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15 vs r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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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1 | 501 | “물론 남북이 통일된 선거로써 완전한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은 누구나 다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이 일치되지 않는 것을 어찌하랴. 우리가 남의 힘으로 해방된 탓으로 남북이 양단되었고, 그동안 3년 동안이나 힘을 양성해 보았으나 우리는 해방전보다 조금도 큰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마 동포가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힘은 있어도 타국에 맞설 힘은 조금도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선거에 의하여 힘을 모으는 것과 우선 남의 힘을 빌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남북회담과 같은 우리 민족의 손으로 완전독립을 찾자는 행동은 그 성과가 있고 없고를 불문하고 1년이나 2년을 두고 계속해도 조금도 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
| 502 | 502 | === 대통령 추대운동과 사양 === |
| 503 | 503 | |
| 504 | 5·10 총선이 끝나고 제헌국회가 개원한 그 다음날, 정일형, 백인제, 이용설 등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이 서재필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 |
| 504 | 5·10 총선이 끝나고 제헌국회가 개원한 그 다음날, 정일형, 백인제, 이용설 등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이 서재필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 |
| 505 | 505 | |
| 506 | 1948년 5월 29일 '反단독선거론 측에서 단독정부론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서재필의 정계출마 공작을 일으키고 여기에 김구·김규식도 가담한 것 같다'는 풍설에 대해 서재필은 '원칙적으로 남북통일운동은 옳으나 금번 그러한 운동 | |
| 506 | 1948년 5월 29일 '反단독선거론 측에서 단독정부론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서재필의 정계출마 공작을 일으키고 여기에 김구·김규식도 가담한 것 같다'는 풍설에 대해 서재필은 '원칙적으로 남북통일운동은 옳으나 금번 그러한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라고 말하였고, 김구·김규식은 '우리가 단선을 반대한 사람들인 만큼 단정에 관여할 이유가 만무하며 그런 운동은 전연 사실무근이다'라고 말하였다. | |
| 507 | 507 | |
| 508 | 남한 단독 정부 수립 결정되고 대통령 선거 일정이 잡히자, 1948년 6월 11일 흥사단계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최고 정치지도자로 추대하여 새로운 정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서재필에게 간원문을 보냈다. '지금 조국이 요구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민의 뜻을 알아서 이에 충실히 순종하는 정직한 민주주의적 지도자입니다. 이 나라에는 그러한 인격자가 한분 계시니 그는 서박사입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서재필이 '정계 최고지도자로 출마하시기를'간청했다. | |
| 508 | 남한 단독 정부 수립 결정되고 대통령 선거 일정이 잡히자, 1948년 6월 11일 흥사단계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최고 정치지도자로 추대하여 새로운 정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서재필에게 간원문을 보냈다. '지금 조국이 요구하는 사람은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민의 뜻을 알아서 이에 충실히 순종하는 정직한 민주주의적 지도자입니다. 이 나라에는 그러한 인격자가 한분 계시니 그는 서박사입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서재필이 '정계 최고지도자로 출마하시기를'간청했다. 정인과, 백인제 외에도 흥사단 계열 중 최능진과 최능진 계열 인사들이 서재필의 대통령 후보자 출마 운동을 주도했다. | |
| 509 | 509 | |
| 510 | 대 | |
| 510 | 1948년 6월 20일, 서재필은 흥사단계 독립협회가 보낸 간원문(懇願文)에 대해 '조국의 독립이 되느냐 안되느냐의 위기에 서 있는 이때 이러한 정당조직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를 더욱 혼란케 할 뿐이오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라는 말로 이를 거절하였다. | |
| 511 | 511 | |
| 512 | 1948년 6월 2 | |
| 512 | 그럼에도 1948년 6월 24일 서박사추대연합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7월초, 백인제, 최능진, [[김대중]]을 비롯한 1,929명이 서재필에게 '한국 초대 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하니 대통령 출마를 승낙해 달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보냈으나,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노라'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한편 서재필 추대 운동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에 의해 공개적으로 견제됐다. 6월 24일 조선언론인협회에서 서재필, 안재홍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 |
| 513 | 513 | |
| 514 | ||
| 514 | 1948년 7월 4일 서재필은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피력하였다. '나는 조선 각지로부터 나에게 조선 대통령 입후보를 요청하는 동시에 내가 출마하는 경우 나를 지지하겠다는 허다한 서신을 받았다. 나는 그들의 후의에 깊이 감사하는 한편, 나는 과거에 있어 그 관직에 입후보한 일 없으며 지금도 그리고 장래에도 그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그들에게 전달해야 할 것이다. 설혹 나에게 그 지위가 제공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터이다. 나는 미국 시민이며 또한 미국 시민으로 머무를 생각이다.' | |
| 515 | 515 | |
| 516 | 1948년 7월 | |
