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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인위적 정계 개편 논란[편집]
대선 전 김대중은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후보와 단일화를 이뤄냈고, 그가 당선됨에 따라 자유민주연합은 국민회의와 더불어 여당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원내 1당은 한나라당이었고, 당시 공동여당의 의석수는 이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자 김대중은 소수여당으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단행하였다. 우선 1997년 15대 대선에서 3위로 낙선하고 이듬해 열린 1998년 제2회 지방선거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던 이인제의 국민신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검찰을 동원하여 한나라당에 대한 전방위적인 사정을 단행하여 그곳의 의원들을 빼앗는 방법 등을 써 국회 과반의석수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자 일부 의원들은 자발적으로 권력을 좇아 당적을 변경하는 철새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6대 총선에서 또다시 한나라당이 1당을 차지하였으며, 공동여당은 또다시 이에 밀리고 말았다. 그러자 김대중은 2000년 12월,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유성구의 국회의원 송석찬을 앞세워 ‘의원 꿔주기’를 주도했다. 그리하여 장재식, 송영진, 배기선이 공동여당에 입당한다. 이러한 행동은 "의회 민주주의 왜곡" 등의 비난을 받았고, 임기 말에는 공동여당 공조가 파기되고 말았다.
그러나 16대 총선에서 또다시 한나라당이 1당을 차지하였으며, 공동여당은 또다시 이에 밀리고 말았다. 그러자 김대중은 2000년 12월,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유성구의 국회의원 송석찬을 앞세워 ‘의원 꿔주기’를 주도했다. 그리하여 장재식, 송영진, 배기선이 공동여당에 입당한다. 이러한 행동은 "의회 민주주의 왜곡" 등의 비난을 받았고, 임기 말에는 공동여당 공조가 파기되고 말았다.
3. 경제 정책[편집]
국민의 정부가 외환 위기에 대처한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다. 전경련같은 재계단체에서는 대기업을 억제하는 정책으로 인해, 높은 성장률을 만들 동력을 약화시켰다는 주장도 한다. 현대와의 비리와 현대봐주기와 같은 친현대정책으로 " 현대공화국이 아니냐 "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경제활성화를 위한 부동산 규제 완화와 카드 무규제가 카드대란과 부동산투기과열을 야기해 비판을 받기도 한다.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 철폐와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 등 IMF사태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은 금융시장의 대외 종속화와 중산층 붕괴 등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나오는 등 평가가 엇갈린다.
4. 과거사 청산 관련[편집]
진보진영에서는 자신에 대한 반대 세력의 악의적인 색깔론 공세로 인해 이를 의식해 구 군사정권 잔재의 청산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종필과의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한 후보단일화 뒤 경북 구미시 유세에서 "내가 대통령이 되면 김종필씨와 손을 잡고 박정희기념관을 건립하겠다"라는 공약을 내세웠고, 대통령 취임 이 후에는 김중권, 이상주 이종찬 등의 제5공화국 핵심인사들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중용함으로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역사청산에 소홀했다"라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5. 지역 감정 조장 논란[편집]
1969년 당시 신민당과 3선 개헌 반대 범투위 소속으로 유세에 참여한 김대중은 다른 연사들과 더불어 "영남 지방은 고속도로까지 개설해주는 정부가 호남선은 복선마저 제대로 않고 푸대접하고 있다."며 경상도 정권 타도를 주장한 바 있다.[314] 여기에 1987년 야권 후보 단일화 합의를 깨고 통일민주당을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것도 지역감정에 기댄 정치적 행보라는 비판이 있다. 당시 단일화 합의를 했던 김영삼은 "지역 감정의 원인은 김대중이 제공했다"라고 최근까지도 주장하고 있다. 또한 87년 대선에 평화민주당 김대중은 4자 필승론을 주장하며 대선에 출마하였는데 이는 노태우(TK 대구경북), 김영삼(PK 부산경남), 김종필(충청), 김대중(호남)이 각자 그 지역을 가져가면 수도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후보인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대선 결과 수도권에서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김대중 후보가 3위를 차지하였고 전국 투표수에서도 3위를 차지하여 4자 필승론은 무위로 끝났다.
