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신라(비교)

r2 vs r3
......
2323
== 상세 ==
2424
진한에 소속된 성읍국가 중 하나인 경주 지역의 사로국이 그 시초이며, 혁거세 거서간이 나라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왕이라는 왕호를 쓰기 전에는 군주를 방언으로 거서간, 마립간과 같이 간(干)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고, 이사금이라는 호칭 또한 잠시 사용되었다. 서기 503년(지증왕 4년) 왕호를 확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국호를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라는 의미의 신라로 확정했다.
2525
26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6세기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도모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했다.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고, 6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획득하여 중국 대륙과의 직교역로인 당항성을 확보하였으며, 화랑의 활약으로 대가야를 정복했다. 7세기경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으로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했다. 이후 676년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옛 고구려, 백제 지역을 확보했다.[11]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으며, 이후 698년 발해가 건국되며 북국인 발해과 함께 남국으로써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
26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6세기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도모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했다.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고, 6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획득하여 중국 대륙과의 직교역로인 당항성을 확보하였으며, 화랑의 활약으로 대가야를 정복했다. 7세기경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으로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했다. 이후 676년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옛 고구려, 백제 지역을 확보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으며, 이후 698년 발해가 건국되며 북국인 발해과 함께 남국으로써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
2727
2828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9서당 10정을 배치하여 고도의 중앙집권 체계를 확립했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을 강화하여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했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고, 신라의 화랑도는 계승·발전되었다. 또한 이 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8세기 성덕왕과 경덕왕 대에 이르러 극성기를 달성했다.
2929
......
3838
계림(鷄林)이라는 국호의 유래는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조(9년 봄 3월 기사)에 기술되어 있다.
3939
4040
‘라’는 옛 지명에 많이 등장하는데, ‘가야’, ‘임나’, ‘탐라’, ‘서라’, ‘서야’, ‘서나’ 등에 나타난~ ‘라’, ‘나’, ‘야’ 등이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 한국어에도 ‘나라’를 비롯해 땅과 관련된 말의 끝에 ‘ㄹ’이 많이 들어간다.
41
== 역사 ==
42
=== 신라의 성립 ===
43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조선의 유이민인 진한 6부, 혹은 사로 6촌이 자신들을 다스려 줄 임금을 원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맞이하여 기원전 57년(혁거세 거서간 원년) 4월 28일에 거서간(임금)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고조선계통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신라는 처음 진한의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했다. 기원전 27년(혁거세 거서간 31년)에는 성을 쌓게 하고 금성(金城)이라 불렀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석·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임금)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4
45
79년(탈해 이사금 23년)에는 장군 거도(居道)의 활약으로 각각 현재의 울산과 부산으로 비정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공격하여 병합함으로써 경주의 외부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46
47
4세기 말엽인 17대 내물 마립간[f](재위: 356년~402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는데,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통치 집단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사신을 보내 '시대와 명칭이 바뀌어 예전과 다르다' 하였는데 국력의 강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48
49
한편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자주 당했는데, 특히 390년대에 여러 차례 왜의 침입을 받았다. 399년(내물 마립간 44년; 광개토왕 9년)에는 왜(가야·왜·백제 연합군)가 신라에 침입하자 이듬해인 400년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보내어 몰아내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았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했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하게 되었다.
50
=== 신라의 정치적 발전 ===
51
신라는 내물 마립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했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했다.
52
53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于山國)을 복속시키기도 하는 등, 지방 세력과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54
55
뒤이어 법흥왕(재위 514년~540년)은 병부를 설치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율령 반포, 공복 제정[25]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고, 골품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주변 세력들을 포섭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532년(법흥왕 19년) 낙동강 하류 지역에 진출하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신라는 중앙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했다. 백제와는 연맹 관계를 맺어 백제를 통하여 양(梁)나라와 교역했다. 이때부터는 남조(南朝)의 문화까지 받아들이면서 크게 성장하여, 진흥왕 때에 그 전통을 이룩했다.
56
=== 신라의 팽창 ===
57
신라는 진흥왕(재위 540년~576년) 때에 이르러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551년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했다.
