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 vs r2
1
{{정치인 정보
2
|이름 = 김단야
3
|원래 이름 = 金丹冶
4
|출생일 = [[1899년]] [[1월 16일]]
5
|출생지 = {{국기나라|대한제국}} [[경상북도]] [[김천시|김천]]
6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38|2|13|1899|1|16}}
7
|사망지 = {{국기나라|소련}} [[모스크바]]에서 처형(총살형)됨.
8
|경력 = 고려공산당 당무위원
9
|국적 = {{국기나라|대한제국}}
10
|학력 =
11
|직업 = 정치인, 언론인, [[독립운동가]]
12
|종교 = [[무신론]]<ref>공산주의 사상에 의한 무신론</ref>
13
|배우자 = 이상분
14
|자녀 = 1남 1녀
15
|정당 = [[무소속]]
16
|웹사이트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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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야'''(金丹冶, [[1899년]] [[1월 16일]]<ref>김단야가 태어난 해가 [[1899년]]이라는 설과 [[1900년]]이라는 설이 있지만,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1901년]] [[1월 16일]]로 기록되어 있다.</ref> ~ [[1938년]] [[2월 13일]])는 [[한말]]의 [[독립운동가]]이며, [[일제 강점기]] 해외에서 주로 활동했던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언론인이다. 1920년대 [[박헌영]],[[임원근]]과 더불어 '''삼인당'''(三人黨)이라고 불리면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복권되었다. 본명은 '''김태연'''(金泰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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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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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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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야는 [[1899년]] [[1월 16일]] [[경상북도]] [[김천시|김천]]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대에 대한 것은 [[1899년]]생 설과 [[1900년]], [[1901년]]생 설이 각각 존재한다. 한편 러시아 측 자료에 의하면 그는 [[1901년]]생이라 한다. 그의 가계에 대한 것은 알려진 바 없고, 다만 아버지가 한때 한의사로 가세를 일으켰다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의사였지만 [[1910년]] [[경술국치|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뒤]]부터 한의사 자격을 빼앗겨 농민이 되었다고 한다. 김단야는 예닐곱 살에 서당에서 2년 동안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1914년]] 보통학교를 마칠 때까지 여느 아이와 다름없는 평범한 생활을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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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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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 투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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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개신교]]([[장로교]])학교인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면서 조금씩 새로운 의식에 눈뜨며 ‘식민지 아들’로서 ‘이유 있는 저항’을 시작했다. 그는 [[장로교]] [[선교사]]였던 미국인 교장과 일삼아 조선학생을 때리던 일본 선생의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에 앞장섰다가 [[1916년]] 12월 퇴학 당했다.<ref>[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8782 붉은 광장에 떨어진 붉은 꽃, 김단야]</ref> 개신교 신자들이었던 [[가족]]들은 [[개신교]] [[선교사]]를 반대하는 동맹휴학으로 김단야가 제적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학비를 대주었던 가족들은 앞으로 학비를 대주지 않겠다고 딱잘라 말했다고 한다. 이에 김단야는 [[1917년]] 1월, 어머니한테만 살짝 귀띔하여 조그만 여비를 받아 들고 일본 [[도쿄]]로 떠났다. [[도쿄]]의 세이고쿠(正則) 영어학교 다니면서 야간 수업료를 마련하려고 우유배달부, 신문팔이, 사탕팔이 등을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1917년]] 8월 아버지로부터 '학비를 지원해줄테니 돌아오라.'는 편지를 받아 김단야는 곧 조선으로 돌아왔고, 그 해 9월에 경성부의 배재학교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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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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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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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학생 운동에 뜻을 두면서 배재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가하였고 3월말 고향 경북 김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 김천지회에서 태형 90대를 언도 받았다. 그 뒤 비밀결사 ‘적성단(赤星團)’ 활동을 했으며 경찰의 추적을 피해 12월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 망명하면서 거기서 [[박헌영]]과 [[임원근]]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은 '''삼인당'''(三人黨)이라 불리면서 같이 활동하게 된다. 상하이 활동 무대를 옮긴 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화요파 트로이카', '화요 3인조'로 불리던 [[박헌영]], [[임원근]]과는 고려공산청년회와 [[화요회]], [[신흥청년동맹]]에서 함께 활동한, 가까운 동지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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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원동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을 때, 이정 [[박헌영]], 몽양 [[여운형]], [[김규식 (1881년)|김규식]], [[이동휘]] 등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였다. [[여운형]], [[김규식 (1881년)|김규식]], [[박헌영]] 등과 [[몽골]]까지 [[자동차]]로, [[몽골]]에서는 [[마차]]와 [[열차]]로 [[소비에트 연방]]의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이 대회가 끝나고 2월 20일 그의 삶에 가장 감명을 준 레닌과 회견하게 된다. 