정치학계 일각에서는 근대 이전의 전통 사회에선 지역주의란 존재하지 않았으나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 후보의 출신지가 호남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지역 감정을 부추겼다고 한다. 1971년 대선에서는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는 식의 흑색 선전이 영남 지역에 나돌았다.[319] 1992년 대선을 앞둔 12월 11일 오전 7시 부산 초원복집에서 부산 지역 유지들이 모여서 민주자유당 후보였던 김영삼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김대중 등 야당 후보들을 비방하는 내용을 유포시키자는 등 관권 선거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정치학계 일각에서는 근대 이전의 전통 사회에선 지역주의란 존재하지 않았으나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 후보의 출신지가 호남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지역 감정을 부추겼다고 한다. 1971년 대선에서는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는 식의 흑색 선전이 영남 지역에 나돌았다.[319] 1992년 대선을 앞둔 12월 11일 오전 7시 부산 초원복집에서 부산 지역 유지들이 모여서 민주자유당 후보였던 김영삼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김대중 등 야당 후보들을 비방하는 내용을 유포시키자는 등 관권 선거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6. 1992년 대선 당시 후보연설에서 유권자에 대한 비판[편집]
1992년 대선에서 여당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 맞선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는 농촌 유권자의 친 여당 성향을 비판하며 유권자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그의 발언에 수긍하지 않는 청중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김대중은 "민주당은 13대 국회에서 수세·농지세 감면, 농어가 부채의 상환연기, 농·수·축협 조합장 직선제 도입 등 농민을 위해 일한 유일한 정당"이라면서 "3백64일 야당하다가 선거날에만 여당하는 농촌 유권자들은 이제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30여년간의 군정 기간중 가장 많은 차별과 천대를 받은 계층이 바로 여러분 농민들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뭐가 좋다고 선거때만 되면 여당을 찍고 선거가 끝나면 후회를 하곤 합니까"라고 주장했다. 이미 30년전인 1992년 대선때부터 계급배반투표의 논리가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7. 사생아 존재 여부에 대한 의혹[편집]
2005년 4월 19일, SBS의 시사 프로그램인 '뉴스추적'은 김대중의 '숨겨진 딸'이라고 주장하는 30대 여성에 대해 특종 보도했다. 이 여성은 제작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어머니는 '대하'라는 고급 한정식 집에서 당시 김대중 신민당 국회의원을 처음 만났다"며 "자신은 7-8세 무렵부터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김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를 찾아가 생활비를 타오곤 했으며 조풍언을 통해 아파트를 받았다"라고 증언했다. 또한 제작진은 진승현 게이트도 이 여성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를 제기하며 진승현 측근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국정원 일부 관계자들이 대통령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이른바 '특수사업'을 진행하면서 진승현씨에게 3억 5,000만원을 받았으며, 이 돈의 전액이 김 전 대통령의 딸과 그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모녀의 입을 막기 위해 김씨 모녀에게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제작진은 끝으로 "특수 사업에 사용됐다는 돈이 김씨에게 전달된 구체적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며 "검찰이 이 사건을 원점에서 재수사할 것을 촉구한다"라고 밝혔다. 2001년 진승현 게이트를 수사했던 검찰 관계자는 "당시 국정원의 정성홍씨는 진씨로부터 '현금'을 받았는데 무슨 계좌추적이 필요하느냐"며 "당시 정씨는 돈을 부 운영비 등으로 썼다고 진술했다"라고 말했다. 국정원 측은 예산 항목에 특수사업이라는 항목 자체가 없으며 정 전 과장 등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부인했다. 어떻게 독재 정권하에 감춰질 수 있었냐는 의문에 대해서도 당시 중앙정보부 관련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의 사생활 관련 보고를 하면 '남자의 아랫도리 부분은 말하지마'라며 일축했다. 이후 대통령들도 이상하게 그런 문제에 대해 관대했다"라고 설명했다.
