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2 vs 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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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 [[박정희]]가 살해당하자 며칠 뒤 청와대를 떠나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특별시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박정희]] 피격 당시 슬퍼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때 [[전두환]]에게서 아버지 [[박정희]]가 남긴 통치 자금 6억 원을 수령하였는데 이 사실은 박근혜의 정계 입문 이후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1980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1982년 육영재단 이사장, 1994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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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영재단 운영권 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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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은 함께 1989년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고, 박정희와 육영수를 추모하는 월간 신문인 근화보도 발행하였다. 1년 뒤인 1990년 9월 근화보는 1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고, 박근혜와 여동생인 박근령과의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육영수 숭모회는 다툼의 원인은 최태민이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육영재단의 간부는 19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이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1주일 동안 농성하였던 것은 최태민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태민을 싫어하면서도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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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박근혜의 여동생과 남동생인 박근령과 박지만은 최태민이 언니인 박근혜를 속이고 있으니 구하여 달라며, 당시 대통령이던 [[노태우]]에게 A4용지 12장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최태민은 1994년 사망하였으며, 이후 박근혜는 언론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저에게는 고마운 분'이라며 두둔하였다. 이에 논객인 조갑제는 '박대표는 한번 믿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안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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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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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1997년 12월 2일 사촌 오빠 박재홍의 소개로 한나라당의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이회창과 만났다. 이후 1997년 12월 10일 제15대 대통령 선거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참고로 당시 남동생 박지만과 박근령은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15대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하면서 한나라당은 야당이 되었다. 그 후 이회창의 권유로 1998년 4월 2일 한나라당의 후보로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미혼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 등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출신 성분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 진영 및 영남, 어머니인 육영수의 고향인 충청 지역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 후 박근혜는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될 때까지 내리 4선을 달서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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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0년 한나라당의 부총재로 선출되어 2001년까지 활동하였으나, 2002년 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였다. 이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였다. 2002년 5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 5월 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하고 5월 14일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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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초기에 받았던 높은 관심과 달리 2002년 제3회 지방선거에서 광역의원 2명을 배출하는 초라한 성적표를 냈다. 한나라당은 지선 이후 박근혜에게 복당을 요청했지만, 박근혜는 복당을 거절하였다. 이 후 제16대 대통령 선거 시즌이 다가오며 박근혜는 독자 출마를 모색하였는데, 당시 한일월드컵의 열풍을 타고 출마한 정몽준 의원과의 제3지대 단일화 여부가 많은 주목을 받았다.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궐 패배 이후 위태해진 노무현 후보를 비판하며 새천년민주당에서 탈당한 후보 단일화 협의회(후단협)은 박근혜 의원과 정몽준 의원, 이한동 전 국무총리 등 제3지대로 출마한 후보들의 단일화를 요구하였다. 정몽준은 박근혜와의 단일화를 추진하였으나 박근혜는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거절하였는데, 이는 당시 정몽준 캠프에 소속되어 있던 강신옥 변호사가 박근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의 변호를 맡았던 경력을 문제삼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몽준은 박근혜의 의사를 받아들여 강신옥 변호사를 캠프에서 내보냈으나 박근혜는 그 시기 한나라당으로 이미 복당한 이후여서 단일화는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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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대선을 1달 앞두고 이회창 후보는 박근혜에게 한나라당과 합당할 것을 제의하였다. 초반에는 이회창과의 갈등 때문에 복당을 거부하던 박근혜도 이번에는 복당을 받아들였고, 2002년 11월 19일 한나라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미래연합과 한나라당의 합당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한국미래연합은 창당 6개월 만에 한나라당에 흡수합당하며 해체되었으며, 박근혜는 한나라당 복당 이후 이회창 캠프의 선대위원장을 맡으며 대선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회창은 [[노무현]]에게 대선에서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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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 탄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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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12일, 한나라당이 다수(133석/273석)이던 제16대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 소추하였다. 박근혜도 당론에 따라 탄핵안 발의와 가결에 참여하였다. 비슷한 성향의 언론과 학계의 지원이 있었으나 극심한 역풍이 불면서 대다수 국민의 반발을 샀고 한나라당은 최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제16대 대선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SK그룹 등으로부터 수수했다는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 불거지면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유례없이 급락해 최병렬 대표마저 사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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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대표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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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이 '역풍 위기'에 처했을 때, 착실하게 당 내에서 입지를 쌓고 있던 박근혜가 그의 뒤를 이어 3월 23일 임시 당 대표가 되었다. 기존의 다선 의원, 중진 의원, 운동권에서 포섭해 온 세력 등과 다르게 박근혜는 여러 차례 기자 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를 표명했다. 2004년 3월 30일 KBS가 초청한 방송연설에서 박근혜는 "한나라당에게 마지막 한번의 기회를 달라"는 내용으로 눈물을 흘리며 연설을 하였고 이 역시 유권자들에게 동정표로 작용하였다. 또한 총선 직전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의원이 "60대 이상은 투표 안해도 된다" 라는 발언으로 노인 비하 의혹에 휘말려, 한나라당에게 기회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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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표 결과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원내 1당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121석을 차지하여 예상 외의 선전을 하였다. '탄핵 역풍 위기'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구해낸 것이다. 이때부터 박근혜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잠재적 차기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이회창이 정계은퇴를 하기 전인 국민의 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은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민주계가 강력한 당권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이회창의 은퇴와 17대 총선에서 발생한 박근혜의 부상으로 한나라당의 당권은 박근혜가 이끄는 친박과 민정계, 공화계로 급격히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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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당대표직은 임시직함이었기에 총선 이후 박근혜는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 2004년 7월 19일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선출되며 정식 당대표가 된다. 이 시기 박근혜는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개설해 유권자들과 활발히 소통하는 한편 보수계 정당과 척을 지고 있던 민주화 세력과의 단합과 화해에 포커스를 맞추기도 했다. 2004년 8월 12일, 박근혜 대표는 김대중도서관을 방문,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생전의 정적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아버지 시절 고생하셨던 것에 대해 딸로서 사과말씀 드립니다" 라며 유신 시절 피해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달했고, 김 전 대통령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며 화해를 받아들이고 박근혜에게 동서화합의 적임자가 되달라는 조언을 남긴다. 언론에서는 이를 박근혜 대표가 한나라당의 호남 지지층을 넓히기 위한 행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후인 2010년 출판된 자서전에서 "그 말이 난 참으로 고마웠다. 박정희가 환생해 나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았다" 며 박근혜의 화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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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는 6월 13일 오전 신라호텔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 학술 회의에 다녀오기도 했다. 2005년, 박근혜 대표 체제에서 한나라당은 2차례의 재보궐선거를 모두 승리하였고, 이 때부터 박근혜에게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