그는‘극동청년대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 17명과 함께 레닌을 만났고, 이 짧은 만남은 그가 사회주의 사상을 확고히 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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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와 상하이, 국내를 오가면서 활동했는데 1922년 4월에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국내로 옮기려고 입국하다가 [[박헌영]], [[임원근]]과 함께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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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기자 재직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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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월 출옥하여 고향 경북 김천에서 요양하다가 [[조선일보]] 기자로 취직했다. [[조선일보]]에 '레닌 회견인상기' 기사등을 싣는 등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비밀리에 ‘[[화요파]]’에 가담하여 활발하게 사회운동을 했다. 여러 활동 가운데 그가 힘을 쏟은 것은 [[1925년]] [[4월 18일]]에 닻을 올린 ‘[[고려공산청년회]]’였다. 이 공청에서 박헌영은 책임비서였고 김단야는 ‘조사부’를 맡았으며, [[주세죽]]은 ‘후보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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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야는 조선일보 기자 재직하면서 기사 글쓰는 솜씨는 뛰어난데다 밝은 성격에 재치가 넘쳐 동료 기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퇴근 후 동료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ref name="조선일보 기자생활">《박헌영 평전》,안재성 저. 실천문학사. p104~10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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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25년]] 9월 초, [[서울청년회]] 계열 출신으로 [[조선일보]] 논설위원 활동하는 [[신일용]](辛日鎔)이 '필화 사건'을 일으켜 [[조선총독부]] 당국이 [[조선일보]]사에 압력을 넣게 되면서 조선일보는 [[9월 8일]]자로 정간되었고 윤전기까지 압수되었다. 윤전기를 쥔 총독부는 [[진보]]적인 신문기자들을 해고시키지 않으면 신문을 내지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조선총독부]]의 진보적인 신문기자들에 대한 [[해고]]압력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선것은 조선일보내 [[보수]]적인 기자들이었다. 보수적인 기자들은 사회주의 단체인 [[북풍회]] 소속 기자들과 연대해 총독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싸우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보적 성향의 [[홍증식]]기자를 중심으로 한 [[화요회]]계열 기자들은 총독부의 요구를 수용하게 된다.<ref><박헌영 평전>,안재성 지음. 실천문학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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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 [[조선일보]]는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17명의 기자를 해직시켰는데, 이 가운데 김단야를 포함해서 동료인 [[박헌영]],[[임원근]]도 해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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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 만세운동 활동과 1930년대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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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29년 박헌영.jpg|섬네일|오른쪽|360픽셀|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김단야,[[박헌영]],[[양명]]이 나란히 앉아 있다.<ref>{{웹 인용 |url=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1529 |제목=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확인날짜=2011-05-27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130151206/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1529 |보존날짜=2012-01-30 |url-status=dead }}</ref>,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첫번째가 [[주세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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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0월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뒤 ‘[[신의주 사건|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동양비서부와 연락하기 위해서 1925년 12월에 두 번째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로 망명한 김단야는 [[1926년]] 1월부터 7월까지 조선공산당 기관지 <불꽃(火花)> 주필이 되었다. 또한 조선공산당 ‘해외부’ 설립에 참여했으며 국내 공산당의 재정을 조달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벌였다. 상하이에서 기관지《[[콤뮤니스트]]》를 발행했고 국내에서 [[1926년]] 4월, [[대한제국 순종|순종]] 사망소식을 듣고 격문을 만들어 국내로 보내면서 [[6·10 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하였고 노동자 파업 운동을 주동했다. [[1929년]]에는 모스크바에서는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두원]]등과 함께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근거하여 당재건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고, 같이 국내로 들어왔다. 11월 [[박민영 (독립운동가)|박민영]]·[[권오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직부를 담당했다. 