제작진은 끝으로 "특수 사업에 사용됐다는 돈이 김씨에게 전달된 구체적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며 "검찰이 이 사건을 원점에서 재수사할 것을 촉구한다"라고 밝혔다. 2001년 진승현 게이트를 수사했던 검찰 관계자는 "당시 국정원의 정성홍씨는 진씨로부터 '현금'을 받았는데 무슨 계좌추적이 필요하느냐"며 "당시 정씨는 돈을 부 운영비 등으로 썼다고 진술했다"라고 말했다. 국정원 측은 예산 항목에 특수사업이라는 항목 자체가 없으며 정 전 과장 등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부인했다. 어떻게 독재 정권하에 감춰질 수 있었냐는 의문에 대해서도 당시 중앙정보부 관련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의 사생활 관련 보고를 하면 '남자의 아랫도리 부분은 말하지마'라며 일축했다. 이후 대통령들도 이상하게 그런 문제에 대해 관대했다"라고 설명했다.
8. 비자금 의혹[편집]
1995년 노태우의 비자금이 폭로되자 김대중에게도 의혹의 눈길이 쏠렸다. 그때 그는 국민회의 총재의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하던 중이었다. 기자들과 만난 "귀국 후에 밝히려 했으나 언론에 터무니없는 일이 자꾸 보도돼 어쩔 수 없었다. 또 연희동 측이나 여권이 화살을 나에게 돌리려 해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며 노태우에게 20억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분명히 20억 원 외에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 했으나 아무 조건도 없으니 받으라고 했다"라고 밝혔다.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김대중이 노태우의 돈 20억원을 받았다고 먼저 발표했으나, 지금까지도 금액이 20억인지 200억인지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은 이와 관련 "김영삼 대통령 먼저 자신과 관련한 모든 정치자금 의혹을 명백히 밝혀야만 한다"며 "나는 20억 원을 받았지만 김대통령은 당시 노씨는 물론 각계로부터 엄청난 돈을 지원받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여권과 일부 언론에서는 초점을 나에게 맞추고 김 대통령의 대선자금문제를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권의 강삼재 등은 '20억+알파'를 밝히라고 요구하며 추가 수뢰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검찰은 '20억+알파'설도 김대중의 관련성은 부인했다.
진로그룹 전 회장인 장진호는 2013년 월간조선의 박희석 기자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80년대 5공화국 시절 자신이 “전두환-김대중 간 거래의 보증인 역할을 하면서 10여 년간 주식과 정치자금을 DJ에게 전달했다”며 “규모는 500억~600억원”이라고 주장했다. 거래가 성사된 배경에 대해서는 "전두환 정권은 5공 초창기에 DJ를 사형시키려고 했지만 미국의 반대로 실패했기 때문에, DJ가 정치활동을 재개할 경우 광주 등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DJ의 발목을 잡을 장치가 필요했고, DJ도 살려면 모르는 척 잡혀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라고 설명했다. 장진호가 밝힌 바에 따르면 거래의 내용은 진로가 보유한 회사 주식의 절반을 담보로 제공하고 매년 일정액의 정치 자금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논의는 김대중이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인 1982년부터 시작됐고 주식과 돈이 전달되기 시작한 시점은 1984년으로, 정치 자금의 전달은 정계 입문을 희망하던 당시 상아탑학원 원장 임춘원이 담당하여 1992년까지 전달이 되었다고 한다. 김대중이 거래 내용을 인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임춘원이 "DJ와 의논하고 합의해서 진행하는 일이며, DJ가 너무 많이 요구해서 힘들지만, 내 선에서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라는 언질을 받았고 임춘원이 주선하여 우연을 가장해 조우하는 형식으로 김대중과 만났으며 이때 김대중은 '고맙다'며 사의를 표했다고 밝혔다. 