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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분류:이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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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include(틀:상위 문서, 문서명1=이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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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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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이순신]]에 대한 생애를 작성한 문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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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 출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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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한성부]] 남부 건천동(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8길 19 신도빌딩 근처)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순신은 어릴때 부터 골목 대장 이었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보냈고, 온양 방씨와 혼인 이후엔 처가인 아산에서 지냈다. 이정은 자신의 네 아들에게 고대 중국의 성인으로 알려진 복희, 요 임금, 순 임금, 우 임금의 이름자를 붙여 첫째부터 이희신, 이요신, 이순신, 이우신으로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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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고려 때 정5품 신호위 중랑장을 지낸 덕수이씨의 시조 이돈수의 12세손이며, 조선 초 예문관 대제학,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정정공 이변의 후손이다. 증조부 이거는 정언, 이조좌랑, 통덕랑 수사헌부장령, 1494년 연산군이 세자시절 세자시강원보덕 등을 지내고, 연산군 즉위 초에는 통훈대부(정3품 당하관)로 승진, 장악원정, 한학교수를 지냈으며, 연산군 초에 춘추관편수관으로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순천도호부사, 행호군을 거쳐 최종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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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조부 이백록은 흔히들 조광조와 가깝게 지내던 중 1519년(중종 14) 조광조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고, 이후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조부 이백록은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과 동시에 음서로 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랫동안 성균관 생원으로 있었다. 이후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으며 1534년(중종 29)과 1540년(중종 35) 사이에 선교랑 평시서 봉사를 지냈고, 사후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됐다. 아버지 이정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1573년(선조 6) 병절교위를 거쳐 1576년(선조 9) 종5품 창신교위를 지냈다. 어머니 초계변씨는 생원 변성의 딸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 초계변씨의 꿈에 조부 이백록이 나타나 귀하게 될 아이라고 지적하는 태몽을 꾸고 그를 수태했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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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 == 소년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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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이순신의 원래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한성부 남부 건천동에서 성장했다. 같은 동리에 살았던 서애 유성룡은 자신의 저서 징비록에서 이순은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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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유성룡에 의하면 그는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면, 그는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다,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아이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꺼려했다 한다. 유성룡은 그의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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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그는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하려 했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했고, 글씨를 잘 썼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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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1565년 이순신은 방씨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를 준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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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 무과 급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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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28살이던 1572년(선조 5년)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시험을 보던 중, 말이 거꾸러지면서 말에서 낙마하여 주변 사람들이 기절한 줄 알았으나 옆에 있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동여매고 시험을 끝까지 치렀다. 하지만 결국 왼발을 다치고, 시험에서는 낙방하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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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연마하여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3월 22일 그의 나이 32살에 보인 신분으로 식년시 무과에 병과 제4인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훈련원 봉사 실습생으로, 정식 직책이 아니다.)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분석에 의하면 당시 그의 나이는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다. 급제 후 1576년 12월에 동구비보 권관을 거쳐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6][7] 훈련원 봉사 재직 중 자신의 친구를 훈련원 참군으로 추천하는 병조정랑 서익의 요청을 거절했다. 1579년 12월 충청도병마절도사 군관으로 전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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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 [[무관]] 생활 초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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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그 뒤 36세가 되던 1580년 7월에 전라도 발포진의 수군만호로 전근되었다. 발포는 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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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발포수군만호 재직 중 전라좌수영의 오동나무를 베기를 거부하여 전라좌수사 성박의 미움을 받았다. 성박은 군관을 시켜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게 했지만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나라의 재산인 나무를 벨 수 없다 하여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성박은 후임자에게 이순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남겼고, 후임 전라좌수사 이용은 이순신을 밉게 보았다. 이용은 좌수영 관하의 다섯 포구인 발포, 여도, 사도, 녹도, 방답진을 점검하였다. 이때 다른 4개의 포구 이탈자는 보고하지 않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포구의 3명만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다른 4개 포구의 결과를 조사하여 보고하려 하자, 이용은 즉시 장계를 회수하였다. 이용은 그의 근무성적을 최하로 매겼는데, 전라도도사로 재직 중이던 조헌은 고과내용을 보자 부당한 처사라며 항의하여 수정하게 했다. 나중에 이순신의 인물됨을 알아본 이용은 생각을 바꾸어, 함경남도 남병사로 전근한 뒤 1583년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추천하기도 했고,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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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1582년 1월 발포진 만호로 재직 중일 때 서익이 군기경차관으로 고흥군에 왔다. 이때 서익은 발포진을 찾아가 군기보수 불량이라는 이유로 그를 파직시켰다. 그러나 곧 복직하였다. 1582년 5월 훈련원봉사가 됐다. 1583년 7월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추천을 받아 남병사의 군관이 되었다가, 1583년 8월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되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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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그 후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훈련원참군이 되었다. 1583년 11월 15일 부친상을 당했다. 1586년(선조 19년) 1월에 사복시 주부가 되었고, 이어 조산만호 겸 녹도 둔전사의가 되었다. 한편 그를 유심히 지켜본 병조판서 김귀영은 1579년 자신의 서녀를 그에게 첩으로 주려 하여 불렀다. 그러나 어찌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느냐며 그 제의를 거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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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 무관 생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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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고, 이후 전라도 조방장·선전관 등이 되었다. 1589년(선조 22년) 1월에 비변사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와 정언신 등의 추천을 받았다. 그해 2월 전라도 도순찰사의 군관이 됐다. 7월에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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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1589년 11월 무겸 선전관, 12월 정읍현감으로 제수됐다. 1590년 8월 조정에서는 그를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첨사를 거쳐 만포진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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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선조는 신하들의 반발과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을 써서 1591년 2월 이순신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이 천거하여 이순신은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진도군수로 승진시켰고, 그가 부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시켰다. 이어 선조는 이순신이 가리포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정3품 전라좌수사에 전임하게 하였다. 또한, 선조는 이순신과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이순신을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혔다. 그는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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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 == 전라좌수사 부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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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1591년 2월 태인현감으로 부임했다. 1591년 이순신은 47세에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그와 같은 선조의 결정을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한편 이순신은 부임지에 부임하자마자 전쟁에 대비하고자 휘하에 있는 각 부대의 실태를 파악하였으며, 무기와 군량미를 확충하고 거북선을 개발 및 건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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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부임 직후 그는 좌수영을 근거지로 삼아 주변 해안가의 군함 정비 및 군함을 추가로 제조하고, 군비를 늘리는 등 만약에 있을 외부의 침략에 대비하였고, 또한 조정에 건의하여 군량의 추가 확보를 목적으로 바닷가의 섬들에도 둔전을 설치하게 할 것을 요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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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 이순신은 일본은 섬이니 일본의 수군이 강할 것이라고 예단해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대하여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아니 되옵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의 감독아래에 있던 전라좌수영은 20여 척(최소 26척 최대 29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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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 == 본 문서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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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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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8%9C%EC%8B%A0|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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