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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본관의 정착 시기가 주로 신라 말 고려 초이다보니, 대부분의 본관이 신라와 고려의 국경(평양과 원산만) 이남에 존재하게 되었으며, 평양과 원산(영흥) 이북에 발상지를 둔 본관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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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려 태조가 940년 군현을 개편하면서 토성분정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은 어느 역사서에도 나오지 않는 개인 학설에 불과하므로 이를 한국 성씨의 기원으로 삼는 것은 무리이다. 이 설은 전 영남대 교수 이수건이 1984년에 펴낸 저서 "한국중세사회사연구"에서 처음 제기한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오는 각 지방의 토성이 "옛 문적과 지금의 본도 관록에 의거한 것"이라 한 말을 빌미로 옛 문적이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단정하고 이런 주장을 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렇다는 증거는 없다. 토성분정이 실제로 있었다면 대다수 성본이 940년에 일시에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오는 다수 토성의 시조의 시대는 실제로는 고려초부터 고려말까지 긴 기간에 걸쳐있으므로, 토성분정이란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어에 대다수 성본이 고려 태조 때 생겨났다는 주장은 아무 설득력이 없다. 토성분정이 정말로 있었던 정책이라면 이런 중요한 정책이 고려사에 한 귀절도 나오지 않을 리가 없고, 실제 성씨의 역사적 사례들과 맞지도 않으므로, 이런 정책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토성이라는 말 자체도 고려사 등 고려시대 문헌에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으며, 경상도지리지 와 세종실록지리지 (1454 단종 2년)에서만 일시적으로 쓰이다 그 후 간행된 지리지들에서는 사라졌는데, 1984년에 이수건이 되살려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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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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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본관제도가 변화하자, 사람의 신분을 따질 때 성씨를 따지기보다는 성씨의 ‘본관’을 따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한국에서 ‘본관’은 성씨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혈연의식의 뿌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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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본관제도가 한국의 성씨제도와 관습에 미친 영향도 지대하다. 대표적인 것이 호주제법 폐지 이전까지 지속되었던 동성동본 금혼 제도, 즉 성과 본이 같은 경우엔 혼인을 금지시킨 제도인데, 모계의 근친혼은 허용하면서 부계의 근친혼은 금지하였다. 또한 부계친족 중심의 혈연의식은 제사나 상속에서 장자승계 제도와 남존여비 풍조도 강화시켰다. 1909년 일제의 민적법 시행 이후 부분적인 변화를 거쳐 왔지만, 2008년 호주제법이 폐지될 때까지 본관제도가 우리의 관습과 의식에 미친 기본바탕과 뿌리는 지속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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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근래 들어서 성씨에 따른 제도적 신분질서뿐 아니라 관념적 신분질서까지 무너짐에 따라 유력 성관에 가계를 이어붙이는 행위가 줄어들고, 독자적인 성과 본을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2008년 호주제법이 폐지됨으로써 모계 성씨를 승계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부계만이 친족이라는 의식도 무너지고 있다. 물론 장자승계 원칙이나 남존여비 의식도 사라질 것이 예상되며, 점차 씨족적 신분질서와 혈연의식의 핵심을 이루는 본관 제도도 변화가 불가피해질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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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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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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