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 vs r2
......
1313
사단급 제대가 다시 10개로 늘어난 후에도 군단 편성이 늦어진 점이나 편성된 군단도 다른 나라 "군단" 급 부대에 비하면 보병사단 3개를 모아둔 것에 불과할 뿐, 군단으로서 전투력을 가지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제1, 2군단은 모두 해체되었고, 현재의 제2군단은 1952년에 지리산 공비 토벌전을 위해 임시 편성인 기동 부대 성향의 백야전사령부를 모태로 새로 창설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한국군은 투지는 강했으나, 훈련의 양과 질, 장교의 지휘 능력, 보유 장비 등에서 부족함이 많았다. 백선엽 장군은 회고록에서 "1개 보병사단 전체를 105mm 1개 포병대대가 지원하고, 연대는 4.2인치 박격포 중대가 지원하는" 상황이었다고 술회했다. 당시 미군 보병사단은 1개 155mm 대대와 3개 105mm 대대로 사단 포병을 구성하고 있었다. 2013년 기준으로 한국군의 1개 사단을 지원하는 포병전력은 155mm 자주포 내지는 견인포로 1개 연대 정도다. 물론 편제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으며 105mm포는 향토사단 등에서만 사용할뿐 현역 사단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1414
1515
1951년 이후 [[미국]]이나 대한민국 모두 한국군의 군사력 증강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도 NATO의 창설과 냉전 분위기 등으로 인해 한국에서 병력을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1년까지 미국과 이승만 대통령은 증강에는 동의했지만, 그 방식에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승만]];대통령은 기존 10개 사단 외에 10개 사단 추가 증설을 위한 지원을 요구했고, 미국은 기존 사단들도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데 무슨 10개 사단 증설이냐면서 기존 사단들의 전투력 배양이 먼저라고 맞받아쳤다. 즉, 양이냐, 질이냐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전자를, 미국은 후자를 주장한 것이다.
16
17
이 와중에 현리 전투에서 제3군단이 패배하여 수십Km를 후퇴했고, 이웃한 미군 사단들이 급히 수습에 나서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이 보여준 무기력한 모습은 결국 미국 8 군 사령부와 유엔군 사령부의 중대 결단을 낳게 했다. 당시 육군 본부는 최전방에 전방 지휘소를 두고 국군 군단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작전지휘를 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협정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한국군의 전체 지휘권을 넘겨주었지만, 미군은 융통성을 발휘해 육본의 독자 지휘를 어느 정도 인정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전방지휘소 뿐만 아니라 제3군단마저 폐지하고 모든 한국군 사단을 미군 군단에 배속시키게 된다. 군단급 이상 상급 부대가 모두 폐지된 것은 한국군에게는 치욕이었으나,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전쟁 중 한국군의 1차 증강은 미군의 주장에 따라 기존 사단들의 전투력 배양과 장교에 대한 교육 과정 강화를 우선 사업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18
19
휴전 후 병력증강과 M4 셔먼, M47 패튼 전차 도입 등 장비증강이 진행되었고, 1954년까지 제1, 2군 사령부와 군수기지사령부·군관구사령부, 10개 예비사단이 창설되었다.
20
== 베트남 전쟁 ==
21
1963년부터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파견, 지원할 군사적 협력을 세계 각국에 요청하였고 대한민국 역시 미국의 파월 지원 요청에 응하여 비둘기부대를 비롯한 건설공병대대 파견을 시작으로 1972년까지 약 32만명의 국군을 파병하게 된다. 32만명 파견 중 전사 5천명, 부상 1만 9천명의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22
23
국군 발전사상 베트남 전쟁 파병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1964년 9월 11일 1300명으로 구성된 제101 이동외과 병원과 10명으로 구성된 태권도 교관단의 파견, 1965년 3월 16일 육군 건설공병부대인 비둘기 부대(1개 공병대대, 해병 공병중대, 경비대대, 수송중대)가 파견된 이후 계속 증파되어 10월 9일에는 제 2해병사단인 청룡부대를, 10월 22일엔 수도 기계화 보병사단인 맹호부대를, 1966년 4월 그리고 8월 30일에 9사단 백마부대가 파병됨으로써 무려 약 5만명(군단 규모)을 헤아리게 되었다.
24
25
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서는 그 때마다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과 대한민국 국회의 승인이 있었으나 그 심의과정에서는 야당인사인 윤보선, 장준하 등의 반대를 시작으로, 파병 찬·반 양론이 엇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월남전에 파월(월남에 파병)한 국군은 극복할 수 있는 문제점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다대한 전공과 업적을 쌓았으며, 베트남 땅에 국군에 대한 많은 신화를 남겨 놓게 되었다.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받은 자금과 회수한 무기로 군사무기 개량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경제 개발 사업 자금 등으로 활용되었다. 베트남전이 서서히 막을 내리던 1973년 3월 파월 국군은 완전히 베트남 땅에서 철수하였다.
26
== 21세기 ==
27
2014년 10월 1일, 이라크 전쟁에서의 군수 문제 발생 사례를 토대로 병기, 병참, 수송 병과를 묶어 군수 병과로 창설하였다. 새로운 병과를 위한 교육과정인 통합군수관리과정을 신설 및 운용할 계획에 있다.
28
29
국방개혁 2020에 따라 2000년 12월에 집행될 예정이었던 제1야전군과 3야전군의 지상작전사령부로의 통합 계획이 2014년 3월 6일에 발표된 국방개혁 기본계획 2014~2030으로 재추진되고 있다. 그리고 군단 중심의 작전 수행체계를 구축하기로 예정이다.
30
31
현재의 군단 8개는 2020년까지 7개로, 2030년까지는 6개로 줄일 계획이다. 다만 이 외 수도방위사령부는 기능 사령부 중 하나로 그대로 존치할 계획이다.
32
== [[2024년 대한민국 비상계엄령 선포]] ==
33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27분경 대한민국의 [[윤석열 정부]]가 [[비상계엄령]]을 선포함에 따라 계엄사령부가 구성되었고 육군참모총장인 육군 대장 박안수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언론 통제와 검열 기능을 맡는 보도처를 설치할 것을 계획하였으며, 무장한 계엄군이 헌법기관인 [[대한민국 국회|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난입하는 등 헌법 질서를 흔들었다. 이후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재석 의원 190명에 찬성 190표로 가결됨에 따라 철수하였다.
34
== 본 문서 정보 ==
35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36
37
* [[https://ko.m.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_%EC%9C%A1%EA%B5%B0|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