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14 vs r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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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440 | 440 | 그는 아내를 잃은 고통을 잊기 위해서도 열심히 일에 전념하였다. 큰 딸 스테파니는 미국인에게 시집가서 잘 살고 있었으나, 둘째딸 뮤리엘은 미혼으로 서재필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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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2 | 442 |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난 후 그는 집에 오면 여가를 이용하여 둘째 딸 뮤리엘과 함께 테니스를 즐기기도 하였으며, 때때로 야구 같은 것으로 가족과 함께 하기도 했다. 그는 주말에도 놀거나 나태하지 않았다. 부지런한 생활을 즐겨 채소밭 가꾸는 일에 열중하였고, 특히 그는 신문 읽기에 열심이었는데, 그것은 국제 정세의 움직임에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1945년, 다시 성 요셉병원에서 근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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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6 | 광복 직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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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3 | === 광복 직후 ==r | |
| 448 | 444 |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그는 미국에서 한국의 광복과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접하였다.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고 10월, 미국에 체류하던 이승만은 비행기편으로 필리핀 마닐라와 일본 도쿄를 경유하여 귀국했다. 서재필은 출국하는 이승만을 배웅하러 필라델피아 공항까지 직접 마중나와 이승만 내외를 전송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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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0 | 446 | 1946년 10월, 미군정에 의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관선)으로 선출, 그 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취임하였다. |
| 447 | === 귀국 === | |
| 448 | 1947년 1월 25일, 이승만이 '미 국무성내의 일부 관리가 누구인지는 지적하고 싶지 않으나, 이들은 공산주의에 기울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발표하자, 하지는 굿펠로우 대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the old S.O.B.가 나에게 한 배신 행위는 삭이기 힘들고 비통한 경험'이었다고 쓸 정도로 이승만에게 격분하였다. 이후 하지는 이승만의 대안 모색에 매달려 서재필을 이승만의 대안으로도 고려하였다. 미군정은 동위원회 재개를 준비하면서, 이승만·[[김구]]에 맞서는 지도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재필을 급히 귀국시키고자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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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2 | 귀국 | |
| 450 | 미군정은 김규식과 서재필의 제휴, 협력을 은근히 바랐다. 서재필이 일부 깨인 민중들 사이에 인기가 높고 존경을 받고 있음을 확인한 미군정은 두 사람의 제휴가 성립되면, 그 무렵 미군정이 뒷받침하던 김규식 노선이 현실적으로 큰 지지를 얻게 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김규식도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고 있었다. 과도입법의회 의장 김규식의 추천을 받고 서재필에게 여러 차례 귀국 요청을 하였다. 서재필은 기본적으로 김규식의 노선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나이가 많음을 내세우며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를 사양했다. | |
| 453 | 451 | |
| 454 | 1947년 | |
| 452 | 1947년 2월 27일, 서재필은 하지 중장의 추천으로 군정최고고문에 추대되었다. 그는 좌우합작운동에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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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6 | 1947년 | |
| 454 | 1947년 3월 11일 서재필 박사 환국을 환영하기 위하여 을지로2가 을우회관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를 대표한 160명의 서박사환국환영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이시영, 부위원장은 이극로, 홍명희, 홍남표, 윤기섭, 김항규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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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8 | 미군정은 김규식과 서재필의 제휴, 협력을 은근히 바랐다. 서재필이 일부 깨인 민중들 사이에 인기가 높고 존경을 받고 있음을 확인한 미군정은 두 사람의 제휴가 성립되면, 그 무렵 미군정이 뒷받침하던 김규식 노선이 현실적으로 큰 지지를 얻게 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39] 김규식도 서재필의 귀국을 원하고 있었다. 과도입법의회 의장 김규식의 추천을 받고 서재필에게 여러 차례 귀국 요청을 하였다. 서재필은 기본적으로 김규식의 노선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나이가 많음을 내세우며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를 사양했다.[39] | |
| 459 | ||
| 460 | 1947년 2월 27일, 서재필은 하지 중장의 추천으로 군정최고고문에 추대되었다.[136] 그는 좌우합작운동에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 |
| 461 | ||