| 516 | 1948년 7월 20일,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로 추천되어 1표를 얻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 서우석은 서재필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후보자격이 없다고 주장해 서재필이 득표한 1표를 무효처리 시키는 데 앞장섰다. | |
| 517 | 517 | |
| 518 | 1948년 | |
| 518 | 1948년 8월 14일, 서재필은 다음과 같은 해방 3주년 축사를 하였다. '권리와 책임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며 어떠한 독재자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니 국민은 감정의 싸움을 포기하고 합심하여 신정부를 육성하여 가기를 바란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조선 민족이 참으로 자성하여 진정한 독립정부로 발전하면 죽어서라도 나는 만족하겠다.' | |
| 519 | === 출국 === | |
| 520 | 1948년 8월 29일, 서재필은 고국을 떠나기 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8·15선거는 옳다고 볼 수 없다', '신정부는 무엇보다도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 청년에게 직장을 주라', '조선 체류 중 가장 기쁜 것은 민족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권을 얻은 것이고, 슬픈 것은 청년들이 일이 없어 1일의 식사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할 일 없이 정당만 왕래하며 쓸 데 없는 건의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마라. 정부에게 맹종만 하지 말고 정부는 인민이 주인이라는 것이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망각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 하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나의 평생 소원이다.' 등의 답변을 하였다. | |
| 519 | 521 | |
| 520 | ||
| 522 |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나기 수일 전 기자 김을한에게 '우리 한국 사람은 단결할 줄을 모르고 당파 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갑신정변 때나 지금이나 50년이 지났지만 그 점만은 똑같으니 한심한 일이오'라고 하였다. 또한 과도입법의원 선거와 시도지사 선거로 선출된 입법의원과 시도지사를 상관처럼 깎듯이 대하는 시민들에게 선거로 뽑은 것은 국민의 대리인이지 윗 사람이 아닌데, 윗 사람처럼 깎듯이 존대한다.'며 잘못을 지적했지만 시민들은 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 |
| 521 | 523 | |
| 522 | ||
| 524 | 1948년 9월 10일, 미군정청 최고의정관 직을 사직하였고 이튿날 9월 11일, 서재필은 '고국 떠나며 동포 여러분께'라는 제목으로 대국민 서한을 기고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권한이란 특권을 가치있게 효용할 것을 배웁시다. 둘째로 현실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마지막으로 할 말은 나의 친애하는 남자 친구들이 자기네 부녀자와 자녀들의 안락과 복지와 편의를 위해서 일층 유의하는 동시 노력하여 주기 바라는 바이다.' | |
| 523 | 525 | |
| 524 | 1948년 | |
| 526 | 1948년 9월 11일 오전 7시 반, 서재필은 김구·이용설·손원일·김형민·강진국 등 백여 명의 환송리에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과 비서 임창영을 대동하고 숙소인 조선호텔을 떠나 인천으로 향하였다. 그는 오전 8시 40분경 인천에 도착하여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 |
| 525 | 527 | |
| 526 | ||
| 528 | (문) 통일독립국가를 조속히 수립하는 방법은? (답) 4천년 역사를 가진 대한민족이므로 분리될 리 없다. 당파싸움과 정치이권을 떠나 국민의 권리를 잘 이용하면 자주독립국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
| 527 | 529 | |
| 528 | 1948년 9월 10일, 미군정청 최고의정관 직을 사직하였고 이튿날 9월 11일, 서재필은 '고국 떠나며 동포 여러분께'라는 제목으로 대국민 서한을 기고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권한이란 특권을 가치있게 효용할 것을 배웁시다. 둘째로 현실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마지막으로 할 말은 나의 친애하는 남자 친구들이 자기네 부녀자와 자녀들의 안락과 복지와 편의를 위해서 일층 유의하는 동시 노력하여 주기 바라는 바이다.'[161] | |
| 529 | ||
| 530 | 1948년 9월 11일 오전 7시 반, 서재필은 김구·이용설·손원일·김형민·강진국(姜辰國) 등 백여 명의 환송리에 둘째 딸 뮤리엘 제이슨과 비서 임창영(林昌榮)을 대동하고 숙소인 조선호텔을 떠나 인천으로 향하였다. 그는 오전 8시 40분경 인천에 도착하여 기자와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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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2 | (문) 통일독립국가를 조속히 수립하는 방법은? (답) 4천년 역사를 가진 대한민족이므로 분리될 리 없다. 당파싸움과 정치이권을 떠나 국민의 권리를 잘 이용하면 자주독립국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16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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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4 | 530 | 승선한 이후에도 창 밖으로 인천 제물포 부둣가를 한참 쳐다봤다 한다. 당시 이 선박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미국에 가는 유학생 32명이 동승하였다. 배편으로 미국에 갔는데 멀미 한번 하지 않았다 한다. 배 안에서 음력 8월 중순이 되자 그는 음력 8월 15일 밤 서재필은 선장에게 한국 음식을 특별히 마련하게 하고 갑판 위에서 남녀 학생들과 파티를 열었다. '미국에 가거든 쓸데없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고, 군인들이 쓰는 비속어를 쓰거나 어깨를 으쓱하는 몸짓 같은 것들을 하지 말고, 독립국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살려 서투르더라도 점잖고 올바른 영어를 쓰도록 하시오.' |
| 535 | 531 | == 본 문서 정보 == |
| 536 | 532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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