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10 vs r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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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2 | 292 | 한편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에 입사한 김규식 등 청년들에게 미국으로 유학할 것을 설득, 권고하여 그들을 미국으로 유학보내는 데 성공한다. 이승만, 김규식 등이 미국으로 유학한 뒤 이들의 학비를 일부 송금해주기도 하였다. 그가 출국하고 그해 12월 26일 독립협회도 결국 해산되고 만다. |
| 293 | 293 | |
| 294 | 294 | 1898년 12월 10일 최익현이 서재필, 유길준의 사형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날 최익현의 상소를 필두로 1900년까지 거의 연일 서재필과 유길준, 김윤식 등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상소가 올려졌다. 1900년 윤용선은 그가 을미사변에 개입된 인물이라며 처벌할 것을 청하는 상소까지 올리기도 했다. |
| 295 | == 2차 미국 망명 == | |
| 296 | 1898년 4월 미국으로 환국, 4월부터 1899년 8월까지 미국-스페인 전쟁에 미국군 군의관으로 잠시 참전하였다. 이때 그는 미군 병원선 하지 호에서 미국 육군 군의관으로 부상병의 진료와 수술을 담당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끝난 뒤 노동과 상점의 아르바이트로 활동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바로 필라델피아 대학교 의학부로 돌아가 해부학 강사가 되어 해부학 강좌를 담당했다. 필라델피아 대학의 해부학 강사 직은 1914년까지 출강하였다. 1899년말부터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위스터 연구소에서 병리학 연구원으로도 근무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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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8 | 필라델피아 대학의 해부학 강사와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연구원으로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1899년 조선에 있던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등으로부터 독립협회가 실패했다는 전보와 연락을 접하였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참정권 요구 활동 등을 백성들은 사갈시하며, 갑신정변을 일으키려 한 역적 정도로 취급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운동의 실패에 크게 좌절, 민중에 대한 실망감과 증오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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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 | 서재필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나중에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해리힐먼 고등학교를 하숙하며 다녔던 윌크스베리에서, 힐맨 아카데미 고등학교 시절의 일 년 후배 해롤드 디머와 함께 문구 및 인쇄 사업을 하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를 설립하였고, 1905년에는 해롤드 디머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 윌크스 베리 본점을, 서재필은 '디머 앤 제이손 상회' 필라델피아 분점을 맡아 경영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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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2 |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서재필은 한국 정부에 조약은 부당하고 조선이 국가로서의 능력을 상실함을 의미하니 지금이라도 조약을 파기하라며, 을사 조약에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는 황제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는 윤치호에게 편지를 보내 을사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윤치호로부터 이미 정부의 고관들이 나라를 팔아치우기로 작심한 것 같다는 내용의 답장을 받았다. | |
| 303 | === 양자 입양 탄원과 거절 === | |
| 304 | 1898년 12월 미국으로 2차 망명을 떠난 후 서재필은 대한제국 정부에 상소문을 보내 양자를 들여 가계를 잇도록 허락해줄 것을 청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1898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보낸 이 상소문은 김원홍에 의해 발견되었고, 1982년 9월 8일 김원홍은 자신이 소장한 것을 국사편찬위원회 최근영 교육연구사에게 공개하였다. | |
| 305 | ||
| 306 | 상소문의 내용은 주로 대가 끊긴 가계를 양자로 잇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그의 탄원들을 거절했다. 이후 조선 사회와 조선인에 대해 분노와 환멸감을 느끼게 된 그는, 해방 후 양자 또는 봉사손을 들이라는 친척들의 권고를 스스로 물리치게 된다. | |
| 307 | === 을사 조약 전후 === | |
| 308 | 1905년,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온 이승만을 만나서 테오도어 루즈벨트에게 전달할 청문서의 영문을 유려하게 고쳐주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그 해 8월 5일, 서재필은 주미국 조선공사 김윤정에게 이승만을 소개하는 소개장을 하나 써 주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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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0 | 1906년 1월, 윤치호가 외무협판 직과 외무대신 사무서리직을 사퇴하자 그는 윤치호에게 전보를 보내, 현직에 있으면서 정세를 바꿔보도록 노력하라고 충고하였다. 윤치호는 최소한의 양심마저 상실한 매국노들의 소굴에 더 이상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답장을 보냈다. 답장에서 윤치호는 당시 고위 관리들은 최소한의 양심조차 상실한 매국노들, 중간급 관리들은 세금만 축내는 무책임한 기생충들이라며 질타하였다. | |
