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신라 新羅 | Silla (Shilla) | ||
국가 정보 | ||
국가명 | 신라 | |
수도 | 서라벌 | |
성립일 | 기원전 57년 4월 | |
멸망일 | 935년 10월 | |
면적 | 134,000 km² | |
인구 | 675만명 | |
언어 | 신라어, 한문 | |
국교 | 불교 | |
현재 국가 | ||
정치 | ||
정치체제 | ||
왕 | 혁거세 거서간 (기원전 57년~서기 4년) 법흥왕 (514년~540년) 진흥왕 (540년~576년) 무열왕 (654년~661년) 문무왕 (661년~681년) 경덕왕 (742년~765년) 경순왕 (927년~935년) | |
국성 | 박씨, 석씨, 김씨 | |
입법부 | 화백 |
1. 개요[편집]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기원후 935년까지 고구려, 백제와 함께 고대 한반도의 삼국 시대를 이끌고 발해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구성하였던 국가로,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된 왕국 중 하나이다.
2. 상세[편집]
진한에 소속된 성읍국가 중 하나인 경주 지역의 사로국이 그 시초이며, 혁거세 거서간이 나라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왕이라는 왕호를 쓰기 전에는 군주를 방언으로 거서간, 마립간과 같이 간(干)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고, 이사금이라는 호칭 또한 잠시 사용되었다. 서기 503년(지증왕 4년) 왕호를 확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국호를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라는 의미의 신라로 확정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6세기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도모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했다.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고, 6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획득하여 중국 대륙과의 직교역로인 당항성을 확보하였으며, 화랑의 활약으로 대가야를 정복했다. 7세기경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으로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했다. 이후 676년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옛 고구려, 백제 지역을 확보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으며, 이후 698년 발해가 건국되며 북국인 발해과 함께 남국으로써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9서당 10정을 배치하여 고도의 중앙집권 체계를 확립했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을 강화하여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했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고, 신라의 화랑도는 계승·발전되었다. 또한 이 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8세기 성덕왕과 경덕왕 대에 이르러 극성기를 달성했다.
그러나 9세기에 이르러 중앙 귀족이 분열하고 지방에서 자리 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을 세우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통일신라 중반부터 국력이 약해진 신라는 백성을 단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경순왕 때인 935년 고려에 편입하기로 귀순하였다. 그로써 56대 992년(사로국 포함) 동안 이어진 신라의 종묘와 사직을 닫게 되었다.
진한과 신라에서는 왕(王)을 간(干)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에도 충지 잡간, 아간처럼 간(干)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알 수 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6세기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도모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했다.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고, 6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획득하여 중국 대륙과의 직교역로인 당항성을 확보하였으며, 화랑의 활약으로 대가야를 정복했다. 7세기경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으로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했다. 이후 676년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옛 고구려, 백제 지역을 확보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으며, 이후 698년 발해가 건국되며 북국인 발해과 함께 남국으로써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9서당 10정을 배치하여 고도의 중앙집권 체계를 확립했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을 강화하여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했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고, 신라의 화랑도는 계승·발전되었다. 또한 이 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8세기 성덕왕과 경덕왕 대에 이르러 극성기를 달성했다.
그러나 9세기에 이르러 중앙 귀족이 분열하고 지방에서 자리 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을 세우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통일신라 중반부터 국력이 약해진 신라는 백성을 단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경순왕 때인 935년 고려에 편입하기로 귀순하였다. 그로써 56대 992년(사로국 포함) 동안 이어진 신라의 종묘와 사직을 닫게 되었다.
진한과 신라에서는 왕(王)을 간(干)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에도 충지 잡간, 아간처럼 간(干)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알 수 있다.
3. 국호[편집]
사로국(斯盧國) · 신로(新盧) · 시라(斯羅) · 서나(徐那) · 서라벌(徐羅伐) · 서야(徐耶) · 서라(徐羅) · 서벌(徐我) 등 여러 한자 가차자와, 계림(鷄林) 등으로도 불렸으나, 503년(지증 마립간 4년) 한자 국호를 “신라”로 확실히 하며, 왕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신라 고유어에서 중국식의 “왕”으로 바꿨다. 당시 여러 민족에 한자가 유행하였기 때문에 선비족 등 여러 민족이 한자식 이름과 호칭을 썼다.
‘시라’, ‘서라’, ‘서나’, ‘서야’ 등의 여러 가차자로 기록이 남은 신라의 본래 이름의 당시의 정확한 신라어 발음은 현재 알려지지 않으며, 이름의 뜻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쇠’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동쪽을 뜻하는 ‘새’[c]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다. ‘서라벌’은 ‘서라’에 넓은 땅을 뜻하는 ‘벌’이 합쳐진 말이다. ‘라’의 모음이 약해져서 탈락하면 ‘서르벌’, ‘서벌’이 된다. ‘라’의 자음이 약해지면 ‘서야’가 된다.
계림(鷄林)이라는 국호의 유래는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조(9년 봄 3월 기사)에 기술되어 있다.
‘라’는 옛 지명에 많이 등장하는데, ‘가야’, ‘임나’, ‘탐라’, ‘서라’, ‘서야’, ‘서나’ 등에 나타난~ ‘라’, ‘나’, ‘야’ 등이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 한국어에도 ‘나라’를 비롯해 땅과 관련된 말의 끝에 ‘ㄹ’이 많이 들어간다.
‘시라’, ‘서라’, ‘서나’, ‘서야’ 등의 여러 가차자로 기록이 남은 신라의 본래 이름의 당시의 정확한 신라어 발음은 현재 알려지지 않으며, 이름의 뜻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쇠’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동쪽을 뜻하는 ‘새’[c]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다. ‘서라벌’은 ‘서라’에 넓은 땅을 뜻하는 ‘벌’이 합쳐진 말이다. ‘라’의 모음이 약해져서 탈락하면 ‘서르벌’, ‘서벌’이 된다. ‘라’의 자음이 약해지면 ‘서야’가 된다.
