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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분류:김대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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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3 | == 상세 == |
5 | 4 |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에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원후광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운식에게는 본처가 따로 있었으며, 즉 김대중은 서자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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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14 | 아버지 김운식은 조선인 소작인들을 대표하여 일본인들에게 항의나 진정을 내곤 했다. 장덕수가 잠시 피신하러 하의도로 내려왔다가 김운식과 가깝게 친교가 있었으며 장덕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한다. 김대중은 "내가 태어난 이러한 토양이 민족과 같이 불의에 항거하는 힘을 주었다."라고 추억하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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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16 | 한편 김대중의 출생에 대하여 의혹이 제기되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 장노도(張盧島(또는 장치도(張齒島)-후에 장수금(張守錦)으로 개명)의 첫 남편인 제갈성조(諸葛成祚)의 형인 제갈성복(諸葛成福)이 친부라는 설,[21] 두 번째 남편인 뻐리섬의 윤창언(尹昌彦)이 친부라는 설이 있다. 1988년 7월 18일에 하의면장인 장명우가 발행한 호적등본에 의하면 김대중은 7살 때 윤창언(尹昌彦)의 서자 윤대만(尹大萬)에서 김운식의 서자 김대중(金大仲)으로 개명 등재되어 있다. 이 때 개명한 김대중의 한자명 金大仲이 오늘날의 金大中으로 개명된 시점은 밝혀진 바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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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18 | == 학창 시절 == |
19 | 19 | 친구들이랑 같이 놀던 어린 김대중이 나무그늘에서 낮잠을 자던 엿장수의 짐보따리에서 담뱃대를 훔쳤고, 그것을 어머니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다가 분노한 어머니가 김대중의 종아리를 걷은 뒤, 종아리 체벌을 한 적이 있었다. 먼 훗날 김대중은 그때 어머니로부터 옳고 그름, 선악에 대한 구별을 은연중에 배웠다고 회고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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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27 | 그는 독서광이면서 정치와 영어에 관심이 많아 작문과 역사 성적이 뛰어났으며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다 한다. 고교 시절(목포공립상업학교)의 학적부에는 김대중에 대하여 "언변은 늘 정확, 명료하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탓인지 훗날 그는 서울에서 웅변학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학원에서 정치적 동지인 김상현과 만나게 된다. 그의 한 동창생의 말에 의하면, 한번은 일본인 교관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시국에 대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교관이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하자 김대중만이 입을 열었다. 질문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유럽 정세에 관한 것이었는데 교관은 답변을 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여 창피를 당하고 말았다. 3학년부터 학교 측의 정책으로 취직반과 진학반이 나뉘었는데, 은행 취업을 목표로 취직반에 들어갔으나 이내 대학 진학으로 진로를 변경하여 취직반 반장을 그만두고 진학반으로 옮기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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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29 | 하지만 김대중은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였다. 4학년이 되면서 독서로 인해 넓어진 견문 탓에 반일 사상이 생겨나 일본인 학생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전 과목에 걸쳐 성적이 떨어지기도 했으며, 반일 작문이 문제가 됐다. 일본의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미국 해군의 해상 봉쇄 정책으로 인해 여행 허가가 어려웠고 이에 학비가 무료인 만주국의 건국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고려해 봤지만 진학해봐야 일본군에 징집이 될 것이 뻔하다는 2가지 이유에서였다. 15세가 되던 1938년에 도요타 다이주(일본어: 豊田大中)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일본에 올 때마다 상업학교 시절 은사에게 이 이름을 사용했다고 아사히 신문은 보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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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31 | == 청년 사업가 시절 == |
31 | 32 | 대학 진학을 포기한 김대중은 목포공립상업학교(현재의 목상고등학교)를 1944년 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엔 일본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김대중은 종업원 대표로 추대되어 종업원단체가 조직한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 해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도 목포지부에 참여하여 선전부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책인 임영춘의 추천으로 건준 목포시 지부에 가입해 선전책에 종사하는 한편 목포청년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으로 발전적 해체라는 이름하에 해체되자 이채현의 추천으로 김두봉이 1946년 2월에 연안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창당한 공산주의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을 병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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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34 | == 해방과 한국 전쟁 전후 == |
33 | 35 | 해방 직후의 김대중은 건준 목포지부에 이어 9월 경에 결성된 목포청년동맹에도 가입했지만 건준에 관련된 일을 주로 했으므로 청년동맹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이 해 하반기에 동생 김대의와 건준 명의의 벽보를 붙이다가 미 군정 경찰에 의해 포고령 위반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이틀간 구금되었다 석방된다. 같은 해에 차용애와 만나 결혼하였다. 1946년 초에는 공산 계열 정당인 조선신민당 전남도 목포지역지부 조직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을 추종하는 세력과 갈등을 빚게 되면서 여름에 탈당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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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53 | 1951년 3월엔 목포해운회사(현 흥국해운) 사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전남해운조합 회장, 한국조선조합 이사로 취임하였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목포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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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55 | 낙선 이후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상경하여 잡지 《태양》을 발행하면서 웅변학원을 운영했고, 1955년 10월에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상계》에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등.. 여러편의 노동문제글을 기고하며 정계진출의 꿈을 키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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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57 | == 본 문서 정보 == |
55 | 58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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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 60 | * [[https://ko.m.wikipedia.org/wiki/%EA%B9%80%EB%8C%80%EC%A4%91|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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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 [[분류:김대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