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13 vs r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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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6 | 406 | 1928년 7월 28일 삼일신보사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 해 10월 28일, 박용만이 텐진에서 의열단원 이해명, 박인식 등에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박용만 애도 성명서와 암살자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곧이어 이승만 등과 함께 박용만의 공적을 치하하며 암살단을 성토하는 글을 3.1신보와 국민보 등에 발표하였다. 이에 김구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박용만이 밀정이며, 이승만과 서재필에게 암살자를 성토, 규탄하는 행동을 중단해줄 것을 촉구하였다. |
| 407 | 407 | |
| 408 | 408 | 1929년 병리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다. 이로써 서재필은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병리학자이자 한국인 최초의 미국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병원을 개업하기도 했다. 1929년 3월 필라델피아 대학, 펜실베이니아 대학, 콜롬비아 대학 등의 의학부 시간제 강사로 취직했으나 백인 학생들이 유색인종에게서는 수업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하여 오래 못가고 그만두었다. 그는 필라델피아의 간호학원에도 강사로 나갔으나 역시 백인 학생들이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꺼리게 되면서 얼마 못가 그만두게 되었다. 가족에게 실직 사실을 통보할 수 없었던 서재필은 이승만이나 동지회, 국민회를 방문하거나, 거리를 전전해야 했다. |
| 409 | == 고용의사 활동과 언론 활동 == | |
| 410 | 레딩 지역의 작은 병원에서 고용의사로 일하다 1929년에는 병리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여 병리학 의사로 여러 병원에 근무했다. 그는 자신이 번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빚을 갚는 데 써야 했고, 가족과 떨어져 있는 관계로 자신의 숙식비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 속에도 그는 개업을 향한 꿈을 갖고 저축하여 증권시장에 투자하기도 했다. 1929년 말 미국에서 일어난 경제 대공황으로 서재필은 그동안 개업 자금을 위해 증권에 투자했던 돈을 모두 잃어 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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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2 | 1930년 2월, 그는 미국 상,하원에 편지를 보내 광주 학생 항일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조선인 여학생을 추행한 일본인 남학생의 만행을 지적하고, 불의에 항거한 허정숙, 최순복, 송계월 등 애국학생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부당한 형벌을 받고 있으며, 평소 교내 조선인 학생들이 불량한 일본인 학생들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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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4 | 독립운동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생계에 치명타를 입게 된 그는 1930년대 초에는 병원에 의사로 다니면서 생업에 종사해야 했다. 1928년 무렵부터 한국 인사들이 방문할 때면 그에게 자치론을 설명했고 처음에는 자치론을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이라도 우선 해 보고 실력을 키워서 독립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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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6 | 1932년 안창호가 체포되어 고국으로 송환되면서, 다시 병원 업무를 보는 동시에 한인 교민사회의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당시 국내에 있던 인사로는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조병옥 등과 서신을 주고 받았고 이들을 통해 국내 정세를 접하였다. 1932년, 웨스터버지니아 주의 찰스톤 병원에 입사하여 2년간 근무한다. 1930년부터는 미의학학회지에 5편의 병리학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1935년 미디아 시내에 개인병원을 개업하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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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8 | 이후 국내의 잡지와 언론에도 칼럼을 기고하였으며, 민족성 개조와 실력 양성, 기술인 육성 등을 주장하는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그 밖에 자신의 회고담을 다룬 것을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에 영어로 송고, '회고갑신정변'과 '체미 오십년'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그가 영문으로 글을 적어 보내어 국내에서 번역, 연재물로 수록되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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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0 | 1934년, 건강 악화로 찰스톤 병원에서 휴직 권고를 받고 휴직했다가 곧 퇴직하고, 펜실베니아 주 미디아로 되돌아갔다. | |
| 421 | === 일제 강점기 후반 === | |