계림(鷄林)이라는 국호의 유래는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조(9년 봄 3월 기사)에 기술되어 있다.
‘라’는 옛 지명에 많이 등장하는데, ‘가야’, ‘임나’, ‘탐라’, ‘서라’, ‘서야’, ‘서나’ 등에 나타난~ ‘라’, ‘나’, ‘야’ 등이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 한국어에도 ‘나라’를 비롯해 땅과 관련된 말의 끝에 ‘ㄹ’이 많이 들어간다.
4. 역사[편집]
4.1. 신라의 성립[편집]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고조선의 유이민인 진한 6부, 혹은 사로 6촌이 자신들을 다스려 줄 임금을 원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맞이하여 기원전 57년(혁거세 거서간 원년) 4월 28일에 거서간(임금)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고조선계통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신라는 처음 진한의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했다. 기원전 27년(혁거세 거서간 31년)에는 성을 쌓게 하고 금성(金城)이라 불렀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석·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임금)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79년(탈해 이사금 23년)에는 장군 거도(居道)의 활약으로 각각 현재의 울산과 부산으로 비정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공격하여 병합함으로써 경주의 외부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4세기 말엽인 17대 내물 마립간[f](재위: 356년~402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는데,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통치 집단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사신을 보내 '시대와 명칭이 바뀌어 예전과 다르다' 하였는데 국력의 강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자주 당했는데, 특히 390년대에 여러 차례 왜의 침입을 받았다. 399년(내물 마립간 44년; 광개토왕 9년)에는 왜(가야·왜·백제 연합군)가 신라에 침입하자 이듬해인 400년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보내어 몰아내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았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했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하게 되었다.
79년(탈해 이사금 23년)에는 장군 거도(居道)의 활약으로 각각 현재의 울산과 부산으로 비정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공격하여 병합함으로써 경주의 외부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4세기 말엽인 17대 내물 마립간[f](재위: 356년~402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는데,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통치 집단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사신을 보내 '시대와 명칭이 바뀌어 예전과 다르다' 하였는데 국력의 강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자주 당했는데, 특히 390년대에 여러 차례 왜의 침입을 받았다. 399년(내물 마립간 44년; 광개토왕 9년)에는 왜(가야·왜·백제 연합군)가 신라에 침입하자 이듬해인 400년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보내어 몰아내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았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했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하게 되었다.
4.2. 신라의 정치적 발전[편집]
신라는 내물 마립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했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했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于山國)을 복속시키기도 하는 등, 지방 세력과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뒤이어 법흥왕(재위 514년~540년)은 병부를 설치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율령 반포, 공복 제정[25]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고, 골품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주변 세력들을 포섭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532년(법흥왕 19년) 낙동강 하류 지역에 진출하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신라는 중앙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했다. 백제와는 연맹 관계를 맺어 백제를 통하여 양(梁)나라와 교역했다. 이때부터는 남조(南朝)의 문화까지 받아들이면서 크게 성장하여, 진흥왕 때에 그 전통을 이룩했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于山國)을 복속시키기도 하는 등, 지방 세력과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뒤이어 법흥왕(재위 514년~540년)은 병부를 설치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율령 반포, 공복 제정[25]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고, 골품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주변 세력들을 포섭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532년(법흥왕 19년) 낙동강 하류 지역에 진출하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신라는 중앙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했다. 백제와는 연맹 관계를 맺어 백제를 통하여 양(梁)나라와 교역했다. 이때부터는 남조(南朝)의 문화까지 받아들이면서 크게 성장하여, 진흥왕 때에 그 전통을 이룩했다.
4.3. 신라의 팽창[편집]
신라는 진흥왕(재위 540년~576년) 때에 이르러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551년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했다.
553년(진흥왕 14년), 이를 토대로 신라는 북으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했다. 남쪽으로는 562년(진흥왕 23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했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나라·당나라와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때의 신라 국세는 이른바 진흥왕 순수비인 창녕비·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 등이 증명하는 바이다.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53년(진흥왕 14년), 이를 토대로 신라는 북으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했다. 남쪽으로는 562년(진흥왕 23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했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나라·당나라와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때의 신라 국세는 이른바 진흥왕 순수비인 창녕비·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 등이 증명하는 바이다.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4.4. 신라의 위기[편집]
신라의 팽창은 고구려·백제 양국의 반격을 초래했다. 진흥왕 대에 복속했던 영토들을 이후에 잃어버렸으며, 선덕여왕대인 642년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반격으로 서라벌로 향하는 관문인 대야성까지 빼앗기며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4.5. 신라의 삼국통일[편집]
신라의 삼국통일은 676년(문무왕 16년) 신라가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당나라를 격퇴한 것을 말한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이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실패하였고, 648년(진덕여왕 2년)에 신라와 당나라는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대동강을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합의하고 군사동맹을 맺었다.
나·당 동맹 이후,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다. 지배층의 문란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던 백제는 660년(무열왕 7년)에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갈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문무왕 8년)에 멸망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일부와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했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신라는 675년(문무왕 15년)에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문무왕 16년) 11월에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대동강부터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렇게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 등 한반도에 있던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676년(문무왕 16년)에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당군을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여 삼국을 완전히 통일했다. 또한 이후에도 문무왕은 한반도 북부 및 만주 일대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지원하며 신라군은 당군에 여러 차례 승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당나라의 만주 지배권이 약화되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만주에서 발해를 건국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북부 영토에는 30여 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발해(698년~926년)가 들어섰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른다. 이 때문에 한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이며, 신라의 ‘삼국통일’ 대신, 신라의 ‘원삼국 해체기’ 등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고려도 고구려 북부나 발해 영토와 인구는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북부 영토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신라는 불완전 통합이고 고려는 완전한 통합이라고 달리 볼 수는 없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를 끌여들였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사학자를 중심으로 비판을 받아 왔다.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 민족의 정체성은 고려 이후에 완성되었으며, 한반도 내에서 민족 국가의 정체성은 고려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따라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이러한 비판은 학계 주류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이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실패하였고, 648년(진덕여왕 2년)에 신라와 당나라는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대동강을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합의하고 군사동맹을 맺었다.