김대중에게 정치 자금이 제공됐는지 확인했냐는 질문엔 "임춘원이 당시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지만 비자금 제공을 담당한 후 거액의 공천 헌금을 내고 전국구 2번을 받았다"라고 주장하며 간접적으로나마 확인을 거쳤다는 답변을 했다. 이 거래의 대가로 장진호는 5공화국 동안 진로의 경영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동교기업·한림장학회 진로 주식 인수 검토안’에 따르면 당시 진로는 비계열사 우전석유, 우신공영, 개인 명의 등을 통해 동교기업과 한림장학회 보유 지분을 매입한 뒤 최종적으로 진로문화재단에 출연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인터뷰를 한 박희석 기자는 장진호에 대해 갑자기 김대중 비자금에 대해 밝히겠다는 이유가 탐탁지 않았고, '과거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장진호는 호감이 가는 인물이 아니었다'라고 평가했다. 장진호는 당시 야당이었던 김대중에게는 이정도로 전달했지만 노태우에게는 100억, 김영삼에게는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회창에게도 지급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회창의 동생이 관련된 '세풍 사건'에 1억원, 이회창의 지지율을 올리기 위한 '총풍 사건'에 공작금 7천만원을 지급한 것으로 밝혀졌다.
진로그룹 전 회장인 장진호는 2013년 월간조선의 박희석 기자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80년대 5공화국 시절 자신이 “전두환-김대중 간 거래의 보증인 역할을 하면서 10여 년간 주식과 정치자금을 DJ에게 전달했다”며 “규모는 500억~600억원”이라고 주장했다. 거래가 성사된 배경에 대해서는 "전두환 정권은 5공 초창기에 DJ를 사형시키려고 했지만 미국의 반대로 실패했기 때문에, DJ가 정치활동을 재개할 경우 광주 등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DJ의 발목을 잡을 장치가 필요했고, DJ도 살려면 모르는 척 잡혀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라고 설명했다. 장진호가 밝힌 바에 따르면 거래의 내용은 진로가 보유한 회사 주식의 절반을 담보로 제공하고 매년 일정액의 정치 자금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논의는 김대중이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인 1982년부터 시작됐고 주식과 돈이 전달되기 시작한 시점은 1984년으로, 정치 자금의 전달은 정계 입문을 희망하던 당시 상아탑학원 원장 임춘원이 담당하여 1992년까지 전달이 되었다고 한다. 김대중이 거래 내용을 인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임춘원이 "DJ와 의논하고 합의해서 진행하는 일이며, DJ가 너무 많이 요구해서 힘들지만, 내 선에서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라는 언질을 받았고 임춘원이 주선하여 우연을 가장해 조우하는 형식으로 김대중과 만났으며 이때 김대중은 '고맙다'며 사의를 표했다고 밝혔다. 김대중에게 정치 자금이 제공됐는지 확인했냐는 질문엔 "임춘원이 당시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지만 비자금 제공을 담당한 후 거액의 공천 헌금을 내고 전국구 2번을 받았다"라고 주장하며 간접적으로나마 확인을 거쳤다는 답변을 했다. 이 거래의 대가로 장진호는 5공화국 동안 진로의 경영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동교기업·한림장학회 진로 주식 인수 검토안’에 따르면 당시 진로는 비계열사 우전석유, 우신공영, 개인 명의 등을 통해 동교기업과 한림장학회 보유 지분을 매입한 뒤 최종적으로 진로문화재단에 출연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인터뷰를 한 박희석 기자는 장진호에 대해 갑자기 김대중 비자금에 대해 밝히겠다는 이유가 탐탁지 않았고, '과거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장진호는 호감이 가는 인물이 아니었다'라고 평가했다. 장진호는 당시 야당이었던 김대중에게는 이정도로 전달했지만 노태우에게는 100억, 김영삼에게는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회창에게도 지급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회창의 동생이 관련된 '세풍 사건'에 1억원, 이회창의 지지율을 올리기 위한 '총풍 사건'에 공작금 7천만원을 지급한 것으로 밝혀졌다.