| 311 | ||
| 312 | 1913년까지 해롤드 디머와 동업을 계속하였고, 1915년부터는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적으로 필립 제이슨상회를 운영했다. 그 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1924년까지 인쇄업과 각종 장부를 취급하면서 사무실용 가구 등을 파는 필립 제이슨 상회를 경영했다. 그의 회사는 필라델피아의 상업 중심지인 1537 체스트넛 가에 소재하였다. 이후 필립 제이슨 상회는 본점 외에 필라델피아 시내 두 곳에 분점을 둔 종업원 50명의 큰 사업체로 성장하였다. 자신이 기존에 경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의 장사가 잘 되어 어렵지 않은 나날을 보낸다. | |
| 313 | ||
| 314 | 1909년 1월초, 신문 보도와 전화 연락을 통해 신돌석이 1908년 11월 잡혀서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러나 신돌석의 은신처를 신고, 제보한 사람이 조선인들이라는 것과, 신돌석이 평민 출신이란 점을 불쾌하게 여긴 양반 출신 의병들이 일본헌병에 자수했다는 점과, 현상금에 눈이 먼 지역 주민들이 신돌석의 은신처를 알려준 점, 신돌석의 외척 등도 제보에 가담한 점을 알게 되면서 절망한다. 이후 한동안 조선 독립에 대한 관심을 접고 병리학과 해부학 등 의학과 연구 활동, 문구점 영업에 전념하였다. | |
| 315 | === 한일 합방과 독립운동 준비 === | |
| 316 | 1910년 8월 미국 체류 중 한일 합방의 소식을 접하였다. 서재필은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개혁 인사들을 제거하고 척신들로 정부를 채웠으며, 내부부터 부패한 이상 어쩔수 없다고 봤다. 더구나 왕족들이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고 합방 은사금을 받는 것을 보고 실망, 한심하게 생각했다. 그는 친구 윤치호와 유길준이 남작 작위를 거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는 윤치호, 유길준과 서신을 주고 받으며 미국으로 건너올 것을 종용했지만 윤치호는 가족을 책임져야 됨을 들어 거절하였고, 유길준은 병으로 가지 못했다. 1914년 9월 유길준의 부음 소식을 듣고 일제 치하 조선에 입국했다가 문상 후 바로 출국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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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8 | 1916년,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의논하기 위해 노백린이 미국 본토로 건너왔다. 그러나 무장 독립론을 주장하던 노백린의 견해에 그는 회의적이었다. 노백린은 캘리포니아에서 재미동포 최초 백만장자 김종림 등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아 비행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재필은 약간의 경비와 무기상 등을 소개하면서도, 비용 부담과 장비 구매, 위험한 일을 기피하려는 조선인들의 소극성 때문에 장기적인 무장 투쟁은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 |
| 319 | ||
| 320 | 그러나 조선의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한일 합방을 자신을 황제에 불충하는 역적으로 보던 조선 민중들에게 당연한 대가로 받아들였다. 서재필은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독립이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그가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직후인 1918년 12월에 대한인국민회 중앙회장으로 있던 안창호(安昌浩)에게 보낸 서신에도 드러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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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2 | “오늘날 조선의 백성은 승전국 일본의 노예가 되어 구차한 명을 보전하고 있소. 그럼에도 아직 누구 하나 창피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일본의 학대에 저항하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려는 자가 없소. 그러니 바깥 세계에서 조선인을 위해 불쌍하다며 동정을 표하는 자가 없는 것이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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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4 | — 1918년 12월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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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6 | 그 뒤 그는 상점 경영과 조선인 교민 사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 12월 19일에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 등에게 연락하여 영문잡지 발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파리강화회의 파견 문제로 잡지 발행은 뒷날로 연기하고 만다. | |
| 327 | ||
| 328 | 1918년 11월 독일이 일단 항복함으로써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1월 18일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111]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서재필과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 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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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0 | 독립운동 참여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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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2 | 3.1 만세 운동 전후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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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4 | 3·1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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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6 | 미국 독립이 선포된 필라델피아 시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서 서재필과 김노디(왼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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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8 | 재미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는 미국내 한인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내 한인 교포들에게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2월 말 필라델피아에 방문했다가 라디오와 신문, 뉴스 등으로 3·1 만세 운동 소식을 접하게 된다. 3·1 만세 운동 당시 자신이 체포되거나 죽을 것을 알고 만세 시위에 뛰어든 학생들, 기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손목에 칼을 그은 학생들의 의거 소식을 접한 그는 깊이 감동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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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0 | “3월 1일의 대한독립 만세소리는 한라산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들렸다. 나는 필라델피아에서 이 소식을 접했다. 조선의 독립운동이 이같이 급속도로 진전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메스를 버리고 시험관을 내던진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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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2 | 3.1 운동 이후 미국내 한인들은 단체 조직을 결정하고 서재필한테 대표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사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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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4 | 3·1 만세 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그해 3월 중순 서재필은 자신의 전 재산을 정리, 독립 운동 자금으로 바치고, 동시에 미국 잡지 《이브닝 레저 (The Evening Ledger)》지를 찾아가 인터뷰[78], 조선의 문제를 다룰 것을 설득하여 승락받았다. 또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본 군국주의를 규탄하는 자료와 논설, 칼럼을 기고하였다.[78] 3.1 운동 직후,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모두 팔아서 7만 6,000 달러를 모두 독립운동에 투입하였다.[112] 이때 그는 병원 외에도 60~70명의 종업원을 둔 문방구점과 분점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파산하였다.[1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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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6 | 3.1 만세 운동 이후 서재필은 조선인들에게 독립의 의지가 미약하게나마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독립 운동에 대한 방략을 구상한다. 교육을 통해 문화, 기술 수준을 높이는 것과 미국과 국제사회에 조선의 독립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것, 조선인 인력의 해외 진출을 통해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확산시키는 것 등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치제라도 실시한 뒤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독립하는 단계적인 방법도 대안의 하나로 검토하였다. | |
| 347 | ||
| 348 | 1919년 3·1 운동에 호응하고 한인 교민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이승만은 한인 교민대회를 기획한다. 본래 서재필은 출판사를 차릴 계획이었으나 이승만의 설득에 의해 이 대회의 의장으로서 참가하게 된다.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가 소집되었고 연합대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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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0 | 1919년 4월 13일에서 15일까지 3일간 열린 이 행사에는 이승만, 정한경, 유일한, 조병옥, 장택상, 허정, 국민회 간부 등 150여명의 한인들이 참여하였으나 그는 열강들이 한국 문제에는 무관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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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2 | 대회가 끝나고 그는 곧바로 전미 "한국 친구회 (Friends of Korea)"를 조직, 조선인 교포들을 결속시켰다.[78] 그러나 그는 미국이 아무런 이득 없이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일본과 싸울 이유는 없다고 내다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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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4 | 제1차 한인연합회의 대회 소집 이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외교위원회가 설치되자 구미위원회 산하에 한인통신부를 설치하고, 서재필은 영문 기관지 〈한국평론〉(Korea Review)을 월간으로 발간했으며 '어린이', '순난자', '대한정신' 등 영문 소책자를 발간하여 배포하였다. 이 책들은 서재필의 자비와 여러 한인 지사들의 후원비로 발행되었으며, 미국에 일본의 만행을 소개하고 독립의지를 표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무료 배부 및 지방순회강연의 홍보책자로 활용되었다. | |