나·당 동맹 이후,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다. 지배층의 문란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던 백제는 660년(무열왕 7년)에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갈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문무왕 8년)에 멸망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일부와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했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신라는 675년(문무왕 15년)에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문무왕 16년) 11월에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하고, 대동강부터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렇게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 등 한반도에 있던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676년(문무왕 16년)에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당군을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여 삼국을 완전히 통일했다. 또한 이후에도 문무왕은 한반도 북부 및 만주 일대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지원하며 신라군은 당군에 여러 차례 승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당나라의 만주 지배권이 약화되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만주에서 발해를 건국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북부 영토에는 30여 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발해(698년~926년)가 들어섰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른다. 이 때문에 한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이며, 신라의 ‘삼국통일’ 대신, 신라의 ‘원삼국 해체기’ 등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고려도 고구려 북부나 발해 영토와 인구는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북부 영토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신라는 불완전 통합이고 고려는 완전한 통합이라고 달리 볼 수는 없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를 끌여들였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사학자를 중심으로 비판을 받아 왔다.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 민족의 정체성은 고려 이후에 완성되었으며, 한반도 내에서 민족 국가의 정체성은 고려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따라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이러한 비판은 학계 주류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4.6. 후삼국의 성립[편집]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축소되면서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4.7. 신라에서 고려로[편집]
호족 출신이자 태봉의 장군이었던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후, 적극적으로 친신라 정책을 펼쳤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했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에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 결과 마의태자 등의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신라의 백성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935년(경순왕 9년) 10월 신라를 고려에 귀순시켰다.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태자보다도 더 극진하게 예우하며, 신라 수도 서라벌(徐羅伐)을 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신라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경순왕의 사촌 여동생인 신성왕후와도 혼인했다. 이후 고려는 신라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다. 삼국사기를 저술했던 고려의 김부식은 “그때 만약 힘껏 싸우며 지키는 데 사력을 … 다했다면, 반드시 그 종족(宗族)을 멸망시키고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라고 논평하며, 경순왕의 귀순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고려 태조는 천년 국가였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기리기 위해 자신보다 먼저 경순왕의 어진을 제작하였고, 그 복사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어진이 되었다. 고려왕의 어진이 조선 세종 때 불태워지거나 땅에 묻혀버린 것과 비교하면, 신라의 귀순을 결정했던 경순왕의 어진이 조선시대까지 보전된 것은 멸망 후에도 신라 왕실은 존숭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신라의 귀순을 반대했던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경순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초식으로 연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막내아들은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法水)·해인사에 드나들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마의태자와 범공은 끝까지 신라에 충절을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
고려 제8대 국왕인 현종은 신라 왕실의 외손이고, 이후 왕위를 계승한 이는 모두 현종의 자손이므로 고려 왕실의 정통성은 신라로부터 나온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스스로 귀순함으로써 백성을 살렸고, 고려로부터 수도와 문화가 보전되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74년 동안 신라 왕실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태자보다도 더 극진하게 예우하며, 신라 수도 서라벌(徐羅伐)을 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신라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경순왕의 사촌 여동생인 신성왕후와도 혼인했다. 이후 고려는 신라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다. 삼국사기를 저술했던 고려의 김부식은 “그때 만약 힘껏 싸우며 지키는 데 사력을 … 다했다면, 반드시 그 종족(宗族)을 멸망시키고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라고 논평하며, 경순왕의 귀순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고려 태조는 천년 국가였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기리기 위해 자신보다 먼저 경순왕의 어진을 제작하였고, 그 복사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어진이 되었다. 고려왕의 어진이 조선 세종 때 불태워지거나 땅에 묻혀버린 것과 비교하면, 신라의 귀순을 결정했던 경순왕의 어진이 조선시대까지 보전된 것은 멸망 후에도 신라 왕실은 존숭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신라의 귀순을 반대했던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경순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초식으로 연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막내아들은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法水)·해인사에 드나들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마의태자와 범공은 끝까지 신라에 충절을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
고려 제8대 국왕인 현종은 신라 왕실의 외손이고, 이후 왕위를 계승한 이는 모두 현종의 자손이므로 고려 왕실의 정통성은 신라로부터 나온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스스로 귀순함으로써 백성을 살렸고, 고려로부터 수도와 문화가 보전되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74년 동안 신라 왕실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5. 경제[편집]
혁거세 거서간은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했다.[7]
신라는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복한 지역에 지배자를 내세워 토산물을 공물로 수취했다. 토지와 노비는 왕토사상에 기반하여 국왕에 종속되었다. 전쟁 포로는 관직을 겸한 귀족이나 병사에게 노비로 하사하거나, 군공을 세운 자에게 토지와 농민을 식읍(食邑)·사전(賜田)으로 주었다. 또한, 고위 관료는 녹읍을 지급 받았는데, 수급자가 토지로부터 일정한 양의 조(租)를 받을 뿐 아니라, 주민을 노역에 동원할 수 있는 권리도 함께 하사받았다.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한 이후에는 조세 제도를 마련했다. 재산에 따라 호(戶)를 상·중·하로 나누어 곡물과 포(布),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그리고 농업 시책과 구휼 정책을 시행했다. 철제 농기구를 일반 농민에게 보급하여 소를 이용한 우경을 장려하고, 황무지 개간을 권장하여 경작지를 확대하였으며, 저수지를 만들거나 수리하여 가뭄에 대비했다. 왕궁, 성, 저수지 수축에 필요한 노동력은 15세 이상의 남자를 동원했다. 그리고 노비 중에서 기술이 뛰어난 자에게 무기, 장신구 등을 생산하게 했다. 그러나 점차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무기, 비단 등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관청을 두고 수공업자를 배정하여 필요한 물품을 생산했다.
