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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34 | 1984년《타임》지의 음악 평론가 제이 콕스는 "잭슨은 비틀즈 이후로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로 가장 인기 있는 단일 현상이다. 정확히 가장 인기가 많은 흑인 가수이다"라고 썼다. 뉴욕타임즈는 "팝 음악의 세계에는 마이클 잭슨과 그외 모두가 있다.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 그 자체이지. 단순한 팝 뮤직이 아니다.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명 나올까 하는 가수이다. 그는 방송국들의 인종 차별 정책을 돌파하여 인종 간의 경계를 무너뜨렸으며 흑인 음악을 백인 관객들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빈민가에서 탈출할 수 있으며, 에너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라고 보도했다. 2009년 AP통신은 잭슨은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견될 정도로 항상 센세이션을 불러온 팝스타였다고 평가했으며 뉴스위크는 잭슨의 추모 특집글에서 "잭슨 이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엘비스, 비틀스가 있었지만 잭슨 이후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며 "커트 코베인도, 머라이어 캐리도, 셀린 디온도, 비욘세도, 마돈나도 잭슨의 위상을 대신할 수 없었다"라고 보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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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36 | 잭슨이 죽고 나서 얼마 후 2009년 6월 25일 MTV는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 기념하기 위해 원래 뮤직비디오 형식을 간략하게 돌아봤다.[103] 또한 MTV 유명인과 기타 유명 인사들의 반응을 포함한 실시간 뉴스 특별 방송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에 잭슨의 뮤직비디오를 방영했다. MTV 프로그램 방송 시간도 임시적으로 변경되었고, 잭슨의 추도식 생중계가 끝난 다음 주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2009년 7월 7일 열린 추도식에서 모타운 레코드 설립자 베리 고디는 "지금까지 없었던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라고 말했다. 2009년 12월 29일 AFI는 "6월 50세이던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계적 관심을 받았고 사후 콘서트 리허설 영화 《This Is It》는 전례없는 국제적 찬사를 받았다"라고 말하며 잭슨의 죽음을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했다. 마이클 잭슨은 미국흑인대학펀드로부터 인문학박사와 피스크대학교로부터 명예 인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 37 | == 세계적 인기 == | |
| 38 | [[대한민국]]에서는 1984년 신문 기사를 보면 "한창 인기가 절정이던 조용필의 이름은 몰라도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모르는 젊은이는 없다던가. 국민학교 어린이까지도 그의 노래에 열광한다"라고 보도했다.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유일하게 외국인으로 마이클 잭슨이 뽑혔다. 또한, 국민학교 어린이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세계적으로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링컨, 레이건, 에디슨에 이어 4위로 뽑혔다. 전라남도 다도해라는 먼 시골에서도 섬사람들이 청바지 차림을 하고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불렀다. 2015년에는 SBS 연예가중계가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남성 팝 아티스트' 부분에서 1위로 선정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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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정은]]도 유학 시절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 선전용 동영상에다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가 작사/작곡한 'We Are the World'의 음을 무단으로 도용했다. 잭슨 열풍은 옆 국가인 일본도 마찬가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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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일본]]에서는 잭슨이 '태풍 마이클' 로 불렸으며, 켄 오타케 소니 뮤직 일본 사장은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이후로 일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엔터테이너이며 일본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남아있는 존재" 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에까지도 잭슨의 이름이 알려져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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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1984년 이라크와 이란의 전쟁 당시 이라크에서는 '마이클 잭슨 작전'을 세워, 이란 전선을 향해 밤낮으로 쉴틈없이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트는 심리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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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 [[인도]]에서도 잭슨의 인기는 엄청 나다. 가장 유명한 서양 아티스트로 잭슨의 인기는 인도 전 지역에 퍼져있으며 어떤 마을로 가도 사람들이 마이클 잭슨을 안다고 한다. 'Ahir Bhairab Borthakur'씨는 잭슨을 대체할 뮤지션은 없다고 말했다. 잭슨이 공연을 한 번도 하지 않은 파키스탄에서도 마찬가지로, 파키스탄 사람들에게 마이클 잭슨은 코카콜라와 유비쿼터스 같은 존재라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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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 폐쇄적인 기조를 유지한 [[중국]]에서도 마이클은 많은 인기가 있었다. 45세의 한 중국인은 "80년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개방 시대를 처음 맞은 중국인들에겐 서양 문화를 상징하는 주제곡이었다."라고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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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 잭슨은 공산주의 국가들에게는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1988년 서독의 베를린 Bad Tour를 앞두고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바짝 긴장했었다는 비밀문서가 공개됐다. 당시 [[독일]]은 분단국가로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자유진영인 서독과 공산진영인 동독으로 나뉘었는데 슈타지는 장벽 인근에서 열릴 잭슨의 공연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우려했다. 잭슨의 공연을 보기 위해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면 수습하기 힘든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슈타지는 고민 끝에 대형 스크린으로 잭슨의 공연을 중계하여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는 것을 막는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공연이 열리는 날 이 계획은 시행되지 않았다. 결국 청년들은 잭슨의 노래를 듣기 위해 장벽으로 몰려 동독의 경찰들은 이를 막기 위해 진입하는 등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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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 한편 [[러시아]]에 대항하여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공화국의 지도자 'Salman Raduyev' 은 체첸 사람들에게 'Michael Jackson'으로 불렸다. 체첸인들은 그가 마이클 잭슨의 노래인 'Heal the World'의 독립투사 버전이라고 믿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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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 [[멕시코]]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하여 멕시코시티 광장으로 1만 4천명이 집결하여 잭슨의 노래에 맞춰 춤을 선보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플래쉬몹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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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 잭슨은 월드 투어가 열린 나라마다 지도자를 만났던 유일한 가수다. 25개국 국가 수장들과 만났으며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5개의 부족장들과도 만났다.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대통령급 경호 대접을 받았다. 위키피디아와 유튜브에서도 잭슨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2017.11.12일까지의 누적 데이터 기준, 위키피디아 최다 검색어 순위에서 잭슨은 9,630만 페이지뷰로 가수/밴드 통틀어 1위, 전체 검색어에서는 미국, 트럼프, 오바마, 인도, 2차 세계전쟁 다음으로 6위를 기록 중이다. 또 가장 많이 검색된 앨범 순위에서도 Thriller 앨범이 비틀즈, 에미넴의 앨범과 함께 1,200만 페이지 뷰로 공동 1위, Bad 앨범은 칸예 웨스트의 앨범과 함께 580만 페이지 뷰로 공동 27위이다. 유튜브에서도 잭슨 콘텐츠 관련 영상은 매달 꾸준히 3억 뷰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최신 인기 가수들과도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치이다. | |
| 37 | 57 | == 본 문서 정보 == |
| 38 | 58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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