| 422 | 그러나 병원 활동이 어려워지자 그는 여러 병원의 고용의사로 취직하여 활동하였고, 의사로 활약하며 몇 편의 병리학 관계논문을 썼다. 1936년부터 다시 필라델피아에서 병원을 개업, 개업의로 생활하였다. 1939년에는 한민족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편지를 한국의 언론에 보내오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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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4 | 한국 민족은 훌륭한 민족이다. 그들은 영리하고 건강하며 생산적이다. 수세기 동안 시련과 고난에 시달려 왔지만 여전히 고유한 민족 문화를 갖고 있으며, 세계 속에서 더 높고 고귀한 지위를 획득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한국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열망을 결집하는 것이며, 정치적·경제적·개인적 자유를 위한 열정을 키우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더 많은 나라들이 한국 민족의 장점을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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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6 | — 서재필, 1939년 12월 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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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8 | 그 뒤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 성 요셉병원, 요옥 병원 등 여러 병원에서 병리학자로 근무하였으며, 종두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기도 했다. 또한 찰스턴 종합병원 병리과장이 되었다가 1936년 펜실베이니아주 펜실베이니아 체스터 병원 피부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1938년 3월 10일 안창호가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간장병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그는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차 일제강점기 한국에 입국, 경성의 안창호 장례식에 참석하고 되돌아갔다.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는 그의 귀국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는 미국 국적이었으므로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는 그를 체포할 수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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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0 | 태평양 전쟁 초기 자신의 병원을 개소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며 병원일과 징병검사일을 동시에 한다. 태평양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동안 서재필은 빚을 얻어 자기의 병원을 경영하였다.[128] 병원은 필라델피아에서 8마일 정도 떨어진 메디아에 있었다. 서재필에게는 고된 하루 하루의 일과였으나, 그는 원래 튼튼하고 장대한 신체에 스스로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된다는 강한 정신력으로 고된 격무를 치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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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2 | 1941년 1월 6일 미군 예하 무계급 명예역 군의관으로 자원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승리가 조선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77세에 미군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기도 했다. | |
| 433 | === 광복 직전 === | |
| 434 | 그는 1941년 1월 6일부터 1945년 4월까지 미군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하여 1945년 1월에는 미국 국회로부터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1942년 2월 말부터 3월초에 구미위원부 주최 하에 열리는 전승 축원 기념식과 한인 자유대회 참석 통보를 받고, 체스터에서 워싱턴으로 건너갔다. 서재필은 구미위원부 공관에서 이승만과 함께 기거하였다. 1942년 3월 1일, 미주와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 13단체의 대표가 워싱턴에 모여들었다. 서재필은 이승만과 함께 이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다시 체스터로 돌아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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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6 | 1944년, 아내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아내의 장례를 치르면서 크나큰 슬픔을 되새겼다. 두 딸 스테파니와 뮤리엘의 슬퍼하는 모습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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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8 | “두 딸을 위해서라도 나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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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0 | 그는 아내를 잃은 고통을 잊기 위해서도 열심히 일에 전념하였다. 큰 딸 스테파니는 미국인에게 시집가서 잘 살고 있었으나, 둘째딸 뮤리엘은 미혼으로 서재필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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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2 |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난 후 그는 집에 오면 여가를 이용하여 둘째 딸 뮤리엘과 함께 테니스를 즐기기도 하였으며, 때때로 야구 같은 것으로 가족과 함께 하기도 했다. 그는 주말에도 놀거나 나태하지 않았다. 부지런한 생활을 즐겨 채소밭 가꾸는 일에 열중하였고, 특히 그는 신문 읽기에 열심이었는데, 그것은 국제 정세의 움직임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1945년, 다시 성 요셉병원에서 근무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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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4 | 광복 이후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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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6 | 광복 직후 (1945~1946)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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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8 |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그는 미국에서 한국의 광복과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접하였다.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고 10월, 미국에 체류하던 이승만은 비행기편으로 필리핀 마닐라와 일본 도쿄를 경유하여 귀국했다. 