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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1 (새 문서) | 1 | [[분류:대한민국 인물별 생애]] |
| r2 | 2 | [include(틀:상위 문서, 문서명1=이범석)] |
| r1 (새 문서) | 3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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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 개요 == | |
| 6 | [[이범석]]의 생애를 다룬 문서이다. | |
| 7 | == 어린시절 == | |
| 8 | 이범석은 1900년 10월 20일 대한제국 한성부 용동에서 이문하와 연안 이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가계는 조선 왕족으로, 세종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광평대군의 후손이었고 광평대군의 셋째 손자인 청안군 이영의 셋째 아들이었던 정안부정 이천수의 15대손이었다.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15대조 정안부정에서 끝났고, 14대조 이한은 음직으로 출사하여 배천군수에 이르렀다. 이후 줄곧 벼슬을 배출하여 한성 근교에서 거주하였다. 그 뒤 증조부 이목연의 대에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면으로 이주하였으나 관료 생활을 하던 아버지 이문하의 대에 다시 한성부로 상경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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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개화 사상에 감화된 아버지 이문하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그러나 당시 20여세 되던 노비 정태규는 이범석의 집을 떠나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다. 정태규는 어린 주인집 장남 이범석과의 정이 들어 집을 떠나기를 주저하였다 한다. 노비가 아닌데도 집에 두게 되어 지탄을 받게 되자 아버지 이문하는 정태규를 오씨 성을 쓰는 대한제국 육군 참령의 대대에 병사로 넣어 주었다. 정태규는 이후 박승환 대대의 전투병으로 근무하며 군복 차림으로 종종 이범석의 집을 방문하곤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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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1907년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정태규가 정미 7조약이 강요한 군대해산에 저항하다 참살되는 것을 보고 이범석은 항일을 결심하고 16세이던 1915년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경성고보 시절 중국으로 망명했다. 1907년 8월 1일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로 군대 해산명령이 하달되었다. 구한국 군대 해산령에 불복한 박승환 대대장이 자결하면서 대대 병력은 서울 시내의 일본 군대에게 돌격하여 교전하였으나 사살되었다. 일본군은 경성의 민가에 무차별 난입하여 구한국 병사의 색출작업에 나섰고 이범석의 집에도 들이닥쳐 수색하였다. 그날 초저녁 병정이 쓰러졌다는 마을 주민들의 아우성소리를 듣고 누이 이씨와 함께 마을 어귀로 나갔다가 검은 바지에 붉은 동을 맨 군복차림이던 정태규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정태규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그는 복수심에 불타 배일사상을 품게 되었다. 그는 후일 이를 신의 계시인지도 모르겠다고 회상하였다.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는 집안에 훈장을 초빙하여 한학을 배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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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10세에 부친 이문하의 재혼으로 계모 김해 김씨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뒤 20년 연하의 이복 남동생 이범혁이 태어났다. 유년기의 이범석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개구쟁이였으나, 그를 [[독립운동가]]로 키워 낸 것은 계모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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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개구쟁이였던 이범석은 장난기가 심하여 동네 아이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못된 짓을 골라하였다. 말을 타고 마을 순시에 나선 일본인 순사를 향해 고무 새총을 쏘아 맞추어, 순사가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말에서 굴러 떨어진 일본인 순사는 아버지 이문하를 찾아가 항의하였으나 아버지 이문하는 이를 무마시켰다. 곡식을 넌 멍석을 끌어다 물에 집어던지고 도망치기가 예사였으며, 하루는 암소에게 뱀을 밀어 넣는 바람에 암소가 길길이 뛰다가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짖궂었던 그는 뱀을 맨손으로 잡아다가, 외양간의 다른 소들의 항문에도 뱀을 집어넣어 소들이 갑자기 쓰러져 죽게 만들었다. 소 주인은 즉시 이문하를 찾아가 항의했다. 말에서 굴러 떨어진 왜인 순사의 항의에도 눈 하나 끄떡하지 않던 이문하는 이번에는 아들을 향해 도끼를 집어 던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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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남편의 도끼를 보고 계모 김해 김씨는 아들을 변호하던 중 아들을 감싸려 달려들었고, 도끼는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달려 든 계모의 무릎에 맞고 말았다. 이후 계모는 평생 다리를 저는 신세가 됐다. 계모의 아들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다. 가을이 되면 찹쌀로 떡을 빚어 이역만리 만주까지 독립운동에 겨를이 없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이후 이범석은 계모와 배다른 형제들에게 더욱 각별히 대하였다고 한다. 이범석은 만년에 집필한 저서 《우둥불》에서 개구쟁이였던 자신을 끝까지 믿고 신뢰한 계모 김해김씨에 대한 사모의 정을 구구절절이 회고하기도 했다. 이범석에 의하면 계모 김해김씨는 인자하고 한문에도 능할 뿐 아니라 교양이 있던 분이라고 평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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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1915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경성으로 상경할 때 아버지 이문하는 그에게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는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출국 전 이범석은 아버지 이문하가 재산의 일부를 한성은행에 예금한 것을 확인, 아버지 이문하와 친분이 있던 한성은행장 한상용을 찾아갔다.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한상용 댁을 수시로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 한상용에게 집에서 전보가 왔는데 급히 토지를 매입하게 되어 돈을 출금하라는 전갈을 받았다고 하고, 돈 1,300원을 인출해왔다. 1,300원을 인출한 그는 여비를 넉넉히 마련하고자 누나 이씨의 집을 찾아갔다. 누나 이씨는 조선일보 사장으로 있다가 망명한 신석우의 아내로, 남편의 뜻을 이해하던 누나는 자신을 찾아온 남동생에게 자신의 패물을 팔아서 마련한 돈 100원을 장만해주었다. 그는 '내가 떠난 후 1주일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집에 알리지 말라'고 애원한 뒤 이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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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1915년 12월 하순 그는 이천을 떠나 영등포로 갔다. 이때 그의 친구 중 신필만이 그를 전송해주었다. 여러 친구가 있었으나 그 중 비밀을 지킬 친구는 신필 한사람으로 본 그는 신필에게만 알리고 그에게 부모님에게 전하는 편지를 맡겼다. 일인학생을 가장하고 열차편으로 신의주에 도착, 압록강 철교를 도보로 건너 만주 안둥현에 도착, 중국으로 망명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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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2 | 24 | 안둥에 도착하여 중국인 옷으로 갈아입고, 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친구 이병삼에게서 배운 중국어를 구사하며 중국인으로 위장, 열차편으로 산해관, 펑톈에 도착했다. 펑톈의 고려 여관에서 여운형이 묵는 호실로 찾아가 해후했다. 그는 여비 부담을 우려하였으나 이범석은 여비가 있음을 알렸고, 그와 함께 난징으로 가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는 여운형에게 매부가 신석우임을 알렸고, 여운형은 신석우가 신규식과 가까이 지낸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렸다. 상하이에 도착하여 매부인 신석우를 찾아갔다. 그곳 불조계의 어양리에서는 상하이 한인 지도자 신규식을 만났으며, 그의 집에 유숙하며 6개월간 항주의 항주군관예비학교를 수료하였다. 신규식의 집에 유숙할 때 그의 집을 방문한 쑨원을 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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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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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 [[https://ko.m.wikipedia.org/wiki/%EC%9D%B4%EB%B2%94%EC%84%9D|위키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