| 462 | 1947년 3월 11일 서재필 박사 환국을 환영하기 위하여 을지로2가 을우회관(乙友會館)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를 대표한 160명의 서박사환국환영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이시영, 부위원장은 이극로, 홍명희, 홍남표, 윤기섭, 김항규였다.[13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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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4 | 456 | 몇 차례 미군정의 요청을 고사했던 서재필은 미군정청 사령장관 하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군정청 최고정무관 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특별의정관으로 초빙받아 1947년 7월 1일, 미국을 출발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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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6 | 458 | 1947년 7월 1일 귀국 직후 하지 사령관 및 이승만 내외와 함께.1947년 7월 1일, 귀국 후 김규식과 여운형의 마중을 받고 있는 서재필. |
| 467 | 459 | |
| 468 | 1947년 7월 1일 오후 4시, 서재필은 49년만에 85세의 고령으로 뮤리엘 영애를 동반하고 해방된 고국에 귀환하였다. 부두에는 이승만,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민정장관, 김형민 서울시장, 김용무 대법원장 등이 마중을 나왔다. | |
| 460 | 1947년 7월 1일 오후 4시, 서재필은 49년만에 85세의 고령으로 뮤리엘 영애를 동반하고 해방된 고국에 귀환하였다. 부두에는 이승만,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민정장관, 김형민 서울시장, 김용무 대법원장 등이 마중을 나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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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0 | 1947년 7월 1일, 서재필과 | |
| 462 | 1947년 7월 12일 오후 2시, 서울운동장에서 '서재필귀국환영대회'가 개최되었다. 시민과 각 단체대표자 등 5만여명이 참석, 김규식의 개회사가 있었고, 이승만의 환영사가 있었다. 서재필은 서투른 한국어로 답사를 하였다. 귀국 인사로 서재필은 '자신이 한국말을 잊어버렸으며 한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한국 인민들을 도와주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권한이 없는 사람이며, 다만 하지 사령관에게 진언할 따름이다'고 덧붙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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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2 | 1947년 7월 12일 오후 2시, 서울운동장에서 '서재필귀국환영대회'가 개최되었다. 시민과 각 단체대표자 등 5만여명이 참석, 김규식의 개회사가 있었고, 이승만의 환영사가 있었다. 서재필은 서투른 한국어로 답사를 하였다.[139] 귀국 인사로 서재필은 '자신이 한국말을 잊어버렸으며 한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하였다.[140] 그러나 '힘을 다하여 한국 인민들을 도와주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권한이 없는 사람이며, 다만 하지 사령관에게 진언할 따름이다'고 덧붙였다.[1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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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4 | 464 | 한편 그는 윤치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귀국 직후 충청남도 아산의 윤치호 묘소를 참배하였다. 기자회견장에서 의친왕 등이 존재하니 그들을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는 기자들의 요청을 그는 거절하였다. 귀국 직후 김규식, 여운형, 김성수, 김구 등을 찾아 면담하기도 하고, 김성수, 이광수, 조병옥 등을 만나 그들로부터 국내 정세를 접했으나, 파벌 다툼이 여전한 것을 보고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파벌 다툼은 여전하다며 한탄하였다. |
| 465 | === 귀국 후 정치활동 === | |
| 466 | 1947년 7월 3일, 하지중장의 최고정치고문으로 조미특별의정관이라는 신설된 직책에 취임하였다. 서울 소공동의 조선호텔에서 잠시 숙박하다가 미 군정청에서 내준 군정청 직원 숙소로 이주하였다. 이후 하지 미육군 중장에게 자문을 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서재필의 집무실은 중앙청의 207호실이었다. 그는 매일 출근해 성실하게 근무하였다. 그리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방송에도 출연하여 매주 금요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주로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설명하고 우리국민이 걸어야 할 길을 강의했다. 서재필의 방송과 라디오 그의 연설은 영어로 이뤄졌기 때문에 손금성 박사가 꼭 한국어로 통역을 하거나 다른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보도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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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6 | 귀국 후 정치활동 (1947~1948)편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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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8 | 1947년 7월 3일, 하지중장의 최고정치고문으로 조미특별의정관이라는 신설된 직책에 취임하였다.[133] 서울 소공동의 조선호텔에서 잠시 숙박하다가 미 군정청에서 내준 군정청 직원 숙소로 이주하였다. 이후 하지 미육군 중장에게 자문을 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였다.[141] 서재필의 집무실은 중앙청의 207호실이었다. 그는 매일 출근해 성실하게 근무하였다.[140] 그리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방송에도 출연하여 매주 금요일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주로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를 설명하고 우리국민이 걸어야 할 길을 강의했다. 서재필의 방송과 라디오 그의 연설은 영어로 이뤄졌기 때문에 손금성 박사가 꼭 한국어로 통역[140] 을 하거나 다른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보도되었다. | |
