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9 vs r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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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172 | 172 | 그를 파양했지만 연좌제에 의해 천민으로 격하된 양아버지이자 7촌 당숙인 서광하가 찾아왔지만 못본 척 냉정하게 외면하였다. 역시 연좌되어 삭탈관작 당하고 거지가 된 본부인 광산 김씨의 친정부모 김영석과 박씨 내외 역시 외면했다. 서재필은 김영석 내외에게 그대가 어떻게 나의 장인인가, 자신의 딸과 어린 외손을 외면한 금수에게 내가 왜 인사하느냐며 박대하고 내쫓았다. 그는 양복 차림으로 안경을 끼고 입궐하였으며, 입궐한 뒤에 고종의 앞에서 절하지 않은 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악수를 청하였다. 이를 본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충격을 받았고,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박정양, 박영효, 김홍집, 유길준, 윤치호 역시 경악했다. 영재 이건창은 이를 듣고 사람이 망가졌다며 그를 비난하였다. |
| 173 | 173 | |
| 174 | 174 | 그는 귀국 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서재필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고, 자기 이름을 필립 제이슨 또는 제이슨, 피제손으로 지칭하였다. 피제손은 그의 이름 서재필의 글자 순서를 거꾸로 한 필재서를 한글로 음역한 것이다. 1900년대 당시 조선에서는 이를 다시 제선 또는 피제선으로 음역하였다. |
| 175 | === 독립신문 발간 === | |
| 176 |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순한글과 영어로 인쇄,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대한민국 정부|정부]]로부터 창립 자금 4400원을 지원 받아 시작하였다. | |
| 175 | 177 | |
| 178 |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백성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한성 백성만을 위할 게 아니라 조선 전국 백성들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려 주려 함. | |
| 179 | ||
| 180 | 우리가 이 신문을 출판하는 것은 취리(이익을 취함)하려는 것이 아닌고로 값을 매우 헐하도록 하였고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하려 함이요, 또 귀절을 떼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게 하도록 함이라.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고 해도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펼 터이요, 사사백성이라도 무법한 짓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내 신문에 설명할 터임 | |
| 181 | ||
| 182 | 독립신문은 주 3회 발행되었다. 한편 그는 독립신문의 필진으로 박영효, 윤치호, 유길준, 이상재, 박정양, 이완용, 주시경, 김규식, 박중양 등을 영입했다. 그 중 주시경은 독립신문사 회계사무원 겸 교보원으로 임명하여 신문사의 재정과 교열을 담당하게 했다. 또한 언더우드 학당에서 언더우드 목사와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며 직업이 없어 고민인 김규식을 영입하여 취재기자로 고용하기도 했다. 독립신문을 편집할 때 그는 띄어쓰기를 반영하였다. 후일 1896년 4월 7일의 그의 독립신문 창건을 기념해 후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57년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 |
| 183 | ||
| 184 | 그는 독립신문의 논설이며 모든 것은 내가 혼자 원고를 썼다"고 회고하는데, 이보다 전인 윤치호가 1893년 그를 미국에서 만났을 때, "서재필이 모국어 쓰기와 말하기를 거의 잊어 버려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신문 발간 추진 과정에서 윤치호에게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번역 업무를 맡아줄 것을 제안하였다. | |
| 185 | ||
| 186 | 그는 신문을 발행하면서 전문 용어보다는 쉽게 한글로 풀이하도록 했는데, 처음에 300부를 찍었던 ‘독립신문’은 이내 발행부수 3,000부가 넘는 신문으로 발전했고, 10여명으로 시작된 독립협회는 이내 4,00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큰 단체로 발전하면서 국민적 개혁 운동 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 |
| 187 | === 지방자치제도 주장 === | |
