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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 61 | 미 국무부가 제공한 장학금 (후에 아세아 재단 장학금과 미국 공병단의 연구 논문 용역 수주 등으로 이어짐)으로 1962년 8월 자의 반 타의 반의 도미 유학길에 올라 15년간의 화려한 군 경력을 접고 학자의 길을 걷는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겪게 되었다. 그는 1972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유신반대시위 (국내외를 통해 최초의 유신반대시위였음)를 총지휘하게 되어 학구를 위한 유학이 망명의 길이 되고 말았다. 유신반대시위 이후 학자로서의 제 2인생을 살면서 워싱턴 소재 카톨릭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만 70세에 정년퇴임 한 그는 고향 논산에 소재한 건양대학교로부터 초빙을 받아 고국과 고향에 봉사할 기회를 얻게 된다. 1999년까지 5년간 건양대학교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으며 추후 이 대학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희사하였다. 2004년 작고한 부인 박실모와의 사이에 장녀 미영, 장남 용원 (재미 건축가, YKA 대표), 차남 용회 (미국 국립과학연구원,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CIO), 삼남 용균 (미국변호사, 롭스 앤 그레이 서울사무소 대표 파트너), 사위 이웅무 (한국뉴욕주립대학 석좌교수, 아주대 명예교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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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 또한 그에게는 두 남 동생이 있는데 바로 아래동생인 김태수 예비역 공병대령은 서울공대 재학 중 전쟁 발발로 군에 입대하여 공병장교가 되었다. 공병 병과에서 선두를 달렸으며 공병으로서는 파격적으로 보병 [[ | |
| 63 | 또한 그에게는 두 남 동생이 있는데 바로 아래동생인 김태수 예비역 공병대령은 서울공대 재학 중 전쟁 발발로 군에 입대하여 공병장교가 되었다. 공병 병과에서 선두를 달렸으며 공병으로서는 파격적으로 보병 [[제 12보병사단|12사단]]의 참모장을 지내기도 하고 한. 미 1군단의 참모부장도 지냈으나 끝내 장군승진을 못하고 1975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장군승진에서 탈락된 것은 형님의 반혁명 경력이 문제시 되었다는 후문이 있었다). 그 아래 동생인 김환수는 서울법대를 나와 주한미국대사관의 미국공보원 고문(최종직위)으로 40여년을 근무하며 한. 미 학술, 문화, 예술 교류에 공헌하여 외국공관에 근무하면서도 한국정부로부터 화관문화훈장을 받는 이례적인 경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의 외국공관 장기근무도 형님의 반혁명경력과 무관치 않았다. 김웅수는 아내를 사별하고 부부가 살던 메릴랜드 집을 정리한 상당부분을 오랜기간 부부가 출석했고 그가 원로장로로 봉직했던 버지니아주 맥클린에 위치한 워싱턴 한인교회에 기부하였다. 교회는 이 기부금을 바탕으로 지역의 한인노년교포들을 위해 설립된 “웅수 시니어 아카데미”를 2013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반세기 동안 미국에 거주 하면서도 끝내 한국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2011년 영구귀국 하였다. 5.16 쿠데타로 인하여 젊은 웅지를 접어야 했고 격동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격은 고난과 시련들을 반추해 볼 때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군의 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했었다는 위안을 받으며 | |
| 64 | 64 | == 사망 == |
| 65 | 65 | 2018년 2월 25일 경기도 기흥의 노블카운티에서 9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김응수의 유해는 [[미국]] 워싱턴으로부터 옮겨온 부인의 유해와 함께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3층 320-105에 안장되어있다. |
| 66 | 66 | == 수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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