9. 성씨에 대한 논란[편집]
김대중의 성씨가 김씨가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김대중의 성씨에 대한 논란은 1980년 5월 9일 경주에서 열린 김유신 장군 추모제 금산대제(金山大祭)에서 '김대중은 가짜 김해 김씨이며 본명이 윤대중이다'라는 벽보가 붙으면서 시작되었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김대중씨는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성씨나 찾도록 하라"라는 발언을 하는 등 김대중의 성씨에 대한 비화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 김대중 가계에 대한 내막은 이후 김대중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겠다는 일념하에 김대중의 가계 조사를 시작한 손창식의 증언과 제6공화국 시절 안기부가 작성한 김대중 조사 자료 비밀 문건, 재미 언론인 손충무가 공개한 김대중의 호적등본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손창식은 김대중의 본래 성씨가 제갈(諸葛)씨라고 주장했는데, 이같은 내용은 1997년 대선 당시 손창식이 편집인으로 지내던 《한길소식》에 보도되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였던 김대중 측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손창식은 항소를 포기하였다.
한편 안기부 비밀 문건에선 마을 주민들이 김대중의 실제 아버지가 윤(尹)모 씨라고 증언한 것을 들며 출생 혈통이 불분명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31] 재미 언론인 손충무는 2009년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던 인사이드 월드를 통해 김대중의 호적등본을 공개하여 1924년에 김대중이 김운식의 서자로 입적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이러한 성씨 논란에 대해 김대중 본인은 생전에 발간된 자신의 저서 《나의 삶 나의 길》을 통해 호적이 불분명한 것은 당시 행정이 미흡했던 것이고 모친의 재가로 인한 성씨 문제에 대해선 외할아버지가 재가를 인정한 만큼 구술하기 어렵다고 해명했지만 2010년 사망 이후 발간된 자서전인 《김대중 자서전》에선 '내 어머니는 평생 작은댁으로 사셨다'라고 고백하며 서자인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김대중씨는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성씨나 찾도록 하라"라는 발언을 하는 등 김대중의 성씨에 대한 비화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 김대중 가계에 대한 내막은 이후 김대중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겠다는 일념하에 김대중의 가계 조사를 시작한 손창식의 증언과 제6공화국 시절 안기부가 작성한 김대중 조사 자료 비밀 문건, 재미 언론인 손충무가 공개한 김대중의 호적등본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손창식은 김대중의 본래 성씨가 제갈(諸葛)씨라고 주장했는데, 이같은 내용은 1997년 대선 당시 손창식이 편집인으로 지내던 《한길소식》에 보도되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였던 김대중 측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손창식은 항소를 포기하였다.
한편 안기부 비밀 문건에선 마을 주민들이 김대중의 실제 아버지가 윤(尹)모 씨라고 증언한 것을 들며 출생 혈통이 불분명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31] 재미 언론인 손충무는 2009년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던 인사이드 월드를 통해 김대중의 호적등본을 공개하여 1924년에 김대중이 김운식의 서자로 입적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이러한 성씨 논란에 대해 김대중 본인은 생전에 발간된 자신의 저서 《나의 삶 나의 길》을 통해 호적이 불분명한 것은 당시 행정이 미흡했던 것이고 모친의 재가로 인한 성씨 문제에 대해선 외할아버지가 재가를 인정한 만큼 구술하기 어렵다고 해명했지만 2010년 사망 이후 발간된 자서전인 《김대중 자서전》에선 '내 어머니는 평생 작은댁으로 사셨다'라고 고백하며 서자인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10. 노벨상 로비설[편집]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서였던 최규선이 노벨상 수상을 위해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뉴스위크 한국판에 보도되면서 '노벨상 로비설'이 제기되었다. 김대중 정부 당시 국정원장을 지냈던 이종찬도 노벨상 수상 자체를 도우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벨위원회의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 "매우 무례하며, 위원회의 심사 절차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대중 측이 아닌 오히려 김대중의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으며, 반대자들의 편지가 왔다"라고 말했다.