| 355 | ||
| 356 | 1919년 8월 한국위원부(임정 구미위원부의 전신)의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3.1 운동 후, 서재필은 자신의 상점을 보살피지 못했다. 드디어 상점은 파산하고 말았다.[56] 상점의 파산으로 생계에 곤란을 겪었지만 아내 뮤리엘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고, 그는 아내의 배려에 깊이 고마움을 느끼며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생계는 아내인 뮤리엘의 몫이 되었다. | |
| 357 | ||
| 358 | 같은해 8월, 서재필은 제1차 한인의회에 대표 기도자로 참석한 플로이드 톰킨스(Floyd Tomkins) 목사 등 기독교인사들을 설득,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고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구미외교위원부의 한국통신부에 한인연합대회에 연사로 초빙되었던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자유독립 원조 및 한일기독교도의 선교자유 보장과, 한인이 당하는 일본인의 악형을 영구히 방지하며 미국의 일반 국민에게 한국의 진상을 전파할 것을 목적으로 한 한국친우회는 당시 미국내 정계 및 학계에 포진한 친일세력에 대항하여 조직된 기독교 네트워크로 미국 내 20여개 도시에 지부를 두었으며,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도 각각 하나의 지부를 두었다. 한국친우회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박해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고, 미국의 정치인사들이 이를 시정하기 위해 일본에 압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 |
| 359 | ||
| 360 | 그해 9월 한국위원회가 임정 구미위원부로 개편되었으나 생계 문제로 부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9월 구미위원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는 생계에 종사하면서 구미위원부의 외곽 단체인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 활동을 병행하였다. 한국친우회의 활동은 이승만의 구미외교위원회의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38] 그러나 3·1운동 이후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자신의 전재산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예순이 넘은 고령으로 생계를 위해 다시 본업인 의사로 돌아가 일해야 했다.[49] 그러나 1919년 9월 구미위원부 고문이 되면서 1920년 무렵 그는 다시 한인단체 활동에 다시 참여한다. | |
| 361 | ||
| 362 | 1920년 초, 독립단사무처(獨立團 事務處)를 설치하고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114] 독립단 사무처는 1922년 재정난으로 문닫을 때까지 외교 활동과 홍보 및 독립운동 기금 모금 활동을 했다. 이외에도 서재필은 한국위원회와 구미위원부 활동, 국민회 등에 강연활동, 칼럼 기고 활동을 병행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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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4 | 한인단체 활동과 독립운동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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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6 | 미국에서의 독립운동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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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8 | 1921년 초, 태평양 해군 군축 회담서 한국의 입장을 교섭하기 위해 워싱턴 구미위원부 청사를 나서는 한국대표단의 이승만 단장과 서재필 부단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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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0 | 3·1 운동 직전까지만 해도 그는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조선의 독립을 가능성을 보게 되었고, 자제단을 조직해서 이를 진압하려 한 박중양 등과는 절교한다. 1920년 2월, 이승만에 의해 구미위원부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구미위원부 위원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던 현순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갈등하기도 했다. | |
| 371 | ||
| 372 | 1920년 2월 26일 구미위원부가 재무부 산하의 미주 지역 재무관서 기능을 갖게 하고, 그 위원인 서재필을 재무관에 임명했다.[115] 1920년 3·1 운동 기념식을 뉴욕에서 준비, 1920년 3월 1일에는 한국친우회 뉴욕지부 행사에 약 1,000여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한국의 3.1 만세운동과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1921년에도 뉴욕에서 3·1운동 기념식을 여는데 기여하였다. | |
| 373 | ||
| 374 | 미국에서 일본이 벌이고 있던 조직적 선전활동에 대항하고, 미국인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사용하던 사무실에 한국통신부(Korea Information Bureau)를 설립한 후 《Korea Review》를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이 잡지를 통해 미국 대통령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 1882년 맺어진 조미수호조약을 준수하라고 요구하였다. | |
| 375 | ||
| 376 | 1921년 4월 18일, 이승만이 상하이에서의 문제로 바빠짐에 따라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6월 29일, 이승만이 상하이 문제를 정리하고 미국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임정 구미위원부 사무실을 돌보며 업무를 계속해 나갔다. | |
| 377 | ||
