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실업친목회(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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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33 | 대정실업친목회의 주요 구성원은 1921년 조직 개편 이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회원은 약 250명으로 늘어났고, 조선귀족·대지주·예속자본가 등 당시 친일 성향의 상층 인사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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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 35 | 주요 구성원으로는 민영기, 조진태, 한상룡, [[이완용]], 민영휘, 이윤용, 예종석, 안상호 등이 있다. |
| 36 | == 평가 == | |
| 37 | 대정실업친목회(정식 명칭은 대정친목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단순한 경제인 친목단체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조선의 유력층을 기반으로 식민통치와 내선융화를 지지·선전한 대표적인 친일단체로 평가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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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대정실업친목회를 명확하게 '''‘친일 단체’'''로 규정한다. 특히 1916년 창립 당시부터 조선인들이 일제의 무단통치에 순응하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했고, 1921년 조직 개편 이후에는 조선귀족·대지주·예속자본가 중심의 친일단체로 성격이 더욱 뚜렷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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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 대정친목회는 흔히 ‘실업’이라는 명칭 때문에 경제인들의 친목단체로 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장신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 구성원은 경제인뿐만 아니라 관료, 조선귀족, 종교인,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의료인 등 경성의 유력층을 광범위하게 포함했다. 따라서 경제단체라기보다는 당시 경성의 유력자들이 결집한 사회·정치적 성격의 친일단체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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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 대정친목회가 가장 중요하게 내세운 것이 내선융화였다. 표면적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자는 의미였지만,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조선인을 일본 제국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논리로 작용했다. 장신의 연구에서도 대정친목회가 조선의 ‘잘못된 풍속’을 고치고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것을 내선융화의 실현 방법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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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 특히 1930년대 이후의 활동은 대정친목회의 친일성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연구에 따르면 대정친목회는 자신들을 일본 국민의 일원으로 인식하면서 일본의 만주 침략을 옹호했고, 조선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대표적인 민족말살정책인 창씨개명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이 때문에 당시에도 대정친목회는 ‘친일의 중심기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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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 '''종합 평가'''로는 대정실업친목회는 이름만 보면 경제·실업계 인사들의 친목단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유력층을 결집해 내선융화를 주장하고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대표적인 친일 사회단체로 평가된다. 특히 만주 침략 옹호와 창씨개명 지지 등 후기 활동까지 고려하면, 단순한 ‘친일 성향 단체’보다는 식민지배와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친일 협력 세력으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