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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 | 140 | 대학에 다닐 무렵, 서재필은 하루 3불의 품삯을 받고 유리창닦이 등 잡역부로 노동을 하였고, 여가를 틈타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한다. 그 뒤 교회당을 찾아 신앙을 발견하려고 꾸준히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 D.C.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국 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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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 | 142 |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1889년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의과대학에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문구점을 설립했는데 낮에는 문구점 주인으로 밤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하였다. |
| 143 | === 의사 면허, 미국 시민권 획득 === | |
| 144 | 컬럼비안 대학 예과를 마친 서재필은 컬럼비안 대학교의 본과로 진학[59], 1893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졸업하여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무박사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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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 |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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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 | 1892년 컬럼비안 대학교를 재학 중 바로 가필드 병원에서 1년간의 수련의 인턴 과정을 거쳤다.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1893년 6월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 야간반을 2등으로 졸업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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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 | 1893년 8월 워싱턴 D.C에서 만난 윤치호의 일기에 의하면, 그는 의과대학 졸업 후에도 박물관에 계속 근무하였다.[27] 컬럼비안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1893년 6월 바로 모교인 컬럼비안 대학교의 강사가 될 목적으로 모교의 조교가 되었다. 그러나 유색인종에게서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일부 학생들의 반발로 1년만에 그만두고 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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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 | 미국에서의 생활은 서재필로 하여금 근대적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확신하게 했다. 미국과 서구적 안목으로 조선을 돌아볼 때 그의 피는 끓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여전히 열강의 각축장이 된 채 외세종속적이면서 후진적인 사회로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사회의 불결함과 미개함, 민주주의 정치를 정착시키려던 개화당 인사들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와 증오에 환멸을 느낀 그는 미국 사회를 동경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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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 | 서재필은 1894년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을 만나 그의 과외 가정교사가 되었다. 뮤리엘 암스트롱의 가정교사로 있다가 연애를 시작,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무시와 차별, 냉대 등으로 이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그에게 뮤리엘 암스트롱은 친절하게 대했고, 때로는 그의 고충을 들어주기도 한다. 뮤리엘의 인간미에 감격한 서재필은 곧 뮤리엘에게 청혼하였고, 뮤리엘은 가난할 것이다, 힘들 것이다, 유색인종이다 등등의 이유로, 주변의 반대와 조언,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혼 비용에 부담을 느낀 서재필을 배려하여 같은 해 6월 20일 워싱턴 D.C 교외에 있는 카버넌트 교회에서 친지들을 불러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됐다. 미국 시민권을 받자 바로 병원에 처음 취직한 그는 세균학 연구를 주로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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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 | 뮤리엘은 제임스 뷰캐넌 전 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전쟁 당시 철도우편국을 창설해 초대 국장을 지낸 미국 육군 대령 출신의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의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사망했지만, 의붓아버지인 예비역 육군 대위 출신 제임스 화이트가 워싱턴에서 유명 인사였던 탓에 그는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그 후, 서재필과 뮤리엘 암스트롱은 두 딸 스테파니와 뮤리엘을 두었다. 서재필은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1894년 6월 워싱턴에서 의사 개업을 하였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로 생계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신혼 살림도 워싱턴에 있던 주미조선공사관 직원 관사에 방을 빌려 차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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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 | 이후 평생을 독립운동 참여 등 그가 가정 생계에 초연하여 빚과 파산,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아내 뮤리엘은 남편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고, 이는 그가 전심전력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193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내에는 노예와 시민에 대한 차별대우가 당연하다는 시각과 흑인,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당연하다는 시각이 존재했는데 그는 노예 해방론과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제임스 뷰캐넌의 사상에 감동, 깊이 공감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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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 | 서재필은 개업 후 백인들의 인종 차별 의식 때문에 병원을 별로 찾지 않아 매우 심한 궁핍에 시달렸다. 1894년(고종 31년) 3월 김옥균의 암살 소식과, 5월 뉴스와 신문을 통해 김옥균의 부관참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조선 조정이 상하이에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고, 시신을 환국시킨 뒤 능지처사한 것은 당시 세계적으로 보도되었다. 