삼국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의 수준이 낮아 서라벌과 지방 거점에서만 시장이 형성되었다. 신라는 5세기 말 서라벌에 시장을 열어 물품을 매매하게 하였고, 6세기 초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영토와 인구가 크게 늘고, 경제적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신라와 당은 우호관계를 회복했고 상인, 승려, 유학생들은 활발히 왕래했다. 무역도 활발해져서 신라는 당에 금·은 세공품, 인삼 등을 수출하고, 서적, 도자기, 비단, 옷, 공예품 등을 수입했다. 또한 비단길과 해상을 통해 서역의 문물과 상인들이 신라에 오기도 했다.
신라의 주요 항구로는 울산항과 당항성이 있었으며, 이곳을 통해 서역과 동남아시아의 물품들이 들어왔다. 9세기 초 신라의 장군 장보고는 청해진이라는 해적 소탕 기지이자 무역거점을 설치하고 중국 및 일본과의 교역 거점을 마련했다.[43]
신문왕은 687년(신문왕 7년)에 관료전을 지급하고, 토지 제도를 바꾸어 식읍을 제한하고 녹읍도 폐지하였으며, 대신 세조(歲租)를 지급했다. 722년(성덕왕 21년)에는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다. 다만 관료전은 조의 수취만을 허락한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구휼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런 조치는 귀족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를 수취하여 통일 이전보다 완화했다. 공물은 촌락 단위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졌으며,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왕권이 약해진 757년(경덕왕 16년)에는 녹읍이 부활하고, 관료전과 세조는 폐지되었다.
신라는 촌락의 토지 크기, 인구 수, 소와 말의 수, 토산물 등을 파악하는 양전을 실시하여 민정문서를 만들고, 조세, 공물, 부역 등을 거두었으며, 변동 사항을 조사하여 3년마다 민정문서를 다시 작성했다.
현존하는 민정문서는 1933년 일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의 서원경(西原京) 지방 촌락 장적(帳籍)[k]이다. 촌에는 관모전답(官謨田畓)·내시령답(內視令畓)·마전(麻田) 등이 할당되어 촌민이 경작하였으며, 촌주는 촌주위답(村主位畓), 촌민은 연수유답(烟受有畓)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이는 연수유답을 정전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한데, 농민들의 자영농토로 생각된다.
신라는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복한 지역에 지배자를 내세워 토산물을 공물로 수취했다. 토지와 노비는 왕토사상에 기반하여 국왕에 종속되었다. 전쟁 포로는 관직을 겸한 귀족이나 병사에게 노비로 하사하거나, 군공을 세운 자에게 토지와 농민을 식읍(食邑)·사전(賜田)으로 주었다. 또한, 고위 관료는 녹읍을 지급 받았는데, 수급자가 토지로부터 일정한 양의 조(租)를 받을 뿐 아니라, 주민을 노역에 동원할 수 있는 권리도 함께 하사받았다.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한 이후에는 조세 제도를 마련했다. 재산에 따라 호(戶)를 상·중·하로 나누어 곡물과 포(布),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그리고 농업 시책과 구휼 정책을 시행했다. 철제 농기구를 일반 농민에게 보급하여 소를 이용한 우경을 장려하고, 황무지 개간을 권장하여 경작지를 확대하였으며, 저수지를 만들거나 수리하여 가뭄에 대비했다. 왕궁, 성, 저수지 수축에 필요한 노동력은 15세 이상의 남자를 동원했다. 그리고 노비 중에서 기술이 뛰어난 자에게 무기, 장신구 등을 생산하게 했다. 그러나 점차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무기, 비단 등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관청을 두고 수공업자를 배정하여 필요한 물품을 생산했다.
삼국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의 수준이 낮아 서라벌과 지방 거점에서만 시장이 형성되었다. 신라는 5세기 말 서라벌에 시장을 열어 물품을 매매하게 하였고, 6세기 초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영토와 인구가 크게 늘고, 경제적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신라와 당은 우호관계를 회복했고 상인, 승려, 유학생들은 활발히 왕래했다. 무역도 활발해져서 신라는 당에 금·은 세공품, 인삼 등을 수출하고, 서적, 도자기, 비단, 옷, 공예품 등을 수입했다. 또한 비단길과 해상을 통해 서역의 문물과 상인들이 신라에 오기도 했다.
신라의 주요 항구로는 울산항과 당항성이 있었으며, 이곳을 통해 서역과 동남아시아의 물품들이 들어왔다. 9세기 초 신라의 장군 장보고는 청해진이라는 해적 소탕 기지이자 무역거점을 설치하고 중국 및 일본과의 교역 거점을 마련했다.[43]
신문왕은 687년(신문왕 7년)에 관료전을 지급하고, 토지 제도를 바꾸어 식읍을 제한하고 녹읍도 폐지하였으며, 대신 세조(歲租)를 지급했다. 722년(성덕왕 21년)에는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다. 다만 관료전은 조의 수취만을 허락한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구휼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런 조치는 귀족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를 수취하여 통일 이전보다 완화했다. 공물은 촌락 단위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졌으며,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왕권이 약해진 757년(경덕왕 16년)에는 녹읍이 부활하고, 관료전과 세조는 폐지되었다.
신라는 촌락의 토지 크기, 인구 수, 소와 말의 수, 토산물 등을 파악하는 양전을 실시하여 민정문서를 만들고, 조세, 공물, 부역 등을 거두었으며, 변동 사항을 조사하여 3년마다 민정문서를 다시 작성했다.
현존하는 민정문서는 1933년 일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의 서원경(西原京) 지방 촌락 장적(帳籍)[k]이다. 촌에는 관모전답(官謨田畓)·내시령답(內視令畓)·마전(麻田) 등이 할당되어 촌민이 경작하였으며, 촌주는 촌주위답(村主位畓), 촌민은 연수유답(烟受有畓)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이는 연수유답을 정전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한데, 농민들의 자영농토로 생각된다.