| 479 | ||
| 480 | 468 | 1947년 8월 15일, 해방 2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481 | 469 | |
| 482 | “해방 2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완전독립을 하지 못하고 있음은 매우 유감되는 바이다. 우리는 당파 정치운동을 초월하여 먼저 국권을 회복해야 할 것이며 그 정부가 조선인민으로 조직된 후에 정당이고 정치운동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국권도 회복하지 못하고 정부도 없으며 정책이니 정당이니 하고 또는 정권운동을 함은 좋지 못하다. | |
| 470 | “해방 2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완전독립을 하지 못하고 있음은 매우 유감되는 바이다. 우리는 당파 정치운동을 초월하여 먼저 국권을 회복해야 할 것이며 그 정부가 조선인민으로 조직된 후에 정당이고 정치운동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국권도 회복하지 못하고 정부도 없으며 정책이니 정당이니 하고 또는 정권운동을 함은 좋지 못하다.” | |
| 483 | 471 | |
| 484 | 472 | 1947년 11월 5일, 서재필은 산업 부흥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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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6 | “50년 전 조선보다 오늘의 조선은 약간 발전되었으나 아직 발전의 정도는 미미하다. 조선에 와보니 아무런 방향과 목적 없는 나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에만 떠들고 날뛴다. 할일 없이 이 당 | |
| 474 | “50년 전 조선보다 오늘의 조선은 약간 발전되었으나 아직 발전의 정도는 미미하다. 조선에 와보니 아무런 방향과 목적 없는 나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에만 떠들고 날뛴다. 할일 없이 이 당, 저 당 돌아다니며 소리를 높이고 걸핏하면 만세만 부른다. 그들은 누가 생활을 보장해 주는지 알 수 없는 일이며 만세만 아무리 불러도 우리의 독립에는 소용 없는 노릇이다. 정부란 인민을 살게 해 주는 것이며, 인민은 조선의 주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한대로만 닮지말고 새로 진보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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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8 | 청년들 가운데는 패기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늙은 사람들을 보면 5년전의 늙은 사람들과 꼭같다. 이래서 우리는 진보가 적다. 조선의 인구는 세계 67개중 열 세째라는 훌륭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조선인의 부력 | |
| 476 | 청년들 가운데는 패기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늙은 사람들을 보면 5년전의 늙은 사람들과 꼭같다. 이래서 우리는 진보가 적다. 조선의 인구는 세계 67개중 열 세째라는 훌륭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조선인의 부력은 끝으로 둘째인가 첫째라고 한다. 우리는 밥을 굶고서는 독립의 즐거움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먹고 살아야 하며 도덕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해 산업을 부흥시키고 도덕있는 나라가 되면 우리는 무력이 없어도 외력의 침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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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0 | UN을 통해 조선인의 대표자들을 투표로 선거할 때, 조선 인민들은 돈주고 술사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욕심없는 진정한 애국자들을 선거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투표할 권리는 6개월 이내에 올 것이다. 나는 행운인지 불행인지 조선사람이며 조선의 독립발전은 오로지 산업의 부흥에 있는 것이다. | |
| 478 | [[UN]]을 통해 조선인의 대표자들을 투표로 선거할 때, 조선 인민들은 돈주고 술사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욕심없는 진정한 애국자들을 선거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투표할 권리는 6개월 이내에 올 것이다. 나는 행운인지 불행인지 조선사람이며 조선의 독립발전은 오로지 산업의 부흥에 있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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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2 | 48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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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4 | 1948년 3월 14일, 신민일보 사장 신영철과의 면담에서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박사가 조선에 와서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가라며 노골적인 반소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조선에 있어서의 미소관계는 험악하여지고 하지 중장의 입장은 대단히 곤란하여진 것입니다.' 전쟁 가능성에 대해서는 '절대로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파괴주의자이니 파괴주의자가 어찌 애국애족하며 건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류는 평화를 희구하고 있고 평화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지옥인데 자기에게는 비누 한 장 변변히 만들 능력도 없으면서 남에게 전쟁을 권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 |