| 188 | 1896년 4월 독립신문 설립 직후 그는 조선도 감사나 수령, 관찰사나 군수, 부윤 등은 주민이 직접 선출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주민이 직접 선출하는 지방관이 황제나 정부에서 임명하는 지방관보다 훨씬 낫고, 훨씬 자기 소신껏 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4월 15일~4월 16일에는 그는 독립신문 사설에도 지방관을 백성들이 직접 선출하게 할 것을 서술하였다. | |
| 189 | ||
| 190 | 189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발행신문인 독립신문이 자치단체장의 주민직선제를 골간으로 한 지방자치제를 주장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져 관심을 끌고 있다. 독립신문 논설에는 “관찰사와 고을 원은 정부의 내각 대신이나 협판(協辦 ·구한말 당시 궁내부와 각 부의 차관급)이 천거할 것이 아니라, 지방 백성이 투표로 뽑아야 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1991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91년 5월 이 내용을 발견한 경북대학교 물리학과 주창호 교수(54 ·양자역학)는 “독립신문 논설을 쓴 것으로 알려진 徐載弼 박사 과거의 1세기 전에 자치제를 거론했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주창호 교수는 한국교회사 관계 자료를 모아 오던 중 1991년 5월 독립신문 논설에서 지자제 주장 대목을 발견했다. | |
| 191 | === 아관파천 전후 === | |
| 192 | 한편 귀국 직후 그는 부패한 외척 출신을 관리로 중용하고 무속인을 신봉했던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멸했다. 또한 수구파 대신들의 탐욕과 비리를 거침없이 질타, 지적하는 한편 참정권을 그릇된 것으로만 이해하고, 갑신정변에 부정적이었던 민중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다. 윤치호에 의하면 서재필은 3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조선 사람을 어린애나 미개인 다루듯이 하여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가 미국인이어서 다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 |
| 193 | ||
| 194 | “서재필은 매사에 지시하기를 좋아하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력적이고 단호하고 기민했다. 원로 대신, 젊은 관료 할 것 없이 마치 버릇없는 애들을 타이르듯 말하거나 다루었으나 이들은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그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 |
| 195 | ||
| 196 | — 윤치호 일기 | |
| 197 | ||
| 198 | 윤치호, 유길준은 그에게 시정과 자제를 요구했지만 오히려 서재필의 말을 듣고 깊이 공감하는 점을 느끼면서 훈계를 그만둔다. 미국공사관 공사 알렌은 그에게 분노하더라도 겉으로는 웃으며 좀 외교적인 태도를 가지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 |
| 199 | ||
| 200 | 고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이상재, 윤치호, 남궁억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시민단체인 독립협회를 만들고 그 첫 사업으로는 독립문 건립 계획을 수립한다. 그는 또 고종에게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자주권을 주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독립협회의 동지들에게도 조선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민족이며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자주국가를 이루자고 주장하였다. '어서 빨리 청나라와 결별해야 된다. 그게 이 나라가 사는 길이다. 그리고 고루한 중국 서적과 유교 서적은 쓰지 말아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 |
| 201 | ||
| 202 |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일본은 조선의 유길준, 윤치호가 국민들을 개화한다는 취지로 신문을 제작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반외세, 교육 계몽, 자립, 실력 양성 등을 논설로 내보내는 것을 내심 경계하였다. 아관파천을 단행하는 고종을 보고 그는 조선에 가능성이 없음을 간파하고 단념하게 된다. 민중들은 개화파를 왕실에 저항하는 역적 정도로 취급하였고, 계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것과 민중의 냉대에 좌절한다. | |
| 203 | ||