서재필은 출국하는 이승만을 배웅하러 필라델피아 공항까지 직접 마중나와 이승만 내외를 전송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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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0 | 1946년 10월, 미군정에 의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관선)으로 선출, 그 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취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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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2 | 귀국 (1947)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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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4 | 1947년 1월, 과도입법위원회 신년사. 맨 왼쪽이 서재필, 가운데 털모자에 지팡이를 쥔 이가 의장 김규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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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6 | 1947년 1월 25일, 이승만이 '미 국무성내의 일부 관리가 누구인지는 지적하고 싶지 않으나, 이들은 공산주의에 기울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발표하자[130], 하지는 굿펠로우 대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the old S.O.B.가 나에게 한 배신 행위는 삭이기 힘들고 비통한 경험'이었다고 쓸 정도로 이승만에게 격분하였다.[131] 이후 하지는 이승만의 대안 모색에 매달려 서재필을 이승만의 대안으로도 고려하였다.[132] 미군정은 동위원회 재개를 준비하면서, 이승만·김구에 맞서는 지도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재필을 급히 귀국시키고자 하였다.[133][134][1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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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8 | 미군정은 김규식과 서재필의 제휴, 협력을 은근히 바랐다. 서재필이 일부 깨인 민중들 사이에 인기가 높고 존경을 받고 있음을 확인한 미군정은 두 사람의 제휴가 성립되면, 그 무렵 미군정이 뒷받침하던 김규식 노선이 현실적으로 큰 지지를 얻게 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39] 김규식도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고 있었다. 과도입법의회 의장 김규식의 추천을 받고 서재필에게 여러 차례 귀국 요청을 하였다. 서재필은 기본적으로 김규식의 노선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나이가 많음을 내세우며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를 사양했다.[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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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0 | 1947년 2월 27일, 서재필은 하지 중장의 추천으로 군정최고고문에 추대되었다.[136] 그는 좌우합작운동에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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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2 | 1947년 3월 11일 서재필 박사 환국을 환영하기 위하여 을지로2가 을우회관(乙友會館)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를 대표한 160명의 서박사환국환영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이시영, 부위원장은 이극로, 홍명희, 홍남표, 윤기섭, 김항규였다.[1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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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4 | 몇 차례 미군정의 요청을 고사했던 서재필은 미군정청 사령장관 하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군정청 최고정무관 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특별의정관으로 초빙받아 1947년 7월 1일, 미국을 출발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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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6 | 1947년 7월 1일 귀국 직후 하지 사령관 및 이승만 내외와 함께.1947년 7월 1일, 귀국 후 김규식과 여운형의 마중을 받고 있는 서재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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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8 | 1947년 7월 1일 오후 4시, 서재필은 49년만에 85세의 고령으로 뮤리엘 영애를 동반하고 해방된 고국에 귀환하였다. 부두에는 이승만,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민정장관, 김형민 서울시장, 김용무 대법원장 등이 마중을 나왔다.[13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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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0 | 1947년 7월 1일, 서재필과 둘째 딸 뮤리엘, 김규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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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2 | 1947년 7월 12일 오후 2시, 서울운동장에서 '서재필귀국환영대회'가 개최되었다. 시민과 각 단체대표자 등 5만여명이 참석, 김규식의 개회사가 있었고, 이승만의 환영사가 있었다. 서재필은 서투른 한국어로 답사를 하였다.[139] 귀국 인사로 서재필은 '자신이 한국말을 잊어버렸으며 한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하였다.[140] 그러나 '힘을 다하여 한국 인민들을 도와주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권한이 없는 사람이며, 다만 하지 사령관에게 진언할 따름이다'고 덧붙였다.