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7 vs r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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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 | 108 |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고 해외로 망명할 때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12월 13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배는 다음 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망명 초기 그는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의 위협에 시달려 은신하였으나 후쿠자와 유키치와 친분이 있던 독지가의 후원으로 도쿄 근처의 판자촌에 숨어 지냈다. 일본 도착 직후 그는 혁명의 실패와 서툴렀음을 자책하며 대성통곡을 하다 실신했다. 한달 가까이 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1개월 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수시로 자객을 보냈고 그는 변장하고 은신해야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그의 딱한 소식을 듣고 생활비와 음식과 옷을 지원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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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 | 110 | 서재필 자신은 1년간 일본에 피신해 있었지만, 갑신정변 주역들을 둘러싸고 일본-청나라 사이의 외교문제가 생겼고, 일본은 조선의 갑신정변에 깊이 참여했다는 국제 사회의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이들을 냉대하였다. 그는 자객을 피해 걸인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박대에 분개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 김옥균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기독교 선교사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게 된다. |
| 111 | == 1차 미국 망명 == | |
| 112 | 1885년(고종 22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화물선 차이나 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비용이 없었고 능통하지 못한 영어 실력과,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을 피해 숨어있어야 했던 이들은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를 보내려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후원과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씨가 보내준 생활비와 차비 덕분에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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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 | 조병옥에 의하면, 이들은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으나 상륙하자마자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닥쳐올 생활위협을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던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서광범도 얼마 동안은 언더우드 박사의 후원으로 뉴욕에 체류하며 지냈으나, 결국 앞서 돌아간 박영효의 뒤를 따라 그도 양반이라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힘든 일을 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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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 | 훗날 서재필은 그가 처음 미국 땅에서 살기 위해서 발버둥쳤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한국 사람이라고는 자기 혼자 뿐, 말도 모르고 풍속이 다른 남의 나라에서 스스로의 진로를 개척하려던, 고독에 겨운 참담한 생활은 그의 자립정신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문방구점의 경영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근면과 창의력은 상점의 번영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유색인종에 대한 무시와, 차별에 시달림을 당했고 열차에 탑승할 때도 짐칸으로 밀려나는 등의 모욕을 당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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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 | 미국 망명 초기 장로교 선교사이자 안면이 있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편지로 보낸 소개장 덕에 거처를 구할 수 있었다. 미국생활 중 감리교회에 나가 감리교 신자로 개종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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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 | 한편 조선에서는 1887년 3월부터 1894년 3월 10일까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번갈아가며 홍국영을 부관참시하고 노륙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동시에 서재필과 서광범, 박영효도 기한을 정해 잡아들이거나 사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매일 올렸다. 이는 승정원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동일한 내용의 상소가 수시로 계속되자 고종은 나중에 이를 모두 물리쳤다. | |
| 121 | === 미국 망명생활 초기 === | |
| 122 | 1885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서재필은 영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서재필이 처음 구한 일자리는 가구점의 광고지를 붙이는 일이었다. 서재필은 다른 노동자들이 하루 5마일을 다닐때 10마일을 뛰어 다니면서 일했다. 낮선 땅에서 대화가 통하지 않아 손짓과 발짓으로 어렵게 일자리를 구하기도 했고, 정신병자, 부랑아로 몰려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으며 1년을 보낸다. 언어도 통하지 않은 데다가 노동법령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임금도 못받고 사업장에서 쫓겨나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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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 | 처음에 미국에서 생활하며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렸다. 언어 장벽과 유색인종이라는 부정적인 시선 등으로 불이익과 차별을 당하는 것에 좌절하여 사람들을 기피하기도 했다. 낮선 환경에 적응하기 쉽지 않아 여러번 일자리를 바꾸기도 하며 차가운 시골과 변두리의 판자집을 전전해야 했는데, 위생상태의 불결함 등으로 감기와 피부염증, 동상에 자주 걸려 육체적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서재필은 막노동과 잡역, 식당 서빙, 청소부, 인쇄소 전단지 돌리는 일 등 잡일을 가리지 않고 이역만리를 헤매며 오렌지 농장과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 가구점 점원, 잡화상회 점원 등을 전전하며 미국생활을 견뎌냈다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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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 | 고단한 미국생활에서 연락을 주고 받은 유일한 친구는 윤치호였다. 여러번 윤치호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윤치호는 선뜻 그에게 생활비를 우편환으로 송금해주었다. 주소가 수시로 바뀌었지만 그가 먼저 윤치호에게 연락을 하였으므로 연락이 계속될 수 있었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한 차례 만났었다. 1893년 가을 에모리 대학을 마치고 상하이로 되돌아가기 전인 윤치호는 인사차 서재필을 방문했었다. 서재필은 윤치호의 방문이 내키지 않았다. 그를 만나자 잊고 있었던 십년 전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모했던 정변이 떠올라 회한에 잠겨 스스로 부끄러워지며 자신 때문에 죽은 부모와 처자를 떠올렸다. 서재필은 졸업을 축하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치호는 왜 그런지 알면서도 무척 서운해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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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 | 조선에서는 미국에 있는 그를 제거하려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그와 친분이 있던 인물들에 대한 감시, 탄압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조선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민중에 대한 희망과 기대 역시 배신감과 증오로 변하게 된다. | |
| 129 | === 고등학교 재학 시절 === | |
| 130 | 낮에는 아르바이트와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 야간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주말에는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교회에 나가던 그는 곧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기독교적 인권사상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운 좋게 교회 신자를 통해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는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탄광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대부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1886년 9월 서재필은 홀렌백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 배리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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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 | 머무를 거처가 없었던 서재필은 해리힐맨 고등학교 교장 집에서 집안 일과 정원 조경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관으로 퇴임한 교장의 장인이 함께 살고 있어서 그에게서 미국의 역사 및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되는데, 홀렌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사립고를 다녔다. 또한 한편으로 제이슨(Philip Jason)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언론에 칼럼을 기고할 때의 필명은 오시아(N. H. Osia)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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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 | 서재필은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 |
| 135 | === 대학 재학 시절 === | |
| 136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의 예과(대학 예비 과정)의 야간부인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 야간반에 입학, 1년간 자유전공으로 전공 없이 주로 자연과학과 역사를 배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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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 | 1889년 6월 서재필이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자, 홀렌벡은 서재필을 불러 놓고, 이미 입학허가를 받은 라파예트 대학에서 일단 공부를 마치고 그 다음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대를 졸업하여 조선에 기독교선교사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서면으로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래야 앞으로 더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 역적의 신세에 묶여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서재필은 홀렌벡의 제안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은인과 결별하게 된다. 1890년 서재필은 그해의 라파예트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했고, 곧 라파예트 대학 하트 교수의 도움으로 라파예트 대학교에 입학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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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 | 대학에 다닐 무렵, 서재필은 하루 3불의 품삯을 받고 유리창닦이 등 잡역부로 노동을 하였고, 여가를 틈타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한다. 그 뒤 교회당을 찾아 신앙을 발견하려고 꾸준히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 D.C.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국 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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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 |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1889년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의과대학에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문구점을 설립했는데 낮에는 문구점 주인으로 밤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하였다. | |
| 111 | 143 | == 본 문서 정보 == |
| 112 | 144 |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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