| 204 | 1896년 3월 14일, 그는 중추원 고문으로 재직 중이면서 신문 담당 부서인 농상공부 임시 고문을 겸하게 되었다. 학부에서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에게 신문을 구독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내부에서는 각 지방관청에 구독을 명령함은 물론 우송 상의 혜택까지 부여했다.[77] 아관파천 전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침투에 한계를 느끼던 러시아는 조선에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확대하면서 만주와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폈다. 이에 서재필은 러시아의 대한정책과 동아시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쓰는 한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고문단의 철수를 요구했다. | |
| 205 | ||
| 206 |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여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언문'을 공식적인 인쇄 언어로 채택하며 띄어쓰기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내부적으로는 교육 확대 및 산업 발전을 강조하였고, 그를 위해 의무 교육 도입, 서양 과학 기술의 도입, 식생활과 위생의 개선에 대한 여러 가지 안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에 의존하면 조선이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외부적으로는 중립 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
| 207 | ||
| 208 |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일반 민초들이 쉽게 알아보게 하기 위해 한글 단어 사용을 신중히 고려하였고, 국문학자인 주시경을 영입하려 했고, 주시경의 노력에 힘입어 순한글로 간행할 수 있었다.[86] | |
| 209 | ||
| 210 | '독립신문'은 근대적 여론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87] 독립신문 창간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정동구락부, 정동파, 친미파 등으로 불린 영어파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뤄졌다.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 전용 '독립신문'으로 편집하고, 마지막 1면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로 편집하였다. 1898년 7월 4일자 독립신문에는 영어 교습 광고도 실려 있었다. "대한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고자 하나 학교에는 다닐 수 없고, 또 선생이 없어서 못 배우는 이가 많다 하기로, 영국 선비 하나가 특별히 밤이면 몇 시간씩 가르치려 하니, 이 기회를 타서 종용히 영어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독립신문사로 와서 물으면 자세한 말을 알지어다."라고 발표했다. | |
| 211 | ||
| 212 | 서재필은 조선인의 의식부터 개조해야 진정한 독립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고, 민권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설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당대에는 민주주의 체제의 등장이 어렵다고 내다봤다.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주의자들은 '독립신문'에서 “조선인의 타고난 체형은 동양 인종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자랑하거나 한때 ’상것’이라고 금기시했던 상민들의 석전(돌 싸움)을 긍정적으로 재조명했다. | |
| 213 | ||
| 214 | 또한 그는 독립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서구식의 개선된 생활도 보급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1896년 11월 14일자의 독립신문 칼럼에서 그는 조선사람들의 매너없는 행동을 지적, '남의 집에 갈 때 파, 마늘을 먹고 가는 것은 아니며(실례이며), 남 앞으로 지나갈 때는 용서해 달라고 하고 지나가야 한다'고 했고, 1896년 10월 10일자에서는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만 먹지 말고 소고기와 브레드도 먹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외부 문명과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 |
| 215 | ||
| 216 | 한편 일본에서는 독립신문이 반일 사상을 고취한다며 조선 정부에 압력을 놓았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독립신문을 일본이 서재필과 필진들을 앞세워서 운영하는 것으로 판단, 조선 정부에 압력을 넣어 독립신문 후원금은 점차 감소, 끊어지게 된다. | |
| 217 | ||
| 218 | 1897년(건양 2년) 3월 23일 조선 정부는 조선 정부의 외국인 고문관인 프랑스인 찰스 르 장르드 그찰스 레이트하우스, 존 맥레이 브라운와 서재필을 대한제국 중추원의 헌법개정 자문기관인 중추원 교전소 위원에 임명했다. | |
| 219 | ||