그러나 [[1930년]] 2월 일제 경찰의 검거령이 내려지자, 검거망을 피해 국내를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가 9월에 중국 [[상하이]]로 활동무대 옮기면서 잡지《콤뮤니스트》를 발간하면서 반제국주의 운동 활동을 하였다. 이듬해 1932년, 일제 밀정으로부터 밀고받은 일제 경찰에 검거령이 내려졌다. [[상하이]]에서 같이 활동하던 동료 [[박헌영]]은 끝내 일제 경찰에 잡혔고 그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김단야와 [[주세죽]]은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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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김단야는 주세죽과 [[소련]]으로 망명하였고, [[1934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 해 김단야는 동지인 박헌영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박헌영이 죽은 줄로만 알던 박현영의 부인 [[주세죽]]에게 박헌영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주세죽과 세 번째로 결혼했다. 김단야에게는 고향에 본처가 있었고 두 번째 부인은 같은 운동가였던 [[고명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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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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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에 접어들면서 김단야는 당재건운동에 뛰어들 기회를 다시 맞게 되는데 [[코민테른]]이 김단야를 조선에 파견하여 ‘당사업’에 나서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무렵 갑자기 [[소련]] 정보기관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자료에 따르면 당사업을 위해 그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 아니다” 라고 김단야에게 통보한다. 그리고 [[1937년]] [[11월 5일]], 소련 내무인민부는 김단야를 느닷없이 체포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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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간첩'이라고 소련 정보기관에 투서한 인물은 '김춘성'이란 가명의 조선인이었다. 김춘성은 조선공산당 간부 [[김철수 (1893년)|김철수]]가 만든 조선공산당 제3차 집행부의 일원이던 제주도 출신 이성태라고 추측되고 있다. 그 투서에는 김단야뿐만 아닌 [[박헌영]],[[조봉암]], [[김찬 (1894년)|김찬]], [[김한 (1888년)|김한]] 등 당대 공산주의 최고 지도자들이 모조리 일제의 간첩이라고 매도당했었던 때였다.<ref><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실천문학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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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련 정보기관에 체포당한 김단야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내몰렸다. 이어 변호사도 반론권도 없이 소련 최고 인민 재판소 군사법정에서 재판이 진행되었고, 소련 인민재판소는 김단야에게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폭동과 반혁명테러활동을 목적으로 한 조직의 지도자로서 1급 범죄자”라는 판결을 내렸다. 김단야는 어떤 변호도 받지 못한 채 이듬해 1938년 2월 13일에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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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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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국가보훈처에 의해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음으로서 독립운동가로 인정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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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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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몸매에 큰 키의 체격이었다고 한다. 성격도 사교성이 풍부해 외향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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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66
* [[6·10 만세운동]]
67
* [[조선공산당]]
68
* [[고려공청]]
69
* [[조선일보]]
70
* [[박헌영]]
71
* [[주세죽]]
72
* [[임원근]]
73
* [[고명자]]
74
* [[김약수]]
75
76
== 각주 ==
77
<references/>
78
79
== 참고자료 ==
80
* {{독립유공자|10089|김태연}}
81
* 《해방》 [https://web.archive.org/web/20070828203414/http://hb.jinbo.net/view.php?ho=&cat=series&pg=1&no=218 김단야(金丹冶), 기억 저 편에서 드높고 허망한] (제2호)
82
* {{서적 인용
83
|저자=임경석
84
|제목=이정 박헌영 일대기
85
|판=
86
|날짜=2004-04-15
87
|출판사=역사비평사
88
|출판위치=서울
89
|ISBN=8976968018}}
90
* {{서적 인용
91
|저자=안재성
92
|제목=박헌영 평전
93
|판=
94
|날짜=2009-08-20
95
|출판사=실천문학사
96
|출판위치=서울
97
|ISBN=9788939206205}}
98
*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8782 붉은 광장에 떨어진 붉은 꽃, 김단야]
99
* <<진보평론 제4호>>, 2000년 여름.
100
101
[[분류:1899년 태어남]]
102
[[분류:1938년 죽음]]
103
[[분류:사형된 한국 사람]]
104
[[분류:반기독교주의자]]
105
[[분류:한국의 공산주의자]]
106
[[분류:한국의 사회주의자]]
107
[[분류:조선공산당]]
108
[[분류:한국의 무신론자]]
109
[[분류:일제 강점기의 정치인]]
110
[[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111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112
[[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13
[[분류:경성 코뮤니스트 그룹]]
114
[[분류:고려공산청년회]]
115
[[분류:6·10 만세운동]]
116
[[분류: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117
[[분류:한국의 극동인민대표회의 참석자]]
118
[[분류:삼인당]]
119
[[분류:박헌영]]
120
[[분류:국제레닌학교 동문]]
121
[[분류:동방노력자공산대학]]
122
[[분류:김천시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