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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34 | [[김세진(열사)|김세진]]과 이재호는 반제민족해방사상을 우위에 두는 NLPDR론에 기반하여 86년 3월 29일 결성된 학생운동 지도조직 <구국학생 연맹>(구학련(救學聯)) 산하 공개투쟁체인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自民鬪))의 간부로서, 이 사건은 86년 한해 동안 격렬하게 전개된 반미투쟁과 학생들의 잇단 분신·투신 자살사건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주장의 관념적 급진성과 과격성으로 시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운동권 일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 35 | 35 |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
| 36 |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폭행으로 사망한 사건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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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1986년부터 시작된 직선제 개헌 요구는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학생·노동자 등은 이에 동조하여 반외세·반독재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경찰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에 정부는 강경 진압에 나섰는데,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이었던 박종철(朴鍾哲)이 경찰 조사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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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최초 경찰의 강민창(姜旼昌) 치안본부장은 박종철이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하며 사망 원인을 단순 쇼크사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물고문과 전기고문의 심증을 굳히게 하는 부검의(剖檢醫)의 증언으로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고,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 사건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신민당은 정부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였으며, 재야단체들은 규탄성명을 발표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가는 한편, 각계인사 9천 명으로 구성된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등을 주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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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이로 인하여 정국은 고문정권규탄 및 민주화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다. 이에 정부는 내무부장관 김종호와 치안본부장 강민창의 전격 해임과 고문근절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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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그러나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을 통하여 치안감 박처원과 경정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5명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 폭로로 서울지검은 6명을 추가 구속하였고, 정부는 국무총리, 안기부장, 내무부 장관 등 주요 인사에 대한 문책인사를 단행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경찰과 검찰의 사건은폐조작 시도는 정부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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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 그리고 이 사건과 관련된 일련의 추모집회와 규탄대회는 개헌논의와 연결되면서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져 1987년 민주화운동의 촉발제가 되었다. | |
| 36 | 47 | == 교수들의 범죄 == |
| 37 | 48 | === 신교수 성희롱 사건 === |
| 38 | 49 | === 음대 교수 성희롱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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