| 220 | 그는 독립신문을 통해 국내외의 사정, 고종과 대신들, 조정에서 결정한 사항, 국외의 정세를 한글로 번역하여 보도하고 그 옆면은 영어로 된 기사를 보도했다. 그는 조선 사회의 혼란의 원인을 무능한 탐관오리들과 인맥, 문벌, 연줄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또한 지방관이나 아전 등이 뇌물수수를 한 것이 적발되면 바로 신문에 보도하거나 특별 호외를 내서 사건의 전말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는 매관매직과 인맥, 문벌로 채용된 인사들, 탐관오리들이야 말로 민중의 고혈을 짜는 자들이라며 '매관매직을 하는 탐관오리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모조리 죽여야 하고, 그 시체를 실은 배도 바다 한 가운데서 침몰시켜야 한다.'며 신랄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 |
| 221 | === 교육, 청년 계몽과 토론 문화 보급 활동 === | |
| 222 | 1896년 내내 계몽강연 활동과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서재필은 목요일마다 매주 비용 한푼 받지 않고 무료로 배재학당에 출강해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 등의 젊은이들에게 세계사를 강의하면서 자유 민주주의와 참정권, 인권 개념, 사회 계약론 등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 때 이승만도 그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96년 11월 학생들은 13명의 회원으로 협성회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했는데, 1년 만에 회원이 약 200명으로 증가했다. 협성회에도 [[이승만]], 김규식 등의 학생지사들이 모여들었고, 서재필은 학생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 |
| 223 | ||
| 224 | 그 밖에 그는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조선 팔도를 순회강연하기도 했다. 조선을 순행할 때 그는 항상 미국인 경호원을 대동하고 돌아다녔다. 그는 배재학당과 언더우드 학당의 학생들에게 수업 이외에도 별도로 논리적 설득의 필요성과 토론하는 방법을 틈틈이 가르치기도 했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 2부는 갈고 닦은 협성회 토론 시범을 보이는 차례였다. 토론은 성공적이었고 서재필은 1년간 자신의 강연을 수강한 학생들 가운데 우등 1명, 이등 1명, 삼등 2명의 학생을 뽑아 각각 5원, 3원, 2원씩의 상금을 수여하였다. 그 순간 서재필은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서 영어로 연설하여 우등상을 받았을 때의 감격을 다시금 느꼈다 한다. | |
| 225 | ||
| 226 | 그는 '이제 이 학생들로 크게 변하여 조선을 위한 큰 인재가 될 것이다.'라고 확신하고 토론 기술과 방법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교정시켰다. 행사를 마친 학생들은 인근 배재학당으로 가서 다과로 연회를 열었다. 서재필은 귀국하며 세웠던 목표를 거의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연설했다. | |
| 227 | ||
| 228 | "오늘 여러분은 1년간의 공부를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크게 배웠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여러분에게서 크게 배웠습니다. 배움의 자세는 진지했고, 배움의 목표는 웅대했습니다. 그 기상과 성실을 토대로 여러분은 이제 조선을 크게 변화시키는 길로 나아가리라 굳게 믿습니다. 비록 오늘로 배재학당에서의 수업은 끝나지만 제 마음은 영원히 여러분 곁에서 함께할 것입니다." | |
| 229 | ||
| 230 | 학생들은 서재필의 연설이 끝나자 사은의 예로 준비한 선물인 영어 사전을 정중히 올렸다. 이때 그를 도운 이승만과의 관계는 1945년, 해방될 시기까지 한미협회를 주최하는데도 함께하며 오래도록 친분관계를 형성했다. 1920년경에 이르러 서재필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이기도 한 이승만에게 이군이라는 호칭 대신 이형 또는 우남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역시 서재필을 선생님이라 칭하였다. | |
| 231 | ||
| 232 | 협성회 공개 토론회의 성공은 그날 하객으로 참석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러시아에 다녀온 뒤 의기소침했던 윤치호에게 남다른 감격이었다. 이후에도 서재필은 협성회 활동과 계몽강연을 지도하며 전국을 순회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토론하는 방법과 절차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했고 초기에는 억지로 참석하였으나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토론하는 문화가 조성되었다. 서재필은 한국에 민권 사상, 참정권, 민주주의 시민의식이 싹트려면 일단 다른 사람의 뜻을 듣고, 토론, 조절하는 능력부터 배양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런 성공적인 토의 활동은 윤치호, 박정양, 유길준 등을 고무시키게 된다. | |
| 233 | === 독립문 건립과 독립협회 활동 === | |