동티모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조제 하무스 오르타가 로비설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라고 하더라고 전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서 "국가적으로 환영하고 축하해야 할 일을 노벨상 반납까지 운운하며 로비설을 흘리는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라고 지적이 있었다.
동티모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조제 하무스 오르타가 로비설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라고 하더라고 전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서 "국가적으로 환영하고 축하해야 할 일을 노벨상 반납까지 운운하며 로비설을 흘리는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라고 지적이 있었다.
11. 병역 논란[편집]
김대중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에 20대를 보냈기 때문에 군 복무를 하지 않은 것이 크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6.25 전쟁 동안 군 복무를 기피했다는 신한국당 측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김대중은 TV 토론회에서 출연하여, 6·25전쟁 당시 병역법에 따르면 1930년생부터 징병이 됐기 때문에, 1924년생인 자신은 소집영장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이어 해군 경비대 소속 목포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부대장을 맡아 당시 자신의 해운회사에서 보유하고 있던 선박을 동원해 참전했다고 증언했다.[363] 그러나 신한국당은 목포해상방위대가 유령 군부대라고 주장했고, 국민회의 측에선 해상방위대는 1950년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와 국방군사연구소에서 발행한 국방사연표에 분명히 근거가 있다고 반박하는 등 양측의 공방이 이어졌다.[364] 이후 국민회의 천용택 의원이 미국에 거주중인 해병대 예비역 준장 송인명을 만나 그의 증언록과 직접 쓴 증명서 등을 가져와 공개하고,[365] 송인명은 전 목포경비부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 군과 경찰만으로 공산세력의 잔당소탕과 안녕질서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목포시내 청년단과 여성청년단 등 애국단체들을 모두 동원해 작전을 보조하게 하였으며, 특히 해상작전이 중요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당시 지역유지 오재균에게 지시, 해상방위대를 창설해 김대중에게 부대장을 맡겼다고 해명했다.
1997년 국방부가 천용택 국민의회 의원에게 제출한 답변서에 따르면 해상방위대는 목포 지역에서 약 1년간(50-51년) 존속됐던 보조기관으로 추정된다. 국방부는 해군 목포경비부 연혁사 39쪽에 '당 경비부 내 보조기관인 해상방위대를 총참모장의 명으로 완전해체하고 건물 일체를 인수함'이라는 기록이 51년 5월 3일자로 나와있다고 답변서에 기재하였다.
한편 목포해상방위대의 사실관계 확인 요청에 대한 민원에서 해군 감찰실 (2010년)과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1년) 모두 목포해상방위대라는 조직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고 답변하였다.
뉴욕타임즈 도쿄지국장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보도했으며 김대중을 30여차례 인터뷰했던 전력이 있는 영국인 기자 헨리 S. 스톡스가 2013년 일본에서 발간한 회고록에 김대중이 군대에 입대한 적은 없으나 일본 제국 육군에서 근무하였다고 폭로하여 또다른 병역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어 해군 경비대 소속 목포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부대장을 맡아 당시 자신의 해운회사에서 보유하고 있던 선박을 동원해 참전했다고 증언했다.[363] 그러나 신한국당은 목포해상방위대가 유령 군부대라고 주장했고, 국민회의 측에선 해상방위대는 1950년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와 국방군사연구소에서 발행한 국방사연표에 분명히 근거가 있다고 반박하는 등 양측의 공방이 이어졌다.[364] 이후 국민회의 천용택 의원이 미국에 거주중인 해병대 예비역 준장 송인명을 만나 그의 증언록과 직접 쓴 증명서 등을 가져와 공개하고,[365] 송인명은 전 목포경비부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 군과 경찰만으로 공산세력의 잔당소탕과 안녕질서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목포시내 청년단과 여성청년단 등 애국단체들을 모두 동원해 작전을 보조하게 하였으며, 특히 해상작전이 중요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당시 지역유지 오재균에게 지시, 해상방위대를 창설해 김대중에게 부대장을 맡겼다고 해명했다.