6. 사회[편집]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한 시기가 늦은 편이었다. 그런 만큼 신라는 여러 부족의 대표들이 함께 모여 화백회의를 통하여 왕권을 견제하면서 정치를 운영하고 사회를 이끌어갔다. 특히 최고 신분층인 진골 귀족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그들은 중앙 관청의 장관직을 독점했다. 6두품 출신은 학문적 식견과 실무능력을 바탕으로 왕을 보좌하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했다. 그렇지만 신분의 제약 때문에 중앙관청의 우두머리나 지방의 장관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다.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골품은 신라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했다.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골품제도는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은 물론, 복색이나 수레 등 신라 사람들의 일상생활까지 규제하는 기준으로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귀족들은 금일택이라 불린 저택에서 많은 노비와 사병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불교를 적극 후원했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지방에 소유한 영지와 목장 등에서 나온 수입으로 충당했다. 귀족들은 국제 무역을 통하여 수입한 진기한 사치품을 선호했다.
신라 청소년들은 화랑 활동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 규범을 배우고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갖도록 하여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완화하는 구실을 했다. 이들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몸과 마음을 연마했다. 화랑은 신라가 정복 활동을 강화하던 진흥왕 때에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조직이 확대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관료 체제가 확충되는 데 따라서 토지 제도상으로도 획기적인 변혁이 일어났다. 이미 오래전부터 일부 귀족·관료들에게 식읍(食邑)·사전(賜田)의 형식으로 토지·인민 또는 노비가 분배되었다. 한편 관리에게 특수한 경우에 세조(歲租)가 지급되는 수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대소(大小) 족장이었을 관리들은 토지와 인민을 녹읍(祿邑) 형식으로 사여(賜與)받아, 그들 원래의 생활 기반을 그대로 지배할 수 있게끔 보장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왕권의 강화와 관료 정치화의 추세에서 이와 같은 토지 사여 형식은 재편성되지 않을 수 없었다.
689년(신문왕 9년) 내외 관료의 녹읍을 폐지하고 그 대신 일종의 녹봉제(祿俸制)로서 관료전인 직전(職田)을 급여했다. 성덕왕 때에는 정전제가 실시되었다. 또한 최근에 와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 문서를 통하여 수취 체제 확립을 위한 신라 왕조의 노력을 엿보게 해준다.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은 정치 중심지로서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국내 교역은 물론 중국·일본과의 공·사무역(公私貿易)이 성행하여 수도는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통일 이전인 5세기 말에 조정에서는 상인으로 하여금 좌상점포(坐商店鋪)인 시전(市廛)을 개설케 했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의 동·서·남·북에 시전(市廛)을 갖추게 되고, 시전(市典)이라는 관청을 두어 이를 감독케 했다.
지방에는 행상(行商)에 의한 향시(鄕市)가 일찍부터 벌어져서 물물교환이 행해졌다. 한편 해상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관무역은 물론 사무역(私貿易)이 더욱 성행했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교역된 물화(物貨)는 각종 금은세공품(金銀細工品)·직물을 위시하여 신라의 인삼, 당나라의 차(茶)와 서적 등이었다. 왕실·귀족과 관서의 수요 물품은 향·소·부곡민의 노역으로 운영된 관영 수공업(官營手工業)으로써 생산되었고, 마포(麻布)나 견직물은 농민으로부터 징수했다.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골품은 신라 사회에서 개인의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의 범위까지 엄격히 제한했다.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골품에 따라 정해져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골품제도는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은 물론, 복색이나 수레 등 신라 사람들의 일상생활까지 규제하는 기준으로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귀족들은 금일택이라 불린 저택에서 많은 노비와 사병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불교를 적극 후원했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지방에 소유한 영지와 목장 등에서 나온 수입으로 충당했다. 귀족들은 국제 무역을 통하여 수입한 진기한 사치품을 선호했다.
신라 청소년들은 화랑 활동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 규범을 배우고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갖도록 하여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완화하는 구실을 했다. 이들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몸과 마음을 연마했다. 화랑은 신라가 정복 활동을 강화하던 진흥왕 때에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조직이 확대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관료 체제가 확충되는 데 따라서 토지 제도상으로도 획기적인 변혁이 일어났다. 이미 오래전부터 일부 귀족·관료들에게 식읍(食邑)·사전(賜田)의 형식으로 토지·인민 또는 노비가 분배되었다. 한편 관리에게 특수한 경우에 세조(歲租)가 지급되는 수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대소(大小) 족장이었을 관리들은 토지와 인민을 녹읍(祿邑) 형식으로 사여(賜與)받아, 그들 원래의 생활 기반을 그대로 지배할 수 있게끔 보장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왕권의 강화와 관료 정치화의 추세에서 이와 같은 토지 사여 형식은 재편성되지 않을 수 없었다.
689년(신문왕 9년) 내외 관료의 녹읍을 폐지하고 그 대신 일종의 녹봉제(祿俸制)로서 관료전인 직전(職田)을 급여했다. 성덕왕 때에는 정전제가 실시되었다. 또한 최근에 와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 문서를 통하여 수취 체제 확립을 위한 신라 왕조의 노력을 엿보게 해준다.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은 정치 중심지로서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국내 교역은 물론 중국·일본과의 공·사무역(公私貿易)이 성행하여 수도는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통일 이전인 5세기 말에 조정에서는 상인으로 하여금 좌상점포(坐商店鋪)인 시전(市廛)을 개설케 했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의 동·서·남·북에 시전(市廛)을 갖추게 되고, 시전(市典)이라는 관청을 두어 이를 감독케 했다.
지방에는 행상(行商)에 의한 향시(鄕市)가 일찍부터 벌어져서 물물교환이 행해졌다. 한편 해상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관무역은 물론 사무역(私貿易)이 더욱 성행했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교역된 물화(物貨)는 각종 금은세공품(金銀細工品)·직물을 위시하여 신라의 인삼, 당나라의 차(茶)와 서적 등이었다. 왕실·귀족과 관서의 수요 물품은 향·소·부곡민의 노역으로 운영된 관영 수공업(官營手工業)으로써 생산되었고, 마포(麻布)나 견직물은 농민으로부터 징수했다.
7. 문화[편집]
신라의 문화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인 만큼 늦게 발전했다. 대신 신라 고유의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했다.