| 234 | 서재필은 1896년 초부터 서울 영천에 있는 영은문이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치욕스러운 존재라고 하여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이 일을 위해 1896년 7월 2일 이완용을 비롯 남궁억·박영효·김가진·안경수 등과 함께 정부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결성하였다. 독립협회의 지도자는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양기탁, 이동녕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서재필은 독립협회 고문에 선출되어 윤치호와 함께 협회의 제반사무를 총괄하였다. 윤치호는 미국에서 서재필을 만났을 때 혹시나 조선의 정국이 변한다고 해도 서재필이 아픈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귀국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뜻밖에도 2년 후 한성 정동에서 재회하게 되자 윤치호는 놀라워했다. 그리고 윤치호와 서재필은 독립협회에서 의기투합하여 활동했다. | |
| 235 | ||
| 236 | 1897년 11월 20일 청나라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 맞은 편에 '독립문'이 들어섰다. 그는 미국에 있을 때 입수한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그린 그림을 소지하고 있었다. 독립협회가 기금을 모아 완공한 독립문은 서재필이 가지고 있던 화첩 중에서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그 규모를 축소하되 모양만은 똑같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 237 | ||
| 238 | 독립문은 서재필이 특별히 초빙한 건축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하였다. 후일 사적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곽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를 담당했다. 토목·건축공사는 한국인 건축 기사 심의석이 담당하고 중국인 노무자들이 노역을 맡았다.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 | |
| 239 | ||
| 240 | 후일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의 출신과 관련, 서재필은 그의 자서전에서 독립문 설계자를 스위스인 기사라고 언급했다. | |
| 241 | ||
| 242 | 그는 사대사상의 증거인 한성부 서대문방 현저동 모화관과 영은문을 헐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모화관은 조선 말기인 1897년 서재필 같은 독립협회 인사들에 의해 '독립관'으로 개축돼 독립협회 회관으로 쓰였다. | |
| 243 | ||
| 244 | 또한 독립협회보를 발간, 자유 민권활동과 참정권,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는 조선이 [[신라]], 고려, 조선의 1,200년간 중국의 속국이자 종으로 살아왔다며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국가임을 천명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 |
| 245 | ||
| 246 | 만민공동회 개최 (1897)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의회 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였다.[96] 그러나 정부 관료들은 그가 황제에 불충하는 선동을 한다고 비난했다. 대한제국 조정의 수구파는 서재필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가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해코지하였다가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여 중단하게 되었다. 한편 서재필은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배우고 유학을 가서 신문물을 보고, 보는 시야를 넓혀야 된다고 하였다. 이승만과 김규식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한 것도 서재필이었다. | |
| 247 | ||
| 248 | 1897년(고종 34년) 7월 30일의 한 강연에서 서재필은 "인간의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다[97]"는 발언을 하였다. 서재필은 인간의 권리는 하늘이 내린 것(천부인권)이며 아무런 잘못 없이 누구도 다른 인간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대한제국 중추원에서 대신의 물망에 적합한 인사들을 추천하고 그 명단에 서재필이 들어있는 것을 본 대신들은 그가 중추원을 사주하여 체제 전복을 꾀한다고 무고하였다. | |
| 249 | ||
| 250 | 그는 계속해서 배재학당과 언더우드 학당을 비롯, 학생 청년들을 모아 배재학당 회관에서 토론, 토의하는 법을 비용없이 무료로 가르쳤다. 또한 원산에 있는 원산학사에도 매주 주말에 방문하여 토론 기술과 화법을 가르쳤다. 그는 배움을 청하러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신분 차별을 두지 않고 받아들였다. | |