1997년 국방부가 천용택 국민의회 의원에게 제출한 답변서에 따르면 해상방위대는 목포 지역에서 약 1년간(50-51년) 존속됐던 보조기관으로 추정된다. 국방부는 해군 목포경비부 연혁사 39쪽에 '당 경비부 내 보조기관인 해상방위대를 총참모장의 명으로 완전해체하고 건물 일체를 인수함'이라는 기록이 51년 5월 3일자로 나와있다고 답변서에 기재하였다.
한편 목포해상방위대의 사실관계 확인 요청에 대한 민원에서 해군 감찰실 (2010년)과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1년) 모두 목포해상방위대라는 조직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고 답변하였다.
뉴욕타임즈 도쿄지국장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보도했으며 김대중을 30여차례 인터뷰했던 전력이 있는 영국인 기자 헨리 S. 스톡스가 2013년 일본에서 발간한 회고록에 김대중이 군대에 입대한 적은 없으나 일본 제국 육군에서 근무하였다고 폭로하여 또다른 병역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2. 교통사고 관련 의혹[편집]
김대중은 총선 직전인 1971년 5월, 영등포 지역 지원유세를 위해 서울로 가던 도중 전남 무안군 국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그 후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당시의 이 교통사고에 대해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훗날 그의 자서전과 평전을 통해 두고두고 회자되었고 사후 공개된 그의 2009년 6월 2일의 일기장에서도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였다'고 기록해놓은 것이 확인되는 등 김대중은 교통사고를 명백한 당시 정권의 살해 음모로 지목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1985년 조갑제 월간조선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교통사고가 암살 음모라는 증거로 교통사고가 났던 트럭의 소유주가 공화당 전국구 의원이라는 것과 트럭 운전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며 사건을 처음 담당한 검사가 갑자기 교체된 후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지어졌다는 3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당시 사고가 났던 트럭은 범한화물 소속으로, 범한화물은 당시 공화당 전국구의원 후보였던 홍승만의 아들 홍국태의 소유였다. 사고를 냈던 트럭 운전사 권모씨는 1985년, 1998년의 취재기사를 통해 생존하여 부산에서 버스 운전사로 일하다 재혼하여 야간 경비직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는 당시 교통사고는 김대중이 타고 있던 차량이 교통법규를 어겨 발생한 사고라고 증언했다. 마지막으로 사건의 담당검사인 허경만은 중간에 교체되는 일 없이 당시의 사고 수사를 종결될 때까지 담당했으며 본인도 당시 수사에 어떠한 외압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허경만은 1980년에 김대중 변호인단에 합류, 야당 국회의원을 역임하다 1999년엔 전남도지사에 취임하였다.
이 교통사고 이후 김대중은 절름발이가 되었는데 사고로 어느쪽 다리가 잘못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떤 때 보면 오른쪽 다리를 절다가 다른 상황에서는 왼쪽 다리를 저는 등 사진이 찍힐 때마다 다르게 보인 적이 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이 정확히 어느쪽 다리가 잘못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는데 아무도 답변을 하지 못했다.
