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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1 vs 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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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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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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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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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김대중]]과 관련된 논란 및 비판, 사건사고를 다룬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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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위적 정계 개편 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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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전 김대중은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후보와 단일화를 이뤄냈고, 그가 당선됨에 따라 자유민주연합은 국민회의와 더불어 여당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원내 1당은 한나라당이었고, 당시 공동여당의 의석수는 이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자 김대중은 소수여당으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단행하였다. 우선 1997년 15대 대선에서 3위로 낙선하고 이듬해 열린 1998년 제2회 지방선거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던 이인제의 국민신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검찰을 동원하여 한나라당에 대한 전방위적인 사정을 단행하여 그곳의 의원들을 빼앗는 방법 등을 써 국회 과반의석수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자 일부 의원들은 자발적으로 권력을 좇아 당적을 변경하는 철새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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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조제 하무스 오르타가 로비설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라고 하더라고 전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서 "국가적으로 환영하고 축하해야 할 일을 노벨상 반납까지 운운하며 로비설을 흘리는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라고 지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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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역 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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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에 20대를 보냈기 때문에 군 복무를 하지 않은 것이 크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6·25 전쟁]] 동안 군 복무를 기피했다는 신한국당 측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김대중은 TV 토론회에서 출연하여, 6·25전쟁 당시 병역법에 따르면 1930년생부터 징병이 됐기 때문에, 1924년생인 자신은 소집영장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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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에 20대를 보냈기 때문에 군 복무를 하지 않은 것이 크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6.25 전쟁]] 동안 군 복무를 기피했다는 신한국당 측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김대중은 TV 토론회에서 출연하여, 6·25전쟁 당시 병역법에 따르면 1930년생부터 징병이 됐기 때문에, 1924년생인 자신은 소집영장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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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해군 경비대 소속 목포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부대장을 맡아 당시 자신의 해운회사에서 보유하고 있던 선박을 동원해 참전했다고 증언했다.[363] 그러나 신한국당은 목포해상방위대가 유령 군부대라고 주장했고, 국민회의 측에선 해상방위대는 1950년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와 국방군사연구소에서 발행한 국방사연표에 분명히 근거가 있다고 반박하는 등 양측의 공방이 이어졌다.[364] 이후 국민회의 천용택 의원이 미국에 거주중인 해병대 예비역 준장 송인명을 만나 그의 증언록과 직접 쓴 증명서 등을 가져와 공개하고,[365] 송인명은 전 목포경비부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 군과 경찰만으로 공산세력의 잔당소탕과 안녕질서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목포시내 청년단과 여성청년단 등 애국단체들을 모두 동원해 작전을 보조하게 하였으며, 특히 해상작전이 중요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당시 지역유지 오재균에게 지시, 해상방위대를 창설해 김대중에게 부대장을 맡겼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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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고가 났던 트럭은 범한화물 소속으로, 범한화물은 당시 공화당 전국구의원 후보였던 홍승만의 아들 홍국태의 소유였다. 사고를 냈던 트럭 운전사 권모씨는 1985년, 1998년의 취재기사를 통해 생존하여 부산에서 버스 운전사로 일하다 재혼하여 야간 경비직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는 당시 교통사고는 김대중이 타고 있던 차량이 교통법규를 어겨 발생한 사고라고 증언했다. 마지막으로 사건의 담당검사인 허경만은 중간에 교체되는 일 없이 당시의 사고 수사를 종결될 때까지 담당했으며 본인도 당시 수사에 어떠한 외압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허경만은 1980년에 김대중 변호인단에 합류, 야당 국회의원을 역임하다 1999년엔 전남도지사에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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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통사고 이후 김대중은 절름발이가 되었는데 사고로 어느쪽 다리가 잘못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떤 때 보면 오른쪽 다리를 절다가 다른 상황에서는 왼쪽 다리를 저는 등 사진이 찍힐 때마다 다르게 보인 적이 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이 정확히 어느쪽 다리가 잘못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는데 아무도 답변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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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제폭발물 사건 관련 의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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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두고 후보자 유세가 한창이던 1971년 1월 27일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 마당에서 사제 폭발물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이 폭발물 잔해를 분석한 결과 완구용 딱총 화약을 담배갑 은박지로 싸서 도화선을 연결해 제작한 사제 폭발물로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테러가 발생한 것으로 받아들인 야당의 분위기는 급속히 얼어붙었고 국회는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 그리고 사건 발생 14일째인 2월 10일, 경찰은 가정부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김대중의 조카인 당시 15세의 김홍준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총포화약류 단속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김홍준은 처음엔 명절을 맞이해 장난으로 꾸민 일이라며 범행을 자백했으나 구속 하루만인 2월 11일엔 범행 사실을 부인하며 감기몸살을 호소해 입원하게 된다. 경찰 역시 폭발물을 감싼 담배갑 은박지가 청소년이 구하기 힘든 영국제 로스만스에서 나온 것이고 도화선은 군수품이라는 이유로 김홍준의 우발적인 장난이 아닌 배후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김홍준은 15일 법원의 구속적부심 결과 검찰의 구속 소명 자료 미흡을 이유로 석방되었다. 하루 뒤인 16일 경찰이 동교동에서 배출된 쓰레기가 집하된 구로동 오물처리장에서 로스만스 담배갑을 발견하긴 했으나, 이 오물처리장이 마포구 내 17개동 33만여 주민의 쓰레기를 가져다 땅을 메우는 곳이고 사건 전후에 배출된 동교동 42가구의 쓰레기는 다섯 군데가 넘는 곳에 40여차례에 걸쳐 나눠서 버려졌기 때문에 찾아낸 담배갑이 폭발물에 쓰인 담배갑이라고 할만한 근거가 없었다. 이 사건은 결국 미제로 남게 되었는데, 당시 유세 기간동안 김대중 후보를 비롯한 신민당 측에선 정일형 선거대책본부장 집 화재사건과 김상현 의원 집에 협박편지가 배달된 사건과 더불어 명백한 박정희 정권의 정치테러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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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고생 성매매·억대 수수 77세 처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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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처남 이상호(77세)는 서울 C호텔에서 여모(17)양과 두차례 성관계를 가진 원조교제 후 200여만원을 건넸으며, 2002년 “내게 돈을 주면 정부보조금을 받도록 해주겠다”고 속여 경남 합천 해인사로부터 로비자금 용도로 1억원을 받는 등 각종 청탁의 해결 명목으로 총 1억8000만원을 수수했다. 2004년 2월 서울중앙지법원 형사합의23부는 구속 기소된 이상호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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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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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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