| 251 | === 노비 해방 운동 추진 === | |
| 252 | 서재필의 귀국 직후부터 노비 해방문제를 상의하던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들을 해방시킬 것을 결의하고, 1897년 10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노비 해방 문제를 상정시키기로 계획하고 1897년 11월 1일 독립협회의 토론에 노비제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여론을 공론화시켰다. | |
| 253 | ||
| 254 | 1897년 11월 1일의 제8회 토론회의 광경을 보면, 약 500명의 회중이 참석한 가운데 먼저 회원의 호명이 있었고, 다음 지난 회의 토론회 기록의 확인이 있었으며, 내빈 소개와 신입 회원 소개가 있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회장에게 노비 해방에 대한 것을 건의하였고, 11월 1일 독립협회 회의의 주제로 채택된다. 회장이 토론회의 주제, 이날의 주제는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 하는 것이 의리 상에 대단히 불가하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전 주의 선정에 의거하여, 주제에 대한 찬성편은 힘껏 주제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주제에 대한 반대편은 토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발언을 했으며, 토론회에 참석한 일반 회중은 토론에 자유롭게 토론하였다. | |
| 255 | ||
| 256 | 이 중 한 발언자가 용역은 '하나의 필요한 제도이며 노비 제도는 그러한 용역의 하나라고 발언하자, 회중의 하나가 일어서서 토론자가 명제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않다고 의사 규칙 위반을 들어 항의했으며, 많은 회원들이 주제의 찬성편에 서서 발언하였다. 1897년 11월 1일 윤치호는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설명하는 연설을 하고, 서재필은 미국에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 들의 참상을 들어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주제에 대한 회중의 의견을 투표에 붙인 결과 만장일치로 주제에 대한 찬성이 의결되었으며, 주제에 찬성한 사람은 자기가 실제로 소유한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도록 하자는 동의가 가결됨으로써 토론회를 끝내었다.[100] 독립협회의 결의에 따라 한성부의 양반 가에서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 |
| 257 | ||
| 258 | 윤치호와 서재필은 각각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재산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다녔다. 시중에서는 이들의 사상을 위험한 사상이며 반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해괴한 요설, 궤변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97년 11월 1일의 노비해방에 대한 기습 토론 이후 노비 해방 풍조가 한국사회에 점차적으로 확산되었다. | |
| 259 | ||
| 260 | 1898년(고종 35년) 1월 초, 수구파 대신들이 보낸 자객이 서재필의 거처를 내습했으나, 그가 고용한 미국인 경호원의 총격을 받고 달아났다. 1898년 3월 8일 김홍륙 등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독살하려 하자, 정교와 최정식 등은 그에게 시골로의 피신을 권고하기도 했다. | |
| 261 | ||
| 262 | 은신처에서 그는 척신파 대신들의 김홍륙 사건을 계기로 연좌 제도와 노륙형을 부활하려는 움직임을 규탄, 항의하는 소를 지어 올렸다. 은신해있던 그는 윤치호와 함께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를 주관한다. 1898년 3월 16일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가 수원부 유수로 임명되면서 공직과 협회 직을 겸할 수 없으므로 서재필이 회장이 되었다. 결국 그해 5월 14일 서재필이 추방령에 의해 용산을 출발, 미국으로 추방되자 그는 윤치호에게 독립협회의 권한을 일임하게 된다. | |
| 263 | === 정부의 탄압과 외세의 공격 === | |
| 264 | 당시 주조선러시아공사 스페이어는 독립협회가 러시아의 절영도 할양 요구를 반대하는 구국선언 상소를 올리고 언론에 공표한 것을 두고 주조선미국공사 알렌을 방문해 항의하고 서재필의 소환을 강력히 요청했다. 러시아 공사관의 계속된 항의에 결국 알렌은 서재필이 봉급을 받는 즉시 출국시키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 주미러시아 대사 캐시니 백작은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에게 이를 전하고 서재필의 소환을 요청했다. 일본 역시 일본의 정부고문으로 와 있는 미국인 윌리엄스를 설득, 미국 정부에 서재필의 소환을 강력히 요청하게 했다. | |
| 265 | ||