| 482 | 1948년 3월 14일, 신민일보 사장 신영철과의 면담에서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박사가 조선에 와서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가라며 노골적인 반소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조선에 있어서의 미소관계는 험악하여지고 하지 중장의 입장은 대단히 곤란하여진 것입니다.' 전쟁 가능성에 대해서는 '절대로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파괴주의자이니 파괴주의자가 어찌 애국애족하며 건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류는 평화를 희구하고 있고 평화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지옥인데 자기에게는 비누 한 장 변변히 만들 능력도 없으면서 남에게 전쟁을 권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 |
| 495 | 483 | |
| 496 | 1948년 3월 18일, 서재필이 5·10 선거 반대의사를 표명하자 총선거대책위원회, 민족통일총본부,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 |
| 484 | 1948년 3월 18일, 서재필이 5·10 선거 반대의사를 표명하자 총선거대책위원회, 민족통일총본부,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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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8 | 486 | 1948년 4월 10일, 기자회견에서 서재필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
| 499 | 487 | |
| 500 | 488 | (問) 총선거에 대한 박사의 견해 여하? |
| 501 | 489 | (答) 군정은 우리 정부가 아니므로 우선 정부를 세워야 하겠다. 그러나 통일된 정부를 전제로 한다. |
| 502 | 490 | (問) 양 김씨(김구, 김규식)를 중심으로 남북협상이 진전되고 있는데 박사의 전망은? |
| 503 | (答) 그 정신은 극히 좋다. 남북협상이 잘 되어서 통일되기를 바란다. 통일만 된다면 나도 따라가겠다. 이에 대한 사전의 기우는 불가하다. | |
| 491 | (答) 그 정신은 극히 좋다. 남북협상이 잘 되어서 통일되기를 바란다. 통일만 된다면 나도 따라가겠다. 이에 대한 사전의 기우는 불가하다. | |
| 504 | 492 | |
| 505 | 493 | 1948년 5월, 대한민국 국회 개원 직전 과도입법의원이 해산됨에 따라 과도입법의원 의원 직에서 면직되었다. |
| 506 | 494 | |
| 507 | 495 | 1948년 5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서재필은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잘 되었다'고 호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508 | 496 | |
| 509 | “선출된 사람들이 어떠한 인물들인 가는 잘 모르나, 그들은 자기의 어떠한 권리 일도일군 | |
| 497 | “선출된 사람들이 어떠한 인물들인 가는 잘 모르나, 그들은 자기의 어떠한 권리 일도일군 혹은 자당의 이익보다도 전국민의 복리를 위하여 헌신, 노력해야 할 것이다.” | |
| 510 | 498 | |
| 511 | 499 | 또 기자의 '이번 선거는 남북분열을 조장시키는 것이라하여 다수의 정당, 사회 단체가 보이콧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
| 512 | 500 | |
| 513 | “물론 남북이 통일된 선거로써 완전한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은 누구나 다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이 일치되지 않는 것을 어찌하랴. 우리가 남의 힘으로 해방된 탓으로 남북이 양단되었고, 그동안 3년 동안이나 힘을 양성해 보았으나 우리는 해방전보다 조금도 큰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마 동포가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힘은 있어도 타국에 맞설 힘은 조금도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선거에 의하여 힘을 모으는 것과 우선 남의 힘을 빌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남북회담과 같은 우리 민족의 손으로 완전독립을 찾자는 행동은 그 성과가 있고 없고를 불문하고 1년이나 2년을 두고 계속해도 조금도 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 |
| 501 | “물론 남북이 통일된 선거로써 완전한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은 누구나 다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이 일치되지 않는 것을 어찌하랴. 우리가 남의 힘으로 해방된 탓으로 남북이 양단되었고, 그동안 3년 동안이나 힘을 양성해 보았으나 우리는 해방전보다 조금도 큰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마 동포가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힘은 있어도 타국에 맞설 힘은 조금도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선거에 의하여 힘을 모으는 것과 우선 남의 힘을 빌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남북회담과 같은 우리 민족의 손으로 완전독립을 찾자는 행동은 그 성과가 있고 없고를 불문하고 1년이나 2년을 두고 계속해도 조금도 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 |
| 502 | === 대통령 추대운동과 사양 === | |
| 514 | 503 | |
| 515 | 대통령 추대운동과 사양 (1948)편집 | |
| 516 | ||
| 517 | 1947년, 연설 중인 서재필. 오른쪽 옆에 조병옥이 보인다.1947년,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과 조카 서호석[148]. | |
| 518 | ||
| 519 | 504 | 5·10 총선이 끝나고 제헌국회가 개원한 그 다음날, 정일형, 백인제, 이용설 등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이 서재필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149] |
| 520 | 505 | |
| 521 | 506 | 1948년 5월 29일 '反단독선거론 측에서 단독정부론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서재필의 정계출마 공작을 일으키고 여기에 김구·김규식도 가담한 것 같다'는 풍설에 대해 서재필은 '원칙적으로 남북통일운동은 옳으나 금번 그러한 운동[150]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라고 말하였고, 김구·김규식은 '우리가 단선을 반대한 사람들인 만큼 단정에 관여할 이유가 만무하며 그런 운동은 전연 사실무근이다'라고 말하였다.[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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