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23 vs r24
......
4949
* [[독립운동가]]
5050
5151
* [[3.1 운동]]
52
== [[여담]] ==
53
* 아버지 서광하의 묘소는 충청남도 은진에, 어머니 성주이씨의 묘소는 논산군 연무읍 죽평리(현재의 연무대 자리)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육군 제2훈련소가 입주하면서 그 근처로 이장되었다. 배우자 광산김씨의 시신 역시 수습되어 논산군 연무읍 죽평리 훈련소 자리 뒤편 야산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동생 서재창의 시신과 굶어죽은 어린 아들, 그리고 서모가 낳은 이복 동생들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고 묘소도 없다. 뒤늦게 살아남은 맏형 서재춘의 아들들과 동생 서재우의 아들이 서광하 내외의 묘소를 돌보았다. 그러나 이 일로 큰 상처를 받은 서재필은 귀국해서도 부모의 묘소나 전처의 묘소에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54
55
* 나중에 서재필은 스스로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는데,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이후 이 두 가지 각성은 깊이 각인되었다. 낮선 이국 생활에 향수병과 조선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한 서재필은 이런 저런 편지를 써서 보성군 문덕면의 외가로 보냈다. 그러나 그의 외가에서는 서재필이 편지를 보낼 때마다 찢어버리거나 불에 태워버렸다. 해방 직후까지도 가내마을에서는 서재필이 편지를 보내면, 보낸 편지들을 찢어버리거나 불에 태웠다. 1947년 귀국한 서재필이 보성군 가내마을로 내려가 외종손 이용순을 불러 "내가 놀던 정자나무며 연못은 그대로 있느냐"하고 물으니 이용순은 "서 박사님 편지가 올때마다 역적으로 몰릴까봐 가내마을에서는 편지를 태워버리곤 하였다"고 답하였다. 서재필은 고생들 했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한다.
56
57
* 국적 취득을 기준으로 한국인 최초의 미국 이민자(최초의 한국계 미국인)이며, 미국 최초의 한국계 미국인 의사다.
5258
== 본 문서 정보 ==
5359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54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