| 266 | 친러정권과의 대립 외에도 보수파가 다시 정권을 잡자 서재필을 사형에 처하거나 살해할 모의가 진행되었으나 미국 시민권자라는 외교문제 비화에 엮일 수 있다는 외교에 밝은 일부 보수파 인사들의 설득으로 살해위기는 모면되었다. 고종 황제에게 그는 자신을 "외신"이라 칭했고, 고종 앞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등, 완전히 미국인 행세를 한 점 역시 눈밖에 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1898년 러시아 및 청나라, 일본 등의 서재필 추방 압력과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정부의 권유로 중추원 고문 직에서 해고되고, 1898년 5월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 |
| 267 | ||
| 268 | 미국정부는 서재필이 지도하는 독립협회가 열강의 이권침탈을 비판하는 것을 보고 그가 미국 시민권자임에도 그와 같은 행위를 함을 그를 불온시하기 시작했다. 한편 귀국 직후부터 그의 신문 발행과 토론, 참정권 주장을 이상한 사상으로 여긴 일부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가 서양에 가서 이상한 약물을 먹었다, 귀신이 씌워 돌아와서 사람들을 오염시킨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 |
| 269 | ||
| 270 | 훗날 서재필은 '어느 날 미국 공사 알렌이 나를 찾아와 황제와 정부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니 신변에 위해가 미치기 전에 속히 가족과 함께 귀국할 것을 권했다. 나는 내가 떠난 뒤라도 성과를 거둘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할 수 없이 다시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회고하였다. 서재필은 거절했고, 주조선미국공사 알렌은 서재필을 귀국시키기 위해 그의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의 친정어머니를 설득하여 위독하다는 거짓 전보를 보내게 했다. 뮤리엘이 조속한 귀국을 재촉하는 한편 대한제국 정부는 그를 중추원 고문에서 해촉하면서 그의 출국을 요청했다. 그는 이 사실을 알렸고, 독립협회는 조정에 항의공문을 발송했으며, 남대문 앞에서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열고 정부의 행위를 강력 규탄했다. 서재필은 자신을 고문 직으로 초빙할 마음이 확고하다면 체류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대한제국 정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 |
| 271 | ||
| 272 | 자객을 보내 자신을 암살 또는 제거하려한 대한제국 정부와 친러파, 친일파 정객들, 자신을 정신이상자, 역적 취급하는 민중들에 대한 강렬한 반감과 적개심을 품은 서재필은 한때 독립신문을 일본이나 러시아에 매각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윤치호, 이상재의 만류로 독립신문 매각은 단념한다. | |
| 273 | === 의회설립운동 참여 === | |
| 274 | 1898년 3월 서재필·윤치호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간에 의회설립문제가 논의되고, 4월 3일 독립협회토론회에서 ‘의회원을 설립하는 것이 정치상에 제일 긴요함’이라는 주제로 의회의 필요성을 공식 거론함으로써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은 표면화되었다. | |
| 275 | ||
| 276 | 독립협회 고문 서재필은 1898년 4월 30일자 『독립신문』 논설을 통해, 세계 개화 각국의 선례에 따라 의회를 설립하면, 첫째 정책의 결정업무(의회)와 집행업무(내각)가 분업화되어 국정에 효율성을 기할 수 있게 되고, 둘째로 민의를 국정에 반영할 수 있어 국민과 국가가 일체감을 갖게 되며, 셋째로 관과 민이 협력하여 국가와 왕실의 기초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취지하에 의회설립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 | |
| 277 | ||
| 278 | 1898년 7월 3일과 12일 독립협회는 구주 각국의 상하의원의 설치는 만국통행의 규범이라 하고, 홍범의 준행과 인재의 등용 및 민의의 채용을 주장하면서 의회설립을 완곡하게 주장하였다. 7월 중순에 이르러 의회설립문제와 관련하여 조야의 여론은 일단 중추원의 의회식 개편으로 기울어졌고, 7월 하순에는 중추원을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개편한다는 설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와 민중이 수구파의 7대신(신기선, 이인우, 심순택, 윤용선, 이재순, 심상훈, 민영기)을 탄핵하여 모두 퇴진시키고 내각교체를 단행시킴으로써 의회설립운동은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다. | |
| 279 | ||
| 280 | 독립협회는 의회설립운동이 계획대로 진전되자 국정의 기본방향을 관민이 협의하기 위한 관민공동회 개최를 정부에 제의하였다. 1898년 10월 29일 관민대공동회에서 6개조의 국정개혁강령(헌의6조)을 결의하고 정부대신을 통해 국왕의 재가를 얻었다. | |
| 281 | ||
