 영의정 ||
12||1462년 6월 26일 ~ 1466년 6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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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bgcolor=#f5f5f5,#2d2f34>제40대 [[영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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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471년 12월 13일 ~ 1475년 8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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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국적|{{{#f0ad73 국적}}}]]''' ||[[파일:조선 국기.png|width=20px]]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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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width=9%> '''이름''' ||<width=70><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호''' ||보한재, 희현당 ||
17|| '''자''' ||범옹 ||
18|| '''봉호''' ||고령군 → 고령부원군 ||
19|| '''시호''' ||문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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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학력''' ||1439년 친시문과 을과 급제[br]1447년 중시문과 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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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가족''' ||아버지 신장, 어머니 나주 정씨 정유의 딸[br]형 신맹주, 신중주[br]남동생 신송주, 신말주[br]여동생 창녕 조씨 조효문의 처, 화순 최씨 최선복의 처[br]배우자 무송 윤씨[br]자녀 9남 2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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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종교|{{{#f0ad73 종교}}}]]''' ||유교 {{{-2 (성리학)}}} ||
23[목차]
24[clearfix]
25== 개요 ==
26신숙주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문신·[[정치인|정치가]]이며 언어학자, 외교관이다.
27== 상세 ==
28본관은 고령(高靈), 자(字)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장(申檣)의 아들이자 윤회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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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438년(세종 20년)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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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하였으며 1461년부터 1464년,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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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사육신과 함께 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이후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의 편에 가담하였다. 결국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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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동국정운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저하였다. 생전에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 그 밖에 한명회, 권람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윤회, 정인지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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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본 문서 정보 ==
38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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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88%99%EC%A3%BC|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