[1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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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4 | 한편 그는 윤치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귀국 직후 충청남도 아산의 윤치호 묘소를 참배하였다. 기자회견장에서 의친왕 등이 존재하니 그들을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는 기자들의 요청을 그는 거절하였다. 귀국 직후 김규식, 여운형, 김성수, 김구 등을 찾아 면담하기도 하고, 김성수, 이광수, 조병옥 등을 만나 그들로부터 국내 정세를 접했으나, 파벌 다툼이 여전한 것을 보고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파벌 다툼은 여전하다며 한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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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6 | 귀국 후 정치활동 (1947~1948)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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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8 | 1947년 7월 3일, 하지중장의 최고정치고문으로 조미특별의정관이라는 신설된 직책에 취임하였다.[133] 서울 소공동의 조선호텔에서 잠시 숙박하다가 미 군정청에서 내준 군정청 직원 숙소로 이주하였다. 이후 하지 미육군 중장에게 자문을 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였다.[141] 서재필의 집무실은 중앙청의 207호실이었다. 그는 매일 출근해 성실하게 근무하였다.[140] 그리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방송에도 출연하여 매주 금요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주로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설명하고 우리국민이 걸어야 할 길을 강의했다. 서재필의 방송과 라디오 그의 연설은 영어로 이뤄졌기 때문에 손금성 박사가 꼭 한국어로 통역[140] 을 하거나 다른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보도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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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0 | 1947년 8월 15일, 해방 2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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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2 | “해방 2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완전독립을 하지 못하고 있음은 매우 유감되는 바이다. 우리는 당파 정치운동을 초월하여 먼저 국권을 회복해야 할 것이며 그 정부가 조선인민으로 조직된 후에 정당이고 정치운동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국권도 회복하지 못하고 정부도 없으며 정책이니 정당이니 하고 또는 정권운동을 함은 좋지 못하다.[14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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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4 | 1947년 11월 5일, 서재필은 산업 부흥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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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6 | “50년 전 조선보다 오늘의 조선은 약간 발전되었으나 아직 발전의 정도는 미미하다. 조선에 와보니 아무런 방향과 목적 없는 나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에만 떠들고 날뛴다. 할일 없이 이 당(黨), 저 당 돌아다니며 소리를 높이고 걸핏하면 만세만 부른다. 그들은 누가 생활을 보장해 주는지 알 수 없는 일이며 만세만 아무리 불러도 우리의 독립에는 소용 없는 노릇이다. 정부란 인민을 살게 해 주는 것이며, 인민은 조선의 주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한대로만 닮지말고 새로 진보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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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8 | 청년들 가운데는 패기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늙은 사람들을 보면 5년전의 늙은 사람들과 꼭같다. 이래서 우리는 진보가 적다. 조선의 인구는 세계 67개중 열 세째라는 훌륭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조선인의 부력(富力)은 끝으로 둘째인가 첫째라고 한다. 우리는 밥을 굶고서는 독립의 즐거움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먹고 살아야 하며 도덕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해 산업을 부흥시키고 도덕있는 나라가 되면 우리는 무력이 없어도 외력(外力)의 침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 |
| 489 | ||
| 490 | UN을 통해 조선인의 대표자들을 투표로 선거할 때, 조선 인민들은 돈주고 술사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욕심없는 진정한 애국자들을 선거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투표할 권리는 6개월 이내에 올 것이다. 나는 행운인지 불행인지 조선사람이며 조선의 독립발전은 오로지 산업의 부흥에 있는 것이다.[143] | |
| 491 | ||
| 492 | ” | |
| 493 | ||
| 494 | 1948년 3월 14일, 신민일보 사장 신영철과의 면담에서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박사가 조선에 와서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가라며 노골적인 반소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조선에 있어서의 미소관계는 험악하여지고 하지 중장의 입장은 대단히 곤란하여진 것입니다.' 전쟁 가능성에 대해서는 '절대로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파괴주의자이니 파괴주의자가 어찌 애국애족하며 건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류는 평화를 희구하고 있고 평화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지옥인데 자기에게는 비누 한 장 변변히 만들 능력도 없으면서 남에게 전쟁을 권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144] | |
| 495 | ||
| 496 | 1948년 3월 18일, 서재필이 5·10 선거 반대의사를 표명하자 총선거대책위원회, 민족통일총본부,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은 강력히 반발하였다.[145] | |
| 497 | ||