중국의 한자가 전래됨에 따라 사서가 편찬되었고, 언어생활에서 이중성이 생겨났다. 중국어와 고대 한국어의 언어 구조가 판이하고 한자가 표의 문자이기 때문에, 구어(口語)와 문어(文語)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불편함을 완화하기 위해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이라는 표기법이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한다. 이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사례이자 조선시대 때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 한민족의 문자로 유용하게 쓰였다.
고분 출토 유물로는 금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금속 세공품과 유리 제품·토기 등이 있는데, 신라의 금관은 그 양식이 시베리아의 샤먼의 관과 통하는 점을 지니고 있어, 불교 수용 이전 시기에 신라 문화의 성격의 일면을 전해 주고 있다. 유리 제품은 유리의 질과 제품의 양식이 로마 지역과 페르시아 지역의 것과 연결되며, 토기 양식 중에도 그러한 요소가 보인다.
또한 신라의 불교 문화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아주 발달했다. 우선 왕명이 불교식으로 바뀌어 있는데, 법흥왕과 진성여왕 등이 모두 불교식 이름이다. 또한 호국불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통일신라의 문화는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토대로 하여 삼국의 높은 문화유산을 집대성한 데 특징이 있다. 그러나 신라의 문화가 그처럼 난숙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 문화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통일신라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는 지배층의 적극적 장려로 더욱 융성, 발전했다. 그리하여 경주 부근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 679년(문무왕 19년))·불국사(佛國寺, 751년(경덕왕 10년))·봉덕사(奉德寺, 738년(효성왕 2년))[n] 등 대사찰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는 부석사(浮石寺, 676년(문무왕 16년))·통도사(通度寺, 646년(선덕여왕 14년))·화엄사(華嚴寺, 544년(진흥왕 5년) 창건, 643년(선덕여왕 12년) 중건)·범어사(梵魚寺, 678년(문무왕 18년))·법주사(法住寺, 553년(진흥왕 14년) 창건, 720년(성덕왕 19년) 중건) 등의 대사찰이 세워졌다.
불교의 융성에 따라 학덕이 높은 승려가 많이 나왔다. 자장(慈藏)·의상(義湘)·원측(圓測)·혜초(慧超)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당나라 또는 인도에 가서 역경(譯經)과 저술에 종사했으며, 혜초는 인도에 가서 불적(佛跡)을 순례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지어 당시 인도와 서역 여러 나라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고승의 배출과 함께 불교의 여러 종파가 수입되었으니, 열반종(涅槃宗)·계율종(戒律宗) 외에 새로이 화엄종(華嚴宗)과 법성종(法性宗)·법상종(法相宗)이 개창되어 이른바 5교(五敎)가 성립되었다. 이들 다섯 종파는 모두 불교의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敎宗)에 속하는 것으로서, 귀족들 사이에 신봉되었다.
원효(元曉)는 여러 종파의 대립·상쟁(相爭)을 높은 차원에서 조화·통일하려 하였으며,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했다. 그리하여 그는 전도에 따라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토교(淨土敎) 신앙을 대중 속에 널리 유행시켰다. 한편 신라 후기 불교계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선종(禪宗)의 유행이 그것이다.
신라 왕조의 지배층은 불교의 장려와 동시에 유교 사상을 권장했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의 지배층이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682년(신문왕 2년)에는 국학이 설립되었으며, 788년(원성왕 4년)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유교 진흥책은 종래의 골품제를 지양하고 학벌(學閥) 본위의 관료 체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으나, 골품제의 강인한 존속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유학의 보급에 따라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이 증가되고, 강수(強水)·설총(薛聰)·김대문(金大問) 같은 유명한 학자가 배출되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자연과학, 분야 특히 농업과 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진전을 보여 7세기에는 첨성대가 축조되고, 8세기 이후 당나라의 과학 기술이 수입되어 천문 관측기구가 제작되었으며, 수학·의학이 발달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신화와 전설이 기록되었고, 통일 전에 발생한 향가(鄕歌)는 더욱 발달하여 풍부한 서정적 내용을 담은 작품이 많이 나왔다.
삼국 시기의 초기 향가는 아마도 가야의 〈구지가〉와 같은 성격의 노래가 그 시초 형태였던 것 같고, 따라서 민요적인 소박성을 지녔으며, 주술적 기원을 담은 주가(呪歌)의 요소를 지녔다고 여겨진다. 통일기의 향가에도 그런 전통이 이어지는 면이 보이나, 주술적 기원을 불교 신앙을 빌려서 행하는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향가는 신라인의 우아하고 숭고한 이상과 기원을 담은 아름다운 종교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제망매가〉는 그러한 한 예이다. 여기서 작가인 승려 월명사(月明師)는 젊은 나이에 죽어간 누이와의 사별(死別)을 서러워하면서, 내세에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여, 인생의 덧없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지극한 심신을 표현했다.
또한 이 시기 향가 중에는 종교성을 벗어나 짙은 서정성(抒情性)을 담아 노래하거나, 〈처용가〉(處容歌)처럼 남녀의 성 문제를 해학적으로 읊은 것도 등장하여, 그 내용과 문학성이 더욱 풍부해졌다.
향가의 형식은 원래 4구체(四句體)였던 것 같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4구체 향가는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이 시기 다수의 향가는 10구체(十句體)의 정형시로서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8구체(八句體)의 향가도 지어졌다. 이러한 향가는 9세기 말 진성여왕 때에 편찬된 《삼대목》에서 집대성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에 향가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이 시기 한시로서는 최치원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최치원은 유(儒)·불(佛)·선(仙)·삼교(三敎)에 깊은 소양을 지닌 빼어난 문장가로서, 한시뿐 아니라 변려체(騈儷體)로 된 다수의 글을 남겨 신라 한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불교의 융성에 힘입어 발달한 미술은 통일신라 시기 신라의 문화 중 가장 큰 특색을 지니고 그 빛을 후세에 길이 남기게 되었다. 뛰어난 제작 기술과 고상한 미적 감각으로 경탄을 자아내는 신라 미술품 중 가장 정채(精彩)를 발휘하는 것은 석굴암이다. 조각 미술의 전당을 이룬 석굴암은 김대성(金大城)이 발원(發願)함으로써 8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신라 예술의 극치를 나타내었다.
