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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의들도 치료를 못하자 그는 그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즐겨 다녔으며, 아산의 온양온천 등에 행궁하기도 했다. 한번은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서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이 미소를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하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다. 세조는 상원사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5만 명의 화공과 5만 명의 목수를 동원,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 문수동자상을 조성해 상원사에 봉안했다. 문수동자상은 1466년(세조 12년) 나병이 일시적으로 낫자 이를 기념하여 제작, 봉안한 것이다.문수동자상은 1984년 10월 15일 국보 221호로 지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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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딸 의숙공주는 세조의 나병이 낫기를 기원한 기도문을 지어 문수동자전에 바쳤다. 의숙공주의 기원문은 1984년 7월 21일 평창군 상원사의 승려들 사리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문수동자상 내에서 속적삼도 발견되었는데, 이 속적삼은 1991년 3월 학자들의 연구 결과 세조의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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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에 귀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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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세조는 심한 악몽에 시달렸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악몽과 악몽으로 인한 불면증을 계기로, 세조는 불교에 귀의할 결심을 한다. 시중에는 그의 아들 의경세자가 낮잠을 자다가 가위눌림으로 죽은 것도, 현덕왕후의 원혼이 죽인 것이라는 낭설이 떠돌기도 했다. 세조는 오래 악몽에 시달렸고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의 불교 귀의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국가 이념, 개국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의 불교 귀의에 항의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과, 훈구 유학자들은 연명 상소와 사퇴 등으로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도 했으나, 세조의 만류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조선건국 당시 금지한 불교 금지령을 완화시켜 양반 사대부들 중에도 불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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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훈신 중 김수온의 형인 승려 신미를 왕사로 받들어 궁궐로 초빙했다. 유학자들은 연명상소와 사퇴를 선언했지만, 세조는 이를 묵살했다. 신미는 세종대왕 당시 세종대왕의 명으로 궁궐 내에 내원당의 건축과 법요를 주관했으며, 세종대왕의 명으로 복천사의 중수를 맡아보았다. 문종 즉위 후에 신미는 선종의 지도자인 선교도총섭에 임명되기도 했다. 신미는 평창 오대산 상원사의 중건에도 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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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여러 불당의 중수와 창건을 지원하였다. 훈구파 공신들과 사림파 신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내에 불당을 지었고, 원각사와 신륵사 등을 지원하였다. 또한 수종사 등의 중건을 지원하기도 한다. 강원도의 월정사, 상원사 등에도 적극 시주, 후원하였고 파주 보광사, 남양주의 수종사와 양평 용문사, 합천의 해인사 등도 그가 후원하는 사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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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원하던 사찰 중에는 경기도 양주 송촌리 용진의 운길산 수종사도 있었다. 그런데 수종사는 세조가 죽인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 유가 시주해 세운 곳이기도 하다. 세조는 수종사를 다시 중건하고 대대적으로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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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세조는 유점사를 왕실의 복을 비는 원당으로 정하였으며, 조선의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직접 금강산에 와서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들러보며 매년 쌀 100섬과 소금 50섬을 금강산의 사찰들에 (시주로) 지급하도록 지시한다. 이를 '세헌'이라고 하는데 뒤에는 200여섬으로까지 늘어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의 토지와 노비, 삼림 등을 금강산 사찰들에 나눠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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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의 사후 금강산에 있는 표훈사에 그의 영정이 봉안되기도 했다. 합천 해인사에도 그의 영정이 봉안되었는데, 해인사의 영정은 1458년 7월 28일 윤사로, 조석문 등을 해인사 행향사로 임명해 해인사에 파견할 때, 윤사로와 조석문의 건의로 해인사의 무명 승려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해인사 영정은 2000년대까지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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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불교는 왕실의 안녕과 미래를 보장하는 종교적인 신앙으로서 필요했다. 세조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호국성에 근거한 국가·민족 의식의 고양을 통해 국방력과 집권체제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원각사를 세우고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해 많은 불경을 국역하도록 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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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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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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