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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검은 당시 경찰 소속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한양대학교 교수가 맡았는데 군부와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1월 17일 황적준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1년 뒤 부검 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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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박종철이 희생하며 구해냈던 선배 박종운은 이후 2000년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극우-뉴라이트 계열로 변절한 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등 정치 행보를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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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보도와 부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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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학생의 사망 이후 중앙일보의 신성호 기자는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단서를 잡고, 1월 15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데스크로 내보냈고 석간에 단신으로 실렸는데 이 소식은 다른 국내 언론과 외국 언론에서도 인용되었고 그날 KBS와 MBC 저녁뉴스에서도 단신으로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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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다음 날인 1월 16일 강민창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이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여기서 박 치안감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 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발표했으나 동아일보는 당시 부검의 의사로 대공분실 509호실에 출입했던 오연상으로부터 "사건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했다"는 진술을 확보하며 고문에 의한 요절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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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기자회견 4일 만인 1월 19일 강 치안본부장은 다시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기존의 입장을 뒤집고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는 심문에 답하지 않자 머리를 한 차례 잠시 집어넣고 내놓았으며 계속 진술을 거부하자 다시 집어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사했다"고 "가혹행위"로 인한 요절을 시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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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한경 반장과 강진규 경사 등 고문 경찰관 2명을 사건 주도자로 지목해 구속한 뒤 사건을 축소했고 부검을 거친 박종철 군의 시신은 가족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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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는데 정 장관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민중 학살의 책임자 중 하나로 지목되던 사람이었기에 이 말 역시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