| 378 | 서재필이 가장 기대했던 것은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개최된 워싱턴 군축회의였다. 1921년 8월 일본의 해군력 팽창을 억제하고 중국 침략을 견제하려는 취지에서 미국이 주최한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 대표로 워싱턴에서 1921년~1922년동안 열리는 평화군축회에 파견되었다. 이때의 태평양회의 주제는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일본의 해군력 강화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라는 것을 지인을 통해 알아냈고, 그는 이 기회에 일본군의 철수와 조선의 독립을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곧 군축회의의 '조선인특파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단장은 이승만이 맡고 서재필은 부단장으로 임명되었다. | |
| 379 | ||
| 380 | 워싱턴 군축회의와 좌절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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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2 | 평화군축회의 직전 회의장에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 당위성을 설명한 홍보물들을 태평양 연안 국가 대표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회의 개최 후 그는 조선 독립문제를 국제회의 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어줄 것을 요구하는 《한국독립청원서 (Korea's Appeal)》을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였지만, 일본의 방해와 미국의 반대로 끝내 무산되었다. 파리평화회의에서 서재필은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일본측 대표 도쿠가와 이에사토(徳川家達)에게 전달하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각국 대표와 세계 여론에 호소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논의는커녕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자 실망하여 경제난으로 한인통신부와 한국친우동맹에 관한 사업을 정지한다는 보고를 구미위원회로 보냈다. | |
| 383 | ||
| 384 | 1921년 11월부터 그는 워싱턴 9개국 군축회의에 나가 일본의 탄압을 호소했다.[78] 그는 독립운동 지원에 많은 돈을 지원하는 바람에 이내 파산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워싱턴의 군축회의에서는 조선 문제를 상정조차 하지 않았고, 강대국 위주의 약육강식 논리가 적용되었다. 서재필은 이후 깊은 좌절에 빠져 이후 별다른 독립운동과 항일 언론 활동을 펼치지 않았다. 1922년 1월 1일 조선 독립을 설득하는 서한을 들고 오하이오 주 매리언 시에서 휴양 중인 워런 하딩 미국 대통령을 찾아갔으나, 그의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하고 면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 |
| 385 | ||
| 386 | 1922년, 조병옥이 뉴욕 주에 한인교포들의 모임인 한인회를 조직하자, 이승만과 함께 이를 지원하였다.[55] 한편 한인회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시간적 여유를 얻은 조병옥은 서재필을 정치적으로 보좌하기도 하였다.[55] 그러나 한인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국민회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국민회 이탈파 및 동지회 계열이 갈등하면서 허정 등 일부 한국인 청년들은 서재필을 찾아 중재를 요청하였으나 서재필은 호응하지 않았다. | |
| 387 | ||
| 388 | 결국 재미한인들 간의 갈등은 조절하지 못하는 문제와 생계 문제까지 겹치면서 활동의 어려움을 겪었다. 1922년 2월 9일 구미위원부 위원직을 그만두고,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의 활동에서 손떼고 사업에 전념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계속 활동을 전개하다가 결국 그해 7월 코리안 리뷰(Korea Review) 7월호 발간을 끝으로 한국통신부의 활동은 중단되고 만다. 한국통신부는 문을 닫게 되었으나 대신 한국친우회만큼은 살리려는 그의 노력으로 조병옥, 허정과 국민회 계열에서 인수하여 친목단체로 계속 활동하게 된다. 1905년부터 잡화상을 경영하며 재산을 모았던 그는 독립운동 자금과 인쇄및 홍보활동, 한국인 대표단 파견 등의 경비로 재산을 쓰다가 파산을 맞이하게 됐다. 이때 일제강점기 치하의 한국에서 동지인 윤치호가 보내오는 약간의 생활비와 동포들이 기부하는 기탁금으로 겨우 연명해나갈 수 있었다. 상점을 문닫은 그는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며 취직을 준비한다. | |
| 389 | ||
| 390 | 사업 실패와 생계 곤란편집 | |
| 391 | ||
| 392 | 1925년, 로스앤젤레스 안창호의 집을 방문했을 때.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범태평양 회의에 참석 중. | |
| 393 | ||
| 394 | 당시 활동에 필요한 홍보책자들은 모두 그의 사업체에서 인쇄하였으나 그는 꼬박꼬박 인쇄비를 받았다.[103] 그리고 서재필이 주도하는 홍보사업에 만도 모금액 중 1만 2천 9백69달러가 지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03] | |
| 395 | ||
| 396 |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던 서재필은 1922년 이후 양탄자를 취급하는 이탄뉴상회에 입사, 이탄뉴상회 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38][116] 그러나 간간히 한인단체 활동에 관여하였고 수시로 자문을 청하는 이승만, 안창호, 조병옥, 허정 등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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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8 |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위해 몇 년동안 사업을 돌보지 못했고, 개인 재산을 많이 지출함으로써, 1924년 법적인 파산을 맞게 된다. 파산으로 인해 극도로 생계가 곤란해졌다. 