| 282 | 그러나 1898년 11월 4일 밤 조병식·이기동 등 수구반동세력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고종을 충동하여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전복시키고 독립협회를 혁파시켰다. 이로써 눈앞에 둔 의회식 중추원의 실시도 좌절되고 말았다. | |
| 283 | === 출국 === | |
| 284 | 1897년에 들어와서 러시아의 적극적인 간섭정책과 대한제국 수립을 통한 황제권 강화는 서재필과의 대립을 야기하였다. 이때부터 정부는 그를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서재필은 남은 계약기간의 봉급을 모두 지불하면 해약하고 출국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조선정부에 계약 위반과 해촉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 계약 위반에 따른 보상으로 10년 계약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왔으나 아직 7년 10개월이 남았으니 그에 해당하는 월급 2만 8,200원과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 600원을 포함해 총 2만 8,800원을 조선조정에서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조선 조정에서는 비용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부분 수용했다. 그는 2만 4,400원의 위약금을 지불받았다. | |
| 285 | ||
| 286 | 그는 윤치호에게 독립신문을, 이상재, 양기탁, 이승만, 이동녕 등에게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맡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에 윤치호는 서재필이 출국하면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독립신문 등을 3년도 유지시키기 어렵다고 했는데, 그는 최소한 1년 이상은 유지시킨다면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유지가 어렵더라도 1년 이상만 협회 등을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 |
| 287 | ||
| 288 | 1898년 1월 15일 가토 변리공사가 西 외무대신에게 보낸 서신에는 서재필이 독립신문의 소유권을 일본에 매각하려던 계획과 일본 공사측이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104] 하지만 1898년 5월 23일 가토 변리공사의 서신 내용에 따르면 독립신문-일본 쌍방이 각각 여러 가지의 사정으로 인하여 독립신문의 양도는 성사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추진하는 등 과거사 규명에 앞장서온 민족문제연구소의 김민철 연구실장은 "서재필과 독립신문이 친일적 논조를 펼친 것은 러시아의 침략을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 |
| 289 | ||
| 290 | 1898년(고종 35년) 5월 14일 그는 독자와 동포들에게 올리는 인사말을 남기고 독립협회 간부들의 환송 속에 서울서 낳은 큰 딸 스테파니와 부인을 대동한 채 용산에서 인천행 배에 올랐다. 5월 27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해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향했다. 자신을 박해하고 생명을 노린 대한제국 조정에 대해 분노한 서재필은 주변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없다고 하여 가는 것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인천항을 통해 한국을 떠난다. 한편 그가 조선 조정을 "귀국 정부"라고 지칭하자 예상 외의 발언에 그를 전송하러 나왔던 윤치호, 이승만, 박영효, 박정양, 이상재, 김규식 등은 충격을 받고 말문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 |
| 291 | ||
| 292 | 한편 자신이 운영하는 독립신문에 입사한 김규식 등 청년들에게 미국으로 유학할 것을 설득, 권고하여 그들을 미국으로 유학보내는 데 성공한다. 이승만, 김규식 등이 미국으로 유학한 뒤 이들의 학비를 일부 송금해주기도 하였다. 그가 출국하고 그해 12월 26일 독립협회도 결국 해산되고 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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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4 | 1898년 12월 10일 최익현이 서재필, 유길준의 사형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날 최익현의 상소를 필두로 1900년까지 거의 연일 서재필과 유길준, 김윤식 등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는 상소가 올려졌다. 1900년 윤용선은 그가 을미사변에 개입된 인물이라며 처벌할 것을 청하는 상소까지 올리기도 했다. | |
| 176 | 295 | == 본 문서 정보 == |
| 177 | 296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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