이 시기 미술의 대표적인 것은 8세기 중엽에 세워진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이라 할 수 있다. 불국사는 귀족 김대성(金大成)의 원찰(願剎)로 처음 지어졌는데, 그 목조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 현존하는 건물은 17세기 중엽과 근래에 각각 복원된 것이다. 불국사 정문인 자하문(紫霞門)으로 올라가는 구름다리 층계와 석축은 신라 당대의 것으로, 주변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중문 안을 들어서면 석가탑과 다보탑이 대웅전 앞의 좌우에 서 있다. 이 중 석가탑은 통일신라 시기의 신라 탑의 일반형인 3층 석탑의 대표적인 것이다. 삼국통일 이후 초반에 등장한 3층 석탑인 감은사탑이나 고선사탑에선 웅장하고 강건한 품격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석가탑 단계에 오면 극도로 세련된 미적 감각과 절제된 균형미가 무르익어 조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3층 석탑은 이 단계를 지나면서 세련미가 과도해져 유약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 역시 신라 귀족 사회의 전반적인 기풍의 변화와 유관한 것이다. 다보탑은 신라 석탑의 특수형에 속하는 것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이다. 화려한 모습과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안정된 균형미를 과시하고 있다.
중국의 한자가 전래됨에 따라 사서가 편찬되었고, 언어생활에서 이중성이 생겨났다. 중국어와 고대 한국어의 언어 구조가 판이하고 한자가 표의 문자이기 때문에, 구어(口語)와 문어(文語)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불편함을 완화하기 위해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이라는 표기법이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한다. 이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사례이자 조선시대 때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 한민족의 문자로 유용하게 쓰였다.
고분 출토 유물로는 금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금속 세공품과 유리 제품·토기 등이 있는데, 신라의 금관은 그 양식이 시베리아의 샤먼의 관과 통하는 점을 지니고 있어, 불교 수용 이전 시기에 신라 문화의 성격의 일면을 전해 주고 있다. 유리 제품은 유리의 질과 제품의 양식이 로마 지역과 페르시아 지역의 것과 연결되며, 토기 양식 중에도 그러한 요소가 보인다.
또한 신라의 불교 문화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아주 발달했다. 우선 왕명이 불교식으로 바뀌어 있는데, 법흥왕과 진성여왕 등이 모두 불교식 이름이다. 또한 호국불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통일신라의 문화는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토대로 하여 삼국의 높은 문화유산을 집대성한 데 특징이 있다. 그러나 신라의 문화가 그처럼 난숙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 문화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통일신라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는 지배층의 적극적 장려로 더욱 융성, 발전했다. 그리하여 경주 부근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 679년(문무왕 19년))·불국사(佛國寺, 751년(경덕왕 10년))·봉덕사(奉德寺, 738년(효성왕 2년))[n] 등 대사찰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는 부석사(浮石寺, 676년(문무왕 16년))·통도사(通度寺, 646년(선덕여왕 14년))·화엄사(華嚴寺, 544년(진흥왕 5년) 창건, 643년(선덕여왕 12년) 중건)·범어사(梵魚寺, 678년(문무왕 18년))·법주사(法住寺, 553년(진흥왕 14년) 창건, 720년(성덕왕 19년) 중건) 등의 대사찰이 세워졌다.
불교의 융성에 따라 학덕이 높은 승려가 많이 나왔다. 자장(慈藏)·의상(義湘)·원측(圓測)·혜초(慧超)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당나라 또는 인도에 가서 역경(譯經)과 저술에 종사했으며, 혜초는 인도에 가서 불적(佛跡)을 순례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지어 당시 인도와 서역 여러 나라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고승의 배출과 함께 불교의 여러 종파가 수입되었으니, 열반종(涅槃宗)·계율종(戒律宗) 외에 새로이 화엄종(華嚴宗)과 법성종(法性宗)·법상종(法相宗)이 개창되어 이른바 5교(五敎)가 성립되었다. 이들 다섯 종파는 모두 불교의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敎宗)에 속하는 것으로서, 귀족들 사이에 신봉되었다.
원효(元曉)는 여러 종파의 대립·상쟁(相爭)을 높은 차원에서 조화·통일하려 하였으며,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했다. 그리하여 그는 전도에 따라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토교(淨土敎) 신앙을 대중 속에 널리 유행시켰다. 한편 신라 후기 불교계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선종(禪宗)의 유행이 그것이다.
신라 왕조의 지배층은 불교의 장려와 동시에 유교 사상을 권장했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의 지배층이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682년(신문왕 2년)에는 국학이 설립되었으며, 788년(원성왕 4년)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유교 진흥책은 종래의 골품제를 지양하고 학벌(學閥) 본위의 관료 체제를 확립하려는 것이었으나, 골품제의 강인한 존속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유학의 보급에 따라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이 증가되고, 강수(強水)·설총(薛聰)·김대문(金大問) 같은 유명한 학자가 배출되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자연과학, 분야 특히 농업과 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진전을 보여 7세기에는 첨성대가 축조되고, 8세기 이후 당나라의 과학 기술이 수입되어 천문 관측기구가 제작되었으며, 수학·의학이 발달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신화와 전설이 기록되었고, 통일 전에 발생한 향가(鄕歌)는 더욱 발달하여 풍부한 서정적 내용을 담은 작품이 많이 나왔다.
