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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16 | == 개요 == |
| 17 | 17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1월 14일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위치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수사관들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심문하던 중 물고문으로 요절에 이르게 한 사건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집회가 시작되었으며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 18 | 18 | == 원인 == |
| 19 | 사건 당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재학생이었던 [[박종철]]은 1986년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를 한 이유로 [[구속]]되어 [[징역]]을 선고받은 바 있고 출소 이후에도 학생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이후 1987년 1월 13일 자정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는데 당시 연행 명목은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박종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 |
| 20 | == 경과 == | |
| 21 | 취조실에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고 이에 경찰이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면서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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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 그리고 11시 45분경 [[중앙대학교]] 용산병원 의사 오연상이 현장에 도착해 검진했을 당시 박종철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고 경찰은 14일 밤에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화장할 계획이었으나 이에 최환 부장검사는 사체보존명령을 내렸으며 사건 지휘는 그날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가 맡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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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사건 다음 날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되었는데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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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 부검은 당시 경찰 소속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한양대학교 교수가 맡았는데 군부와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1월 17일 황적준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1년 뒤 부검 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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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한편 박종철이 희생하며 구해냈던 선배 박종운은 이후 2000년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극우-뉴라이트 계열로 변절한 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등 정치 행보를 걷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