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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분류:한성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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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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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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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한성 또는 한양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수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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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 상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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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1392년 [[조선]]이 개국하면서 [[이성계]]는 풍수 도참설에 따라 1394년 조선의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였다. 3년 후에 [[경복궁]]을 짓고 창덕궁을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었다. 이 당시 한성부의 영역은 성곽의 사대문(동서남북 방향)과 성곽 외부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데, 즉 현재의 [[서울|서울시]]의 강북지역 대부분이 포함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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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성곽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유교의 오상 인의예지신 이념을 구체화하여 성문을 건축하였다. 즉 중앙은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보신각을 세우고, 동쪽에는 흥인문(보물), 서쪽에는 돈의문, 남쪽에는 숭례문(국보), 북쪽에는 숙청문을 세웠다. 북쪽은 본래 소지문으로 하려 했으나 최종 낙점은 숙청문(현재 숙정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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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변란을 거치면서 경복궁 등이 파괴되었다가 고종 대에 이르러 흥선 대원군의 명으로 다시 복구되었다. 고종은 1896년 환구단을 지어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으며 덕수궁을 중심으로 도시의 축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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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 하부 행정구역은 오부와 방과 계·동으로 구성되었다. 15세기 초 인구는 10만 명 정도였다. 오늘날 서울의 중심 업무 지구 (도심)를 차지하였으며 바깥에는 성저십리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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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 천도 배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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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1392년에 개경(개성)에서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의 면목과 인심을 새롭게 할 목적으로 도읍지를 옮기기로 결심을 하였다. 수도를 옮기는 것을 결정하는 데에는 군주인 이성계의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태조는 한시라도 빨리 옛 왕조로부터 벗어나고 새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새 왕조가 하늘의 명을 받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정당하게 세워졌음을 세상에 널리 강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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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태조가 천도를 한 이유로는 기존 세력의 근거지인 개경에 대한 정치적 불안과 심리적 갈등, 그리고 풍수 지리설의 영향, 민심의 쇄신 등을 들 수 있다. 새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무학국사와 하륜(河崙) 등 여러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1393년에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였다. 1394년 11월 21일(음력 10월 28일)에 한양으로 천도를 하였는데, 한양은 한수(漢水, 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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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 천도의 기준은 풍수·도참설에 따르면서, 남쪽에 한강이 있어 교통상 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기가 편리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6] 유학자들은 이러한 논거에 반대하였으나 이성계의 의지가 굳건했기 때문에 천도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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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한편 풍수·도참설에 능했던 하륜은 오늘날 안산이라 불리는 무악 일대를 명당이라고 보아 이곳으로의 천도를 주장했는데, 이로 인해 수도의 위치에 대해 크게 논의가 일기도 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성계는 다음과 같은 논거로 수도의 입지를 직접 정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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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 따라서 풍수·도참설에 기반한 논의가 국왕의 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왕사 자초(무학)가 인왕산에서 출발한 축을 따라 하여 도읍의 터를 잡자고 주장했다는 설은 야사로 16세기 말~17세기 초에 간행된 오산설림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다. 실록에는 전혀 전하지 않는 이야기로, 신뢰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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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1395년(태조 4년) 6월 6일에 한양부의 명칭을 한성부로 고쳤으며, 그와 동시에 한양 천도 당시에 궁궐과 관청이 세워진 지역에 살던 백성들을 견주로 옮기고 양주라 고친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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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 == 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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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 조선 시대의 한성부의 구역은 오늘날의 서울보다 훨씬 협소하였다. 동쪽은 낙타산, 서쪽은 인왕산, 남쪽은 목멱산, 북쪽은 백악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그 터전으로서, 성 밖의 일부 지역도 관할하였지만, 조선 건국 당시에는 원칙적으로 성 안의 구역만을 ‘한양’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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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그러나 도성 안에 거주하는 인구가 점차 증가하여, 성내에 모든 인구를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즈음부터 성곽으로부터 십 리 바깥까지의 지역을 ‘성저십리’라 칭하게 되었으며, 성저십리로의 인구 이동도 일어났다. 결국 1461년 2월 27일 성저십리는 공식적으로 한성부에 속하게 되어, 한성부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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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 본 문서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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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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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84%B1%EB%B6%80|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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