김옥균의 참혹한 죽음과 부관참시를 보고 그는 조선 조정과 조선 민중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한층 증폭시켰다. 한편 1894년 6월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조선에서는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895년초 모교인 컬럼비아 대학 의과대학의 세균학 강사로 출강하였다. | |
| 161 | == 복권과 귀국 == | |
| 162 | 1895년(고종 32년) 3월 1일 법무대신 서광범의 건의로 작위가 회복되었다. 5월 10일에는 미국 체류 중 외부 협판에 임명된다. 8월에는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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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 | 서재필은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주미조선 공사관에서는 그에게 공사관의 방 하나를 무료로 빌려주었고, 식비까지 제공하였다.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 당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1895년 가을, 미국을 방문 중 워싱턴 시에 들른 박영효를 워싱턴 시 내에서 10년만에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조선의 정세를 접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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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 | 박영효를 만난 뒤 다시 조선을 개혁해 보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그는 김홍집 내각이 다시 서재필에게 귀국을 요청함에 따라 귀국을 결심한다.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조선으로 돌아올 때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추가로 마련해준 여비까지 더 받고, 1895년 11월 10일 워싱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를 출발, 하와이와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게 된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경유할 때 일본 동경의 모교 토야마 사관학교를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다시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배편으로 12월 26일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인천항에 도착한 서재필과 그의 부인 뮤리엘은 출국 전 고용한 미국인 경호원을 대동하고, 인력거로 비밀리에 한성부에 당도하였다. | |
| 167 | ||
| 168 | 그는 귀국 직후 외무 협판과 학부대신 서리 직을 사직한다. 후일 1900년 6월 윤용선은 그가 이름뿐이지만, 당시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된 것을 근거로 을미사변 관련자로 몰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주하기도 한다. | |
| 169 | === 개화 계몽 운동 === | |
| 170 | 당시 그는 조선의 모든 것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갑신정변의 실패에 크게 낙심, 좌절했고 이를 역적시하는 고종 등의 태도, 일가족이 처참하게 희생된 것, 일본 망명 중에 조선 조정에서 자신을 암살할 자객을 보낸 것, 미국생활 초에 당했던 온갖 인종차별과 멸시는 그에게 원한과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거의 영어로 대화했고, 독립문 기공식 때에도 영어로 연설했다. 또한 윤치호 등과 살아남은 조카들이 그에게 자결로 죽은 전처의 묘소와 논산 연무대 근처에 있던 생모 성주이씨의 묘소 위치를 알려주었으나 그는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보라는 권고를 거절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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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 | 그를 파양했지만 연좌제에 의해 천민으로 격하된 양아버지이자 7촌 당숙인 서광하가 찾아왔지만 못본 척 냉정하게 외면하였다. 역시 연좌되어 삭탈관작 당하고 거지가 된 본부인 광산 김씨의 친정부모 김영석과 박씨 내외 역시 외면했다. 서재필은 김영석 내외에게 그대가 어떻게 나의 장인인가, 자신의 딸과 어린 외손을 외면한 금수에게 내가 왜 인사하느냐며 박대하고 내쫓았다. 그는 양복 차림으로 안경을 끼고 입궐하였으며, 입궐한 뒤에 고종의 앞에서 절하지 않은 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악수를 청하였다. 이를 본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충격을 받았고,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박정양, 박영효, 김홍집, 유길준, 윤치호 역시 경악했다. 영재 이건창은 이를 듣고 사람이 망가졌다며 그를 비난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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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 | 그는 귀국 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서재필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고, 자기 이름을 필립 제이슨 또는 제이슨, 피제손으로 지칭하였다. 피제손은 그의 이름 서재필의 글자 순서를 거꾸로 한 필재서를 한글로 음역한 것이다. 1900년대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다시 제선 또는 피제선으로 음역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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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 | 176 | == 본 문서 정보 == |
| 144 | 177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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