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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에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했을 때 많은 조선의 대신들이 학문이 짧다고 무시하였다가, 막상 한강을 유람하면서 시문을 주고 받을 때는 그를 당할 자가 없어서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신숙주가 성삼문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예겸을 상대하게 되었고 신숙주는 예겸과 서로 형제의 의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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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년(문종 1) 예겸이 다시 조선에 오자 그는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 해에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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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육신의 난과 단종복위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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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는 성삼문 등과 재회했다. 이때 사육신으로부터 세조 3부자 처형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신숙주는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이 명분상으로는 옳지만, 인력과 장비 부족으로 실현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명회나 권람 등에게는 이 사실을 고변하지 않았는데, 뒤에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김시습 등은 그를 추한 배신자와 변절자로 규탄하였고, 사림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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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장례 후 큰아들 신주가 22살로 세상을 떠나고 큰며느리 한명회의 딸이 손자 신종호(세째)를 낳았으니 어린 손자들을 생각하면 그때의 심경을 헤아려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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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사육신과는 결별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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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절친한 벗이었지만, 성삼문은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할 때 '비록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긴 하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또한 사육신의 동정론과 함께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에 대해 단종 즉위 후 권신들이 어린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며 반박하였고, 하위지 등이 세종의 한글창제 당시 이를 반대, 비판한 점을 들어 문맹을 구하려던 세종의 의지를 반대하던 신하들과 사육신을 비유, 맹목적인 보수성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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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년(세조 2년) 성삼문, 하위지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고 사육신과 그 관련자들이 처형되었다. 신숙주는 정승들과 함께 입조하여 단종을 강등시키고 서인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사육신인 성삼문과 박팽년은 형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신숙주를 향해 반역자, 배신자라고 규탄하였는데 이때 신숙주는 그들에게 그들은 단종의 충신이지만 금상(세조)의 충신은 아니라며 항변하였다. 신숙주는 세조 옆에서 그들의 고문 장면을 지켜봤으며 성삼문의 질타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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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의 처형 직후 그는 변방의 축성을 강화하고 남해 해안가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하게 하였으며, 대마도 도주에게 조약문의 사본을 보내 경고하였다. 곧 이어 경상북도 지역에서 이보흠과 금성대군 등의 거사로 단종 복위 운동이 다시 발생하자, 탄핵 상소를 올려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는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관철시켰다. 이때 그는 노산군의 부인 송씨를 자신의 노비로 내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세조도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는 신분만 비일 뿐 노비로서 사역시킬 수 없다 하여 정업원에 혼자 살게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산림에 은둔중인 학자들은 그가 다른 뜻을 품지 않았는가 하며 의혹과 조소를 퍼부었다. 김시습은 그가 행차할 때마다 나타나서 면박을 주거나 변절자라는 말로 조롱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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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년(세조 2년)에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도 관장하였다. 1456년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고 판중추원사가 되어 판병조사를 겸하였으며, 그해 여름 의정부우찬성이 되어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뒤 1457년 가을 의정부좌찬성이 되었다. 그 뒤 신숙주는 세조의 명을 받아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농업과 목축에 대한 간단한 백서인 농산축목서를 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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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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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3년 충훈부 당상이 되었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가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다. 그는 1474년(성종 5년) 2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이를 반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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