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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그는 상점 경영과 조선인 교민 사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 12월 19일에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 등에게 연락하여 영문잡지 발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파리강화회의 파견 문제로 잡지 발행은 뒷날로 연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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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1월 독일이 일단 항복함으로써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1월 18일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서재필과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 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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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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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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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는 미국내 한인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 소식을 듣고 미국내 한인 교포들에게 만세 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2월 말 필라델피아에 방문했다가 라디오와 신문, 뉴스 등으로 3·1 만세 운동 소식을 접하게 된다. 3·1 만세 운동 당시 자신이 체포되거나 죽을 것을 알고 만세 시위에 뛰어든 학생들, 기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손목에 칼을 그은 학생들의 의거 소식을 접한 그는 깊이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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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의 대한독립 만세소리는 한라산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들렸다. 나는 필라델피아에서 이 소식을 접했다. 조선의 독립운동이 이같이 급속도로 진전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메스를 버리고 시험관을 내던진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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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9월 한국위원회가 임정 구미위원부로 개편되었으나 생계 문제로 부위원장직을 사퇴하였다. 9월 구미위원부 고문에 위촉되었다. 그는 생계에 종사하면서 구미위원부의 외곽 단체인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 활동을 병행하였다. 한국친우회의 활동은 이승만의 구미외교위원회의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자신의 전재산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예순이 넘은 고령으로 생계를 위해 다시 본업인 의사로 돌아가 일해야 했다. 그러나 1919년 9월 구미위원부 고문이 되면서 1920년 무렵 그는 다시 한인단체 활동에 다시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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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초, 독립단사무처를 설치하고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114] 독립단 사무처는 1922년 재정난으로 문닫을 때까지 외교 활동과 홍보 및 독립운동 기금 모금 활동을 했다. 이외에도 서재필은 한국위원회와 구미위원부 활동, 국민회 등에 강연활동, 칼럼 기고 활동을 병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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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단체 활동과 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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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초, 독립단사무처를 설치하고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독립단 사무처는 1922년 재정난으로 문닫을 때까지 외교 활동과 홍보 및 독립운동 기금 모금 활동을 했다. 이외에도 서재필은 한국위원회와 구미위원부 활동, 국민회 등에 강연활동, 칼럼 기고 활동을 병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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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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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직전까지만 해도 그는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조선의 독립을 가능성을 보게 되었고, 자제단을 조직해서 이를 진압하려 한 박중양 등과는 절교한다. 1920년 2월, 이승만에 의해 구미위원부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구미위원부 위원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던 현순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갈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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