그는 생계 조달을 위해 막노동을 하기도 했고, 상점의 점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파산한 가정 경제력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재필은 다시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돌아가 연구를 다시 계속하기로 결심[117]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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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 | 1925년 6월, 7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 회의가 개최되자 한국인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하와이로 건너갔다. 한국에서 온 송진우, 신흥우, 김양수, 유억겸, 김종철 등과 함께 윤용희[118], 필지성 등을 데리고 7월 1일부터 7월 14일까지 태평양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식민통치의 잔혹함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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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2 | 이에 일본 측 대표가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므로 국제사회가 조선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하자, 그는 미국이 필리핀을 속국으로 하고 영국이 캐나다를 속국으로 하고 있으나 캐나다와 필리핀의 발언권을 차단하지 않고 태평양 회의에 참석하게 한 점을 들어 일본측 대표의 주장을 논파했다. 이는 논란이 되었고, 캐나다, 필리핀 등 각국의 대표들이 한국 측 대표단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회의는 결렬되고 만다. 다시 배편으로 출발, 되돌아오는 길에 샌프란시스코, 스탁톤, 다뉴바, 리들리, 로스앤젤레스 등지에 있는 한인 교민 사회를 방문하여 재미 한국인 교포들을 면담하고 위로, 격려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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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4 | 유한양행의 초대 사장 (1924)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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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6 | 1924년 5월 유일한이 정한경 등과 함께 류한주식회사[119]을 설립하고 서재필을 초대 사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1926년 12월 10일까지 류한주식회사의 사장이었다. 유일한은 초대 사장으로 서재필 박사를 모시고 싶다고 제안했고, 서재필도 흔쾌히 수락했다.[120] 당시 자금은 유일한이 제공했고 서재필은 경영을 담당했다.[121] 서재필은 회사명을 '유일한 주식회사(New-il Han Company)'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유일한에게 권했다.[1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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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8 | “'유일한'은 세상에 하나 뿐인 기업이라는 뜻도 되거니와, '한'을 대한제국의 '한'으로 읽을 때, 새로운 한국이라는 뜻[122]이기도 하니 그렇게 하기로 하세. 자네 이름을 걸어야 책임감을 가지고서 회사를 경영하지 않겠나.[1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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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0 | 서재필의 제안을 받아들인 유일한은 회사 이름을 한글로는 류한주식회사로 하고, 영어로는 New il-han & Company라 하였다. 한국어로는 ']]유일한\\'에서 일을 빼고 유한이라는 이름만 사용하게 되었는데, '한(Han)'을 나라 한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을 때 그 뜻은 새로운 한국이 되었던 것이다.[120] 류한주식회사는 1926년 12월 10일 유일한이 정동에 유한양행을 건립하면서 소멸되었다.[121] 서재필은 1926년 6월 유일한의 귀국때까지 류한주식회사의 사장이었고, 12월 10일 유일한이 기존의 류한주식회사를 유한양행으로 변경, 국내법인으로 등록할 때까지 서재필은 류한주식회사의 명목상 사장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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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2 | 1926년 유일한은 귀국할 때 서재필에게 인사를 갔는데, 이때 서재필은 조각가인 자기 딸을 시켜 버드나무 목각화를 만들어 선물로 주었다.[123] 유일한이 귀국할 때 서재필은 조각가였던 장녀 스테파니 보이드에게, 유일한에게 줄 선물을 제작하게 했다. 스테파니 제이슨은 유일한의 성씨 '버들 류'를 상징하는 버드나무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여 기념 선물로 주었는데, 버드나무처럼 무성하게 번성하라는 뜻도 되었고, 그대가 한국인임을 잊지 말라는 뜻도 되었다. 유일한은 이 그림을 유한양행의 회사 상표로 사용하였다. 이후 그것이 유한양행의 상표가 되었다.[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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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4 | 의사 생활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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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6 | 그 뒤 서재필은 펜실베이니아 주 대학병원에서 연구 생활을 계속하였으며, 작은 딸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117] 생활비와 빚에 쪼들렸고 전기 요금과 수도 요금을 겨우 납부하는 수준에 이르자 그는 생계에 뛰어들게 된다. 후일 작은 딸 뮤리엘 제이슨은 아버지 서재필의 비서와 보좌역을 수행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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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8 | 서재필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친구로부터 2천 달러를 빌려 차임하였다.