58
59
553년(진흥왕 14년), 이를 토대로 신라는 북으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했다. 남쪽으로는 562년(진흥왕 23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했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나라·당나라와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때의 신라 국세는 이른바 진흥왕 순수비인 창녕비·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 등이 증명하는 바이다.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60
=== 신라의 위기 ===
61
신라의 팽창은 고구려·백제 양국의 반격을 초래했다. 진흥왕 대에 복속했던 영토들을 이후에 잃어버렸으며, 선덕여왕대인 642년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반격으로 서라벌로 향하는 관문인 대야성까지 빼앗기며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62
=== 신라의 삼국통일 ===
63
신라의 삼국통일은 676년(문무왕 16년) 신라가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당나라를 격퇴한 것을 말한다.
64
65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이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실패하였고, 648년(진덕여왕 2년)에 신라와 당나라는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대동강을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합의하고 군사동맹을 맺었다.
66
67
나·당 동맹 이후,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다. 지배층의 문란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던 백제는 660년(무열왕 7년)에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갈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문무왕 8년)에 멸망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일부와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했다.
68
69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신라는 675년(문무왕 15년)에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문무왕 16년) 11월에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대동강부터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70
71
이렇게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 등 한반도에 있던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676년(문무왕 16년)에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당군을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여 삼국을 완전히 통일했다. 또한 이후에도 문무왕은 한반도 북부 및 만주 일대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지원하며 신라군은 당군에 여러 차례 승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당나라의 만주 지배권이 약화되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만주에서 발해를 건국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72
73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북부 영토에는 30여 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발해(698년~926년)가 들어섰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른다. 이 때문에 한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이며, 신라의 ‘삼국통일’ 대신, 신라의 ‘원삼국 해체기’ 등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고려도 고구려 북부나 발해 영토와 인구는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북부 영토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신라는 불완전 통합이고 고려는 완전한 통합이라고 달리 볼 수는 없다.
74
75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를 끌여들였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사학자를 중심으로 비판을 받아 왔다.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 민족의 정체성은 고려 이후에 완성되었으며, 한반도 내에서 민족 국가의 정체성은 고려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따라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이러한 비판은 학계 주류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76
=== 후삼국의 성립 ===
77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축소되면서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78
=== 신라에서 고려로 ===
79
호족 출신이자 태봉의 장군이었던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후, 적극적으로 친신라 정책을 펼쳤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했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에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 결과 마의태자 등의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신라의 백성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935년(경순왕 9년) 10월 신라를 고려에 귀순시켰다.
80
81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태자보다도 더 극진하게 예우하며, 신라 수도 서라벌(徐羅伐)을 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신라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경순왕의 사촌 여동생인 신성왕후와도 혼인했다. 이후 고려는 신라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다. 삼국사기를 저술했던 고려의 김부식은 “그때 만약 힘껏 싸우며 지키는 데 사력을 … 다했다면, 반드시 그 종족(宗族)을 멸망시키고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라고 논평하며, 경순왕의 귀순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82
83
또한 고려 태조는 천년 국가였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기리기 위해 자신보다 먼저 경순왕의 어진을 제작하였고, 그 복사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어진이 되었다. 고려왕의 어진이 조선 세종 때 불태워지거나 땅에 묻혀버린 것과 비교하면, 신라의 귀순을 결정했던 경순왕의 어진이 조선시대까지 보전된 것은 멸망 후에도 신라 왕실은 존숭되었음을 의미한다.
84
85
한편, 신라의 귀순을 반대했던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경순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초식으로 연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막내아들은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法水)·해인사에 드나들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마의태자와 범공은 끝까지 신라에 충절을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
86
87
고려 제8대 국왕인 현종은 신라 왕실의 외손이고, 이후 왕위를 계승한 이는 모두 현종의 자손이므로 고려 왕실의 정통성은 신라로부터 나온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스스로 귀순함으로써 백성을 살렸고, 고려로부터 수도와 문화가 보전되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74년 동안 신라 왕실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88
== 본 문서 정보 ==
89
* 본 문서에 작성된 일부 내용들은 아래의 자료들로 참고하였습니다.
90
91
* [[https://ko.m.wikipedia.org/wiki/%EC%8B%A0%EB%9D%BC|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