| 498 | 1948년 4월 10일, 기자회견에서 서재필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 |
| 499 | ||
| 500 | (問) 총선거에 대한 박사의 견해 여하? | |
| 501 | (答) 군정은 우리 정부가 아니므로 우선 정부를 세워야 하겠다. 그러나 통일된 정부를 전제로 한다. | |
| 502 | (問) 양 김씨(김구, 김규식)를 중심으로 남북협상이 진전되고 있는데 박사의 전망은? | |
| 503 | (答) 그 정신은 극히 좋다. 남북협상이 잘 되어서 통일되기를 바란다. 통일만 된다면 나도 따라가겠다. 이에 대한 사전의 기우는 불가하다.[146] | |
| 504 | ||
| 505 | 1948년 5월, 대한민국 국회 개원 직전 과도입법의원이 해산됨에 따라 과도입법의원 의원 직에서 면직되었다. | |
| 506 | ||
| 507 | 1948년 5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서재필은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잘 되었다'고 호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 508 | ||
| 509 | “선출된 사람들이 어떠한 인물들인 가는 잘 모르나, 그들은 자기의 어떠한 권리 일도일군(一道一郡) 혹은 자당의 이익보다도 전국민의 복리를 위하여 헌신, 노력해야 할 것이다.” | |
| 510 | ||
| 511 | 또 기자의 '이번 선거는 남북분열을 조장시키는 것이라하여 다수의 정당, 사회 단체가 보이콧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 |
| 512 | ||
| 513 | “물론 남북이 통일된 선거로써 완전한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은 누구나 다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이 일치되지 않는 것을 어찌하랴. 우리가 남의 힘으로 해방된 탓으로 남북이 양단되었고, 그동안 3년 동안이나 힘을 양성해 보았으나 우리는 해방전보다 조금도 큰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마 동포가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힘은 있어도 타국에 맞설 힘은 조금도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선거에 의하여 힘을 모으는 것과 우선 남의 힘을 빌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남북회담과 같은 우리 민족의 손으로 완전독립을 찾자는 행동은 그 성과가 있고 없고를 불문하고 1년이나 2년을 두고 계속해도 조금도 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147] | |
| 514 | ||
| 515 | 대통령 추대운동과 사양 (1948)편집 | |
| 516 | ||
| 517 | 1947년, 연설 중인 서재필. 오른쪽 옆에 조병옥이 보인다.1947년,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과 조카 서호석[148]. | |
| 518 | ||
| 519 | 5·10 총선이 끝나고 제헌국회가 개원한 그 다음날, 정일형, 백인제, 이용설 등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이 서재필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149] | |
| 520 | ||
| 521 | 1948년 5월 29일 '反단독선거론 측에서 단독정부론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서재필의 정계출마 공작을 일으키고 여기에 김구·김규식도 가담한 것 같다'는 풍설에 대해 서재필은 '원칙적으로 남북통일운동은 옳으나 금번 그러한 운동[150]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라고 말하였고, 김구·김규식은 '우리가 단선을 반대한 사람들인 만큼 단정에 관여할 이유가 만무하며 그런 운동은 전연 사실무근이다'라고 말하였다.[151] | |
| 522 | ||
| 523 | 남한 단독 정부 수립 결정되고 대통령 선거 일정이 잡히자, 1948년 6월 11일 흥사단계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최고 정치지도자로 추대하여 새로운 정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서재필에게 간원문을 보냈다. '지금 조국이 요구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민의 뜻을 알아서 이에 충실히 순종하는 정직한 민주주의적 지도자입니다. 이 나라에는 그러한 인격자가 한분 계시니 그는 서박사입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서재필이 '정계 최고지도자로 출마하시기를'간청했다.[149] 정인과, 백인제 외에도 흥사단 계열 중 최능진과 최능진 계열 인사들이 서재필의 대통령 후보자 출마 운동을 주도했다.[1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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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5 | 대통령 출마 요청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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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7 | 1948년 6월 20일, 서재필은 흥사단계 독립협회가 보낸 간원문(懇願文)에 대해 '조국의 독립이 되느냐 안되느냐의 위기에 서 있는 이때 이러한 정당조직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를 더욱 혼란케 할 뿐이오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라는 말로 이를 거절하였다.[15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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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9 | 그럼에도 1948년 6월 24일 서박사추대연합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154] 7월초, 백인제, 최능진, 김대중을 비롯한 1,929명이 서재필에게 '한국 초대 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하니 대통령 출마를 승낙해 달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보냈으나,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노라'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한편 서재필 추대 운동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에 의해 공개적으로 견제됐다.[149] 6월 24일 조선언론인협회에서 서재필, 안재홍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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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1 | 1948년 7월 4일 서재필은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피력하였다. '나는 조선 각지로부터 나에게 조선 대통령 입후보를 요청하는 동시에 내가 출마하는 경우 나를 지지하겠다는 허다한 서신을 받았다. 나는 그들의 후의에 깊이 감사하는 한편, 나는 과거에 있어 그 관직에 입후보한 일 없으며 지금도 그리고 장래에도 그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그들에게 전달해야 할 것이다. 