김대중은 1985년 조갑제 월간조선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교통사고가 암살 음모라는 증거로 교통사고가 났던 트럭의 소유주가 공화당 전국구 의원이라는 것과 트럭 운전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며 사건을 처음 담당한 검사가 갑자기 교체된 후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지어졌다는 3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당시 사고가 났던 트럭은 범한화물 소속으로, 범한화물은 당시 공화당 전국구의원 후보였던 홍승만의 아들 홍국태의 소유였다. 사고를 냈던 트럭 운전사 권모씨는 1985년, 1998년의 취재기사를 통해 생존하여 부산에서 버스 운전사로 일하다 재혼하여 야간 경비직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는 당시 교통사고는 김대중이 타고 있던 차량이 교통법규를 어겨 발생한 사고라고 증언했다. 마지막으로 사건의 담당검사인 허경만은 중간에 교체되는 일 없이 당시의 사고 수사를 종결될 때까지 담당했으며 본인도 당시 수사에 어떠한 외압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허경만은 1980년에 김대중 변호인단에 합류, 야당 국회의원을 역임하다 1999년엔 전남도지사에 취임하였다.
이 교통사고 이후 김대중은 절름발이가 되었는데 사고로 어느쪽 다리가 잘못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떤 때 보면 오른쪽 다리를 절다가 다른 상황에서는 왼쪽 다리를 저는 등 사진이 찍힐 때마다 다르게 보인 적이 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이 정확히 어느쪽 다리가 잘못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는데 아무도 답변을 하지 못했다.
13. 사제폭발물 사건 관련 의혹[편집]
대선을 앞두고 후보자 유세가 한창이던 1971년 1월 27일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 마당에서 사제 폭발물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이 폭발물 잔해를 분석한 결과 완구용 딱총 화약을 담배갑 은박지로 싸서 도화선을 연결해 제작한 사제 폭발물로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테러가 발생한 것으로 받아들인 야당의 분위기는 급속히 얼어붙었고 국회는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 그리고 사건 발생 14일째인 2월 10일, 경찰은 가정부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김대중의 조카인 당시 15세의 김홍준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총포화약류 단속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김홍준은 처음엔 명절을 맞이해 장난으로 꾸민 일이라며 범행을 자백했으나 구속 하루만인 2월 11일엔 범행 사실을 부인하며 감기몸살을 호소해 입원하게 된다. 경찰 역시 폭발물을 감싼 담배갑 은박지가 청소년이 구하기 힘든 영국제 로스만스에서 나온 것이고 도화선은 군수품이라는 이유로 김홍준의 우발적인 장난이 아닌 배후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김홍준은 15일 법원의 구속적부심 결과 검찰의 구속 소명 자료 미흡을 이유로 석방되었다. 하루 뒤인 16일 경찰이 동교동에서 배출된 쓰레기가 집하된 구로동 오물처리장에서 로스만스 담배갑을 발견하긴 했으나, 이 오물처리장이 마포구 내 17개동 33만여 주민의 쓰레기를 가져다 땅을 메우는 곳이고 사건 전후에 배출된 동교동 42가구의 쓰레기는 다섯 군데가 넘는 곳에 40여차례에 걸쳐 나눠서 버려졌기 때문에 찾아낸 담배갑이 폭발물에 쓰인 담배갑이라고 할만한 근거가 없었다. 이 사건은 결국 미제로 남게 되었는데, 당시 유세 기간동안 김대중 후보를 비롯한 신민당 측에선 정일형 선거대책본부장 집 화재사건과 김상현 의원 집에 협박편지가 배달된 사건과 더불어 명백한 박정희 정권의 정치테러라고 주장했다.
14. 여고생 성매매·억대 수수 77세 처남[편집]
김대중 처남 이상호(77세)는 서울 C호텔에서 여모(17)양과 두차례 성관계를 가진 원조교제 후 200여만원을 건넸으며, 2002년 “내게 돈을 주면 정부보조금을 받도록 해주겠다”고 속여 경남 합천 해인사로부터 로비자금 용도로 1억원을 받는 등 각종 청탁의 해결 명목으로 총 1억8000만원을 수수했다. 2004년 2월 서울중앙지법원 형사합의23부는 구속 기소된 이상호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