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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 70 | 이들의 친미 내지는 친양적 자세는 제도적인 문제이다. 그들은 유교 사상을 극력 반대하면서 적극적으로 서양 문화를 도입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개신교 신자이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더욱 강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필자는 그들의 애국심, 즉 민족주의적인 정신은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 71 | 71 | == 지방 자치제도 실천론 == |
| 72 | 72 | 서재필은 '백성이 뽑은 사람이 천거받은 사람보다 열번에 아홉번은 나으리라'며 공직자를 백성들이 선거로 선출할 것을 주장했다. 1896년 4월 독립신문 창간 직후부터 그는 국민들 스스로가 생각해야 하고, 스스로 비판하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감사나 군수 등의 지방관을 백성들이 직접 선거하는 것이 임금이나 조정에서 임명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을 앉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선거로 뽑은 지방관은 임금이나 정부에서 임명한 지방관과는 달리 자기 소신껏 백성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서재필의 주장이었다. |
| 73 | ==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 | |
| 74 | 해방 후의 서재필의 사상의 핵심은 한국이 통일 독립되고 번영하려면 자유민주주의를 착실하게 운영해야 한다는데 있었다. 그 때 온 겨레가 열망하던 민족통일의 비결도 자유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다고 그는 외쳤다. 따라서 그는 일본 제국주의는 물론이고 히틀러의 나치, 무솔리니의 파시즘,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등은 봉건제도 만큼이나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말살시키는 악마의 사상으로 규정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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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 서재필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혐오하였다. 그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히틀러의 나치와 같은 유해한 집단이라고 반복해서 언급, 지적하였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당 독재체제 아래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으며 독립된 인격을 가질 수 없는 만큼 국민의 힘이 모아지지 않음에 반해, 자유민주주의 아래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됨으로써 국민의 힘이 저절로 모아져 통일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사상이라며 반대 의사를 여러번 반복하였다. | |
| 77 | == 강력한 치안사회 주장과 징병론 == | |
| 78 | 서재필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악한 존재라고 결론내린다. 서재필은 인간에게는 각자 나름대로의 욕망이 있고, 금전, 수단과 방법의 유무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봤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통제, 제재되어 마땅하다고 보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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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 구한말의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의 정치적 입장과 세계관이 각자 달랐지만 일본식의 강력한 경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점과 모든 ‘역적’(동학·의병)들을 모두 소탕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봤다.[199] 이러한 이들의 강력한 경찰권 주장은 당시 사회에서 유일하게 반발없이 제대로 채택되었다. 당시 대한제국 경무부 대신(경찰청 총장) 서리 이근택(1865~1919)이 서너명 이상이 모여서 속닥거리면 엄벌하겠다는 계엄령을 내린 것은 식민화 훨씬 이전인 1901년 6월 22일의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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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한편 1895년~96년 조선에 체류할 무렵 서재필은 징병제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서재필이 징병제를 주장한 것은 양반의 자제라는 이유로 빠지는 조선의 농병제도는 부당한 차별대우라 판단하고, 누구나 공정하게 병역의 의무를 짊어져야 된다는 것이었다. 조선인들이 징병제 군대에 끌려간 1940년대보다 훨씬 이른 1890~1900년대에 서재필이나 유길준은 “징병제가 곧 국민을 만든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권리의 소중함을 모르는 자들에게 억지로 권한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봤다. 또한 그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인간은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대접 받을 권리가 없다고 봤다. | |
| 83 | == 정부 맹신에 대한 비판 == | |
| 84 | 서재필은 한국이 봉건 왕조체제였던 1894년 무렵부터 강연과 글을 통해 인간의 평등, 자유의 필요성, 신분 차별 철폐, 국민의 참정권을 요구하였다. 갑신정변으로 그는 민중들을 대상으로 한 개혁 설득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였으나, 1895년 12월 귀국하면서 다시 평등, 자유, 차별철폐, 참정권 요구를 강연과 글을 통해 발표하였다. 그러나 1946년 10월의 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와, 각 지역민의 시도지사 선거 때에도 국민들은 선거를 자신을 다스려 줄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서재필은 선거를 통해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자신을 다스릴 지도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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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 정부를 맹신하고 관리들을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1948년 9월 11일 다시 출국하면서 서재필은 '인민들은 정부에 맹종만 하지 말것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고 인민이 곧 주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당부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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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 그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관존민비 사상과 고루한 봉건적 유습이었으며, 스스로 개척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과 게으름과 의뢰심이었다. | |
| 89 | == 본 문서 정보 == | |
| 90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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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 | *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E%AC%ED%95%84|위키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