설혹 나에게 그 지위가 제공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터이다. 나는 미국 시민이며 또한 미국 시민으로 머무를 생각이다.'[1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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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3 | 1948년 7월 20일,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로 추천되어 1표를 얻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 서우석은 서재필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후보자격이 없다고 주장해 서재필이 득표한 1표를 무효처리 시키는 데 앞장섰다.[156][15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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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5 | 1948년 8월 14일, 서재필은 다음과 같은 해방 3주년 축사를 하였다. '권리와 책임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며 어떠한 독재자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니 국민은 감정의 싸움을 포기하고 합심하여 신정부를 육성하여 가기를 바란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조선 민족이 참으로 자성하여 진정한 독립정부로 발전하면 죽어서라도 나는 만족하겠다.'[15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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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7 | 출국 (1948)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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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9 | 1948년 8월 29일, 서재필은 고국을 떠나기 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8·15선거는 옳다고 볼 수 없다', '신정부는 무엇보다도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 청년에게 직장을 주라', '조선 체류 중 가장 기쁜 것은 민족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권을 얻은 것이고, 슬픈 것은 청년들이 일이 없어 1일의 식사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할 일 없이 정당만 왕래하며 쓸 데 없는 건의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마라. 정부에게 맹종만 하지 말고 정부는 인민이 주인이라는 것이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 하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나의 평생 소원이다.' 등의 답변을 하였다.[15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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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1 |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나기 수일 전 기자 김을한에게 '우리 한국 사람은 단결할 줄을 모르고 당파 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갑신정변 때나 지금이나 50년이 지났지만 그 점만은 똑같으니 한심한 일이오'라고 하였다.[160] 또한 과도입법의원 선거와 시도지사 선거로 선출된 입법의원과 시도지사를 상관처럼 깎듯이 대하는 시민들에게 선거로 뽑은 것은 국민의 대리인이지 윗 사람이 아닌데, 윗 사람처럼 깎듯이 존대한다.'며 잘못을 지적했지만 시민들은 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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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3 | 1948년 9월 10일, 미군정청 최고의정관 직을 사직하였고 이튿날 9월 11일, 서재필은 '고국 떠나며 동포 여러분께'라는 제목으로 대국민 서한을 기고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권한이란 특권을 가치있게 효용할 것을 배웁시다. 둘째로 현실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마지막으로 할 말은 나의 친애하는 남자 친구들이 자기네 부녀자와 자녀들의 안락과 복지와 편의를 위해서 일층 유의하는 동시 노력하여 주기 바라는 바이다.'[16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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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5 | 1948년 9월 11일 오전 7시 반, 서재필은 김구·이용설·손원일·김형민·강진국(姜辰國) 등 백여 명의 환송리에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과 비서 임창영(林昌榮)을 대동하고 숙소인 조선호텔을 떠나 인천으로 향하였다. 그는 오전 8시 40분경 인천에 도착하여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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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7 | (문) 통일독립국가를 조속히 수립하는 방법은? (답) 4천년 역사를 가진 대한민족이므로 분리될 리 없다. 당파싸움과 정치이권을 떠나 국민의 권리를 잘 이용하면 자주독립국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16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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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9 | 승선한 이후에도 창 밖으로 인천 제물포 부둣가를 한참 쳐다봤다 한다. 당시 이 선박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미국에 가는 유학생 32명이 동승하였다. 배편으로 미국에 갔는데 멀미 한번 하지 않았다 한다. 배 안에서 음력 8월 중순이 되자 그는 음력 8월 15일 밤 서재필은 선장에게 한국 음식을 특별히 마련하게 하고 갑판 위에서 남녀 학생들과 파티를 열었다. '미국에 가거든 쓸데없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고, 군인들이 쓰는 비속어를 쓰거나 어깨를 으쓱하는 몸짓 같은 것들을 하지 말고, 독립국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살려 서투르더라도 점잖고 올바른 영어를 쓰도록 하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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