삼국 시기의 초기 향가는 아마도 가야의 〈구지가〉와 같은 성격의 노래가 그 시초 형태였던 것 같고, 따라서 민요적인 소박성을 지녔으며, 주술적 기원을 담은 주가(呪歌)의 요소를 지녔다고 여겨진다. 통일기의 향가에도 그런 전통이 이어지는 면이 보이나, 주술적 기원을 불교 신앙을 빌려서 행하는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향가는 신라인의 우아하고 숭고한 이상과 기원을 담은 아름다운 종교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제망매가〉는 그러한 한 예이다. 여기서 작가인 승려 월명사(月明師)는 젊은 나이에 죽어간 누이와의 사별(死別)을 서러워하면서, 내세에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여, 인생의 덧없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지극한 심신을 표현했다.
또한 이 시기 향가 중에는 종교성을 벗어나 짙은 서정성(抒情性)을 담아 노래하거나, 〈처용가〉(處容歌)처럼 남녀의 성 문제를 해학적으로 읊은 것도 등장하여, 그 내용과 문학성이 더욱 풍부해졌다.
향가의 형식은 원래 4구체(四句體)였던 것 같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4구체 향가는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이 시기 다수의 향가는 10구체(十句體)의 정형시로서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8구체(八句體)의 향가도 지어졌다. 이러한 향가는 9세기 말 진성여왕 때에 편찬된 《삼대목》에서 집대성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에 향가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이 시기 한시로서는 최치원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최치원은 유(儒)·불(佛)·선(仙)·삼교(三敎)에 깊은 소양을 지닌 빼어난 문장가로서, 한시뿐 아니라 변려체(騈儷體)로 된 다수의 글을 남겨 신라 한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불교의 융성에 힘입어 발달한 미술은 통일신라 시기 신라의 문화 중 가장 큰 특색을 지니고 그 빛을 후세에 길이 남기게 되었다. 뛰어난 제작 기술과 고상한 미적 감각으로 경탄을 자아내는 신라 미술품 중 가장 정채(精彩)를 발휘하는 것은 석굴암이다. 조각 미술의 전당을 이룬 석굴암은 김대성(金大城)이 발원(發願)함으로써 8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신라 예술의 극치를 나타내었다.
이 시기 미술의 대표적인 것은 8세기 중엽에 세워진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이라 할 수 있다. 불국사는 귀족 김대성(金大成)의 원찰(願剎)로 처음 지어졌는데, 그 목조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 현존하는 건물은 17세기 중엽과 근래에 각각 복원된 것이다. 불국사 정문인 자하문(紫霞門)으로 올라가는 구름다리 층계와 석축은 신라 당대의 것으로, 주변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중문 안을 들어서면 석가탑과 다보탑이 대웅전 앞의 좌우에 서 있다. 이 중 석가탑은 통일신라 시기의 신라 탑의 일반형인 3층 석탑의 대표적인 것이다. 삼국통일 이후 초반에 등장한 3층 석탑인 감은사탑이나 고선사탑에선 웅장하고 강건한 품격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석가탑 단계에 오면 극도로 세련된 미적 감각과 절제된 균형미가 무르익어 조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3층 석탑은 이 단계를 지나면서 세련미가 과도해져 유약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 역시 신라 귀족 사회의 전반적인 기풍의 변화와 유관한 것이다. 다보탑은 신라 석탑의 특수형에 속하는 것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이다. 화려한 모습과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적으로 안정된 균형미를 과시하고 있다.
8. 군사[편집]
신라에는 당(幢)과 정(停)이라는 군제의 기본을 이루는 일종의 군단이 있었다. 당·정은 어떤 표지(標識)를 중심으로 하여 모여드는 집단, 혹은 단체를 의미한 말로 특히 당에는 크고 작은 많은 종류의 것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대당(大幢)과 귀당(貴幢)이었다. 대당은 수도 부근에 설치된 듯한 대군영(大軍營) 또는 대군단(大軍團)이며, 귀당은 지방의 가장 중요한 군관구에 두던 군영이었다. 정은 대당·귀당에 비해 조금 떨어지지만 지방 군관 내의 본부·본영으로서 거의 각 주치(州治)에 설치되었다. 당과 정은 지방의 중요성 여하에 따라 개칭되기도 하고 폐지되었다.
8.1. 9서당[편집]
9서당(九誓幢)은 통일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 주둔하면서 수도의 방어와 치안을 담당하던 9개의 수도방비군을 가리킨다. 신라의 군사 체계인 서당(誓幢)은 583년(진평왕 5년)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기존의 육정(六停)과는 달리 귀족 출신 무장들의 모병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서당은 613년(진평왕 35년)에 녹금서당(綠衿誓幢)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후 693년(효소왕 2년)에 장창당(長槍幢)을 비금서당(緋衿誓幢)으로 개칭하면서 비로소 9서당이 완성되었다. 이는 고구려인, 백제인, 말갈인을 받아들여 민족적 융화를 통해 이국민(異國民)에 대한 반란의 위험을 덜고, 중앙의 병력을 강화한다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후 신라의 시위부(侍衛府)가 왕궁 수비를 맡고, 9서당이 수도의 방어와 치안을 맡으면서 신라의 최전성기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각 서당들은 금색(衿色, 목둘레 깃의 색)에 의해 구별되었다.
8.2. 10정[편집]
10정(十停)은 통일신라의 최상위 지방 행정 단위인 9주(九州)에 주둔하였던 지방 정예군을 가리킨다. 본래 신라는 육정(六停)이라는 군사조직이 있어서 이를 각 지방의 주에 배치했다. 그러나 삼국통일 이후 통치 지역이 넓어짐으로써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하여 677년(문무왕 17년)부터 시작하여 687년(신문왕 7년)에 이르러서 9주 5소경이 완성되었다. 이때 비로소 10정도 완비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지역이 넓고 군사적 요충지이자 발해와의 접경 지대였던 한주(漢州)에는 2개의 정을 배치하고, 다른 8개 주에는 1개의 정을 배치했다. 각 정(停)에는 지휘관인 대대감(隊大監) 1명과 그 아래로 소감(少監) 2명, 화척(火尺) 2명, 삼천당주(三千幢主) 6명, 삼천감(三千監) 6명 등의 군관이 배치되었다. 10정(十停)은 국방의 의무를 포함하여 경찰의 임무까지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