[117] 그는 이것으로 2년간의 연구비와 가족의 생활비에 충당할 것을 생각했다. 이후 2년간은 그에게 있어서 극심한 생활난의 연속이었다. 아내와 두 딸을 포함한 네 식구가 끼니를 거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117] 당시 독립운동을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고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아니하였으나, 서재필에게 그런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117] 1926년 암 치료 전문 병원인 잔느 병원(Geanes Hospital)에 취직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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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0 | 1926년 이승만과 함께 하와이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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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2 | 1926년 4월 순종이 사망하자 그는 실질적으로 조선이 멸망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조선의 정신적 지주이자 국부였던 인물이 사망함으로써 조선인들 사이에 구심점이 사라졌다고 봤다. 1926년 봄, 이승만의 초청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를 방문하였다. 이때 임정의 파벌싸움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서재필은 이승만이 한발 양보한다 하더라도 각 파의 파벌간의 암투를 조정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는 임시정부에도 연락,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억지로 단합, 단결시키기 보다는 차이를 인정하고 연합, 연맹하는 것이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임을 지적했다. 또한 미국내에서 벌어지는 안창호파, 이승만파, 박용만파 간의 파벌다툼은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감을 품게 했다. 그는 계속된 파벌 다툼과 자기 이익에 골몰하는 행위로는 독립을 하더라도 그 독립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
| 423 | ||
| 424 | 그는 계속 삼일신보와 미국의 언론에 일본의 탄압과 만행을 알리는 칼럼과 기고문을 지속적으로 게재하며 조선독립을 위한 청원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 공보부와 외무성,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조선에서의 통치가 무력 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뀌었다고 주장하고, 일선 동조론을 내세우며 이를 일축했다. 일본과 조선총독부는 미국에 암살자를 보내지 못하는 대신 하와이와 필라델피아에 첩자를 밀파하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 |
| 425 | ||
| 426 | 펜실베이니아 대학 캠퍼스. (Upper Quad Gate) | |
| 427 | ||
| 428 | 펜실베이니아 대학 재학과 연구 활동편집 | |
| 429 | ||
| 430 | 1926년 9월 62세의 나이에 다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에 특별학생으로 입학.[124] 하고 동시에 의업을 재개하였다. 1927년 4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을 수료하였다. 1926년 미국에서 병리학 전문의 면허제도가 시행되자 그는 병리학 의사 면허에 응시하였고, 여러 번 낙방하였다. | |
| 431 | ||
| 432 | 1926년, 펜실베이니아 대학 재학 시기의 서재필. | |
| 433 | ||
| 434 | 1927년 3월 29일 서재필은 월남 이상재의 부음을 듣고 조선일보에 한 기고에서 "그는 거인이었고, 그의 비범한 탁론과 강직한 기백에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추모하였다.[125] 이상재의 장례식 때 잠시 조선에 입국하여 경성에서 이상재 장례식과 노제를 지켜본 뒤 출국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그가 미국 시민권자였으므로 체포하지 못하였다. | |
| 435 | ||
| 436 | 1927년 6월부터 폴리크리닉 병원과 암치료 전문인 제임스 병원에 취직, 고용 의사로 생활하였다.[126] | |
| 437 | ||
| 438 | 1928년 7월 28일 삼일신보사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 해 10월 28일, 박용만이 텐진에서 의열단원 이해명, 박인식 등에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박용만 애도 성명서와 암살자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곧이어 이승만 등과 함께 박용만의 공적을 치하하며 암살단을 성토하는 글을 3.1신보와 국민보 등에 발표하였다. 이에 김구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박용만이 밀정이며, 이승만과 서재필에게 암살자를 성토, 규탄하는 행동을 중단해줄 것을 촉구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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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0 | 1929년 병리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다. 이로써 서재필은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병리학자이자 한국인 최초의 미국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병원을 개업하기도 했다. 1929년 3월 필라델피아 대학, 펜실베이니아 대학, 콜롬비아 대학 등의 의학부 시간제 강사로 취직했으나 백인 학생들이 유색인종에게서는 수업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하여 오래 못가고 그만두었다. 그는 필라델피아의 간호학원에도 강사로 나갔으나 역시 백인 학생들이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꺼리게 되면서 얼마 못가 그만두게 되었다. 가족에게 실직 사실을 통보할 수 없었던 서재필은 이승만이나 동지회, 국민회를 방문하거나, 거리를 전전해야 했다. | |
| 295 | 441 